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평초중고등학교 옆 작은 야산 정상에는 첨탑이 세워져 있다. 일명 육용사(六勇士) 충혼탑이다. 충혼탑에는 “한국동란, 6‧25 공산침략으로 동족상잔 비극의 통념을 금할 수 없는 동시 패전 잔당 공비가 양민 약탈만행함을 격분한 연평도 청년 30명은 황해도 구월산 공비토벌 작전에 해군 503호 선장 중위 장근섭 지휘하에 용감히 싸우다가 1950년 12월20일 적탄에 숨져간 육용사의 영령을 위로코자 연평도 유지 기관장 및 재경인향우회원들의 정성으로 충혼탑을 건립함. 육용사 명단(연령순) 장희규(1922.1.10.), 김갑순(1925.5.5.), 유홍섭(1926.8.18.), 박정섭(1929.12.20.), 박광호(1931.12.12.), 박만복(1932.9.1.)”이라 되어 있다. 6명 중 청년은 앞의 4명, 학생은 뒤의 2명으로 각각의 단체에서 활동하다가 북진 과정에서는 통합하여 운영하였다.
▶학도호국단에서 학도선무공작대로 명칭 변경
학도호국단은 1949년 9월에 중등학교 이상의 각급학교에 학생과 교직원을 단원으로 결성, 발족한 단체로 전국적 규모로 조직되었다. 이곳에서는 ‘학도대’로 부르고 있으며, 생존자의 증언에 의하면 “6‧25전쟁 이후에는 학도선무공작대(學徒宣撫工作隊)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학도대의 대장은 유봉식(연세대), 부대장은 박상규였으며, 이들은 방위군 장교 김삼억(대위)의 강도 높은 단기 훈련(사격, 각개전투 등)을 통해 고지에 배치되어 방어 임무를 수행했다.
한편 6‧25전쟁이 발발하자 서울, 인천, 옹진 등에 있던 유학생들이 연평도로 귀향하여 머무르게 되자 이들도 대부분 합류하여 고향 향토방위에 힘썼다.
그러나 인천상륙, 서울수복이 이루어질 때 대장 유봉식 등 일부 대원이 군에 입대하면서 학도대는 와해하여 단기간 운영되었다. 그후 1950년 10월 초 연평도에 해군정보부대(CIC)가 주둔하면서 대장 해군병 조장 송주엽이 ‘학생선무공작대’를 새로 조직했다. 이 공작대에 참여했던 김항식(93, 수원)에 의하면 “당시 연평도는 육지에서 유학하는 유학생들이 귀향해 있던 터라 학생들이 많았는데, 그들이 다수 포함되어 조직됐다. ‘선무공작’이란 단체 이름은 해군이 지었으며, 의미도 모른 채 옛날 우체국 자리에 모여 임원을 선출했다. 대장은 박상규(한성중), 부대장은 박병재(중앙중), 총무는 김항식(성신대학 부속중)이 선출됐다. 훈련 장소는 넓은 해변이나 학교 운동장이며, 해군이 직접 M1 그리고 카빈총을 분출하여 주었다”고 증언했다.
▶육용사충혼탑
이처럼 인천상륙에 이어 서울수복 그리고 북진이 거듭되고 있던 9월 중순~10월, 학생들은 고향을 지키기 위한 노력이 컸고, 대동청년단장이었던 최영희가 피란에서 돌아오면서 경비 임무를 맡게 됐다. 그러나 연평도 청년들은 방위특공대를 조직하여 해군함정 503호와 함께 해주시에 상륙하여 황해도청 내에 비상경비대를 설치하고 대한청년단장 최영희를 사령관으로 추대하여 해주시 일대를 경비하였다. 이때 박만업은 작전과장을 맡았다.
UN군이 북진함에 따라 작전과장 박만업은 특공대원 21명을 인솔하고 신천 은율지구 구월산 공비토벌작전에 참가하게 되었다. 그러나 중공군의 참전으로 1·4후퇴를 하게 되면서 이 작전에 참여했던 21명 중 7명이 실종되었다. 후에 김상옥 1명만이 구사일생으로 돌아오고 나머지 6명은 적지에서 용감하게 싸우다가 산화한 것이다. 이 6명의 명단이 비문에 있는 것이며, 이들의 충성심을 높이 기려 충혼탑을 세우게 된 것이다.

/김석훈 인천섬유산연구소 이사·문학박사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