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BC뉴스]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 박사는 1919년 3·1운동 당시 일제의 잔혹한 만행을 세계에 알리며 ’34번째 민족대표’로 불리게 됐다. 그가 기록한 수촌리의 비극은 일제의 무자비한 폭압을 여실히 보여준다. 1919년 4월 6일 새벽, 일본군과 경찰이 수촌리 마을을 급습해 집마다 불을 지르고, 불길을 피해 뛰쳐나오는 주민들에게 총칼을 겨누었다. 국가보훈부 공훈전자사료관에 따르면, 이 공격으로 마을 사람 1명이 목숨을 잃고 여러 명이 다쳤다.
스코필드 박사는 이 사건 후, 잿더미가 된 마을을 둘러보며 ‘수촌리 잔학 행위 보고서’를 작성했다. 그는 이 보고서에서 “경관이 살해당한 것은 사실이나 (수촌리에서) 상당히 떨어진 곳에서 일어난 일이고 사람들은 그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고 지적하며, 무고한 사람들에게 가해진 폭력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다. 그는 “사람들은 이제 자신들이 잘못을 저지르지 않더라도 일본인들이 자신들을 죽이려 한다고 느끼기 시작했다”며, 일제에 대한 반감이 커지고 있음을 밝혔다.
스코필드 박사는 일제의 잔혹한 행위에 대해 “어떤 형태로든 정의를 실현할 수 없는데 법의 테두리 안에서 살려고 애쓰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라고 일제의 폭압을 비판했다. 그는 캐나다 장로교회 소속 선교사이자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수로서, 수촌리를 비롯해 제암리와 화수리 등에서 벌어진 일제의 만행을 생생하게 기록해 국제 사회에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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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필드는 이러한 공로로 1968년 한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으며, ‘석호필'(石虎弼)이라는 한국 이름으로도 널리 기억되고 있다. 국사편찬위원회의 ‘삼일운동 데이터베이스’에서는 스코필드 박사가 남긴 자료 정보와 당시 사건의 면면을 확인할 수 있다.
허동현 국사편찬위원장은 “일제 식민 지배의 폭압에 맞서 전 민족 성원들이 독립을 외친 3·1운동은 대한민국 헌법 정신의 기초가 되는 역사적 사건”이라고 강조했다. 1919년 일제에 항거해 일어난 3·1운동 당시 발생한 시위는 약 1,800건에 이르며, 관련 서류와 기록을 분석한 결과, 시위에 참여한 인원은 최소 82만∼106만여 명에 이른다. 국사편찬위원회는 실제로 참여하거나 관련 활동을 한 사람은 훨씬 더 많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스코필드 박사의 기록은 3·1운동 당시 일제의 잔혹한 만행을 잊지 않도록 하는 중요한 증거로 남아 있으며,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그의 기여는 매우 크다. 그의 보고서는 당시 국제 사회에 일제의 만행을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했으며, 이는 한국 독립운동의 정당성을 더욱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
(기사발신지=연합뉴스)
▮ CBC뉴스ㅣCBCNEWS 한종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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