생성형 인공지능(AI) 시장에서 글로벌 빅테크가 지배력을 강화하는 가운데 공정거래위원회가 대응에 나섰다. 글로벌 기업의 독점적 행태를 견제하고 공정한 경쟁 질서를 확립하겠다는 것이다. 공정위는 내년부터 데이터 독점과 기업결합에 대한 규제를 중심으로 공정경쟁 환경을 조성하기 위한 법제도 개선 작업을 추진할 예정이다.
22일 공정위가 최근 발간한 ‘생성형 AI와 경쟁’ 보고서에 따르면 공정위는 생성형 AI가 막대한 자본과 데이터 접근성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초기 선점 기업에 유리한 ‘규모의 경제’를 제공한다고 분석했다. 이러한 시장 구조는 후발 주자들에게 높은 진입 장벽으로 작용해 시간이 지날수록 격차를 벌리는 요인으로 작용한다는 게 공정위 판단이다.
이번 보고서는 챗GPT 등장 이후 주목받고 있는 생성형 AI 시장에서 발생할 수 있는 불공정 경쟁과 소비자 피해를 점검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정책 과제를 발굴하기 위해 작성됐다.
AI 반도체 시장에서는 엔비디아가 독보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인텔과 AMD 같은 글로벌 기업들이 뒤를 잇고 있다. 사피온코리아, 리벨리온, 퓨리오사AI 등 국내 기업이 경쟁에 뛰어들었지만, 기술력과 자본력에서 글로벌 빅테크와의 격차가 여전히 크다고 공정위는 평가했다. 이는 단순한 기술적 열세를 넘어 시장 지배력에서 비롯된 구조적 문제로, 국내 AI 산업 발전을 가로막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공정위는 덧붙였다.
공정위는 또 클라우드 인프라 시장에서도 유사한 모습이 보인다고 했다. 아마존웹서비스(AWS), 마이크로소프트, 구글 등이 글로벌 시장을 장악한 상황에서, 네이버클라우드와 KT클라우드 같은 국내 기업들은 기술력과 자본 부족으로 확장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환경은 국내 기업에 글로벌 시장에 맞서기보다는 특정 영역에 국한된 경쟁에 머무르게 한다고 공정위는 지적했다.
공정위는 글로벌 빅테크의 독점적 관행이 소비자들에게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데이터 접근권 제한, 필수 자원의 결합 판매, 거래 조건의 일방적 설정 등으로 인해 후발 주자들의 시장 진입이 더욱 어려워질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이는 소비자 선택권 축소와 서비스 가격 상승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준헌 공정위 시장감시정책과장은 “단독법 제정보다는 하위 규정이나 고시를 통해 점진적인 개선 방향을 검토 중”이라며 “내년에는 AI 데이터 시장을 중심으로 한 정책보고서를 발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공정위는 특히 전통적인 기업결합 형태를 넘어 새로운 유형의 결합 행위를 규율할 필요가 있다고 보고 있다. 기존의 기업결합 규정은 주식 취득, 합병 등 전통적 형태에 국한되어 있었지만, 글로벌 빅테크는 기술 라이선스, 자산 공유, 파트너십 등 다양한 방식으로 시장 지배력을 강화하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영국은 비전통적 기업결합을 이미 규율 대상으로 포함했으며, 공정위도 이를 참고해 국내 법체계 개선을 검토하고 있다.
이에 따라 공정위는 글로벌 빅테크의 수직 계열화와 시장 지배력 강화를 중심으로 관련 행위를 면밀히 모니터링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AI 산업에서 빅테크 기업이 기술 플랫폼과 주요 자원을 결합해 경쟁사를 배제하거나 자사 서비스에 유리한 조건을 내세우며 시장 지배력을 확대하는 행위가 제재 대상이 될 가능성이 제기된다. 빅테크가 운영체제(OS)와 AI 기술을 결합해 경쟁사의 진입을 제한하거나, 기술 라이선스를 활용한 거래 조건을 설정하는 행위가 대표적인 검토 대상이 될 가능성이 있다.
공정위는 국내 AI 생태계에서 발생하는 경쟁제한 우려가 나타나는 행위 등에 대해서도 면밀하게 감시할 계획이다. 특히, 생성형 AI 개발을 위해 데이터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저작권자의 동의를 명확히 받지 않거나, 약관에 이를 포함하더라도 소비자가 이를 충분히 인지하지 못한다면 문제가 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앞서 독일 경쟁당국은 지난 2019년 페이스북에 시정조치를 부과하기도 했다. 독일 당국은 페이스북이 서비스 이용 약관을 근거로 이용자 데이터를 수집해 활용한 행위를 시장지배적 지위 남용으로 판단했다. 이 과정에서 약관에 명시된 내용이 소비자가 충분히 이해하거나 동의하지 않은 것으로 보고, 이에 따라 데이터 수집과 활용 방식을 수정하라는 시정 조치를 내렸다. 공정위는 독일 사례를 참고해 국내에서도 데이터 활용 과정에서의 소비자 동의 절차와 약관 내용을 면밀히 들여다볼 방침이다.
전문가들은 AI 시장이 발 빠르게 변하고 있는 만큼 공정위의 규제 체계가 필요하다고 이야기 한다. 이정희 중앙대 경제학과 교수는 “AI 시장은 커지고 있지만, 마치 교통 신호등 없는 도로와 같은 상태”라며 “규제 강화에 대한 반발은 항상 있을 수 있지만, 규제 공백이 더 큰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어 가이드라인 제시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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