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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정상회담이 파국으로 끝났다. 우크라이나의 안보 지원과 광물 공동 개발 협정을 위한 두 정상의 만남이었지만 정상 외교 무대에서 거의 볼 수 없는 수준의 고강도 언쟁이 펼쳐진 후 협상은 결렬됐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28일(현지 시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트루스소셜 계정에 “젤렌스키 대통령이 평화를 준비하지 못했다”며 “그는 소중한 오벌오피스(백악관 집무실)에서 미국에 무례를 범했다”고 말하며 사실상 결렬을 알렸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이날 협상을 위해 미국 워싱턴DC 백악관을 찾아 카메라 앞에서 트럼프 대통령, J.D 밴스 부통령과 대면했지만 만남은 곧장 언쟁으로 번졌다.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이후 젤렌스키 대통령은 곧장 백악관을 떠났고, 광물 거래 협정에 대한 서명은 이뤄지지 않았다. 계획된 서명식과 기자회견은 취소됐다.
회동 후 불과 몇 분 뒤 언쟁은 시작됐다. 젤렌스키 대통령이 2019년 이후 우크라이나 평화를 위한 미국의 외교적 노력에 대한 지적을 하자 밴스 부통령이 “존중심을 갖춰라”고 말하면서 분위기가 틀어지기 시작했다.
이후 젤렌스키 대통령이 “전쟁 중에는 모두가 문제를 겪고, 미국도 마찬가지”라며 “지금은 바다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없지만 곧 느끼게 될 것”이라고 말하자 트럼프는 곧장 “우리는 문제를 풀러 왔다. 우리가 어떻게 느끼느냐가 중요한게 아니다”라며 말을 끊었다.
젤렌스키 대통령이 이에 지지않고 자신의 말을 이어가자 트럼프 대통령은 “당신은 지금 유리한 위치에 있지 않다. 당신은 카드가 없다”고 말했다. 이어 “지금 당신은 수 백 만 명의 목숨을 걸고 도박을 하는 것이고, 세계 3차 대전을 걸고 도박을 하고 있는 것”이라며 강도 높은 비판의 발언을 이어갔다. 트럼프의 이 같은 발언 도중에도 젤렌스키 대통령은 자신의 발언을 이어갔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금 당신이 하는 행동은 이 나라에 대한 무례”라고 불쾌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옆 자리에 있던 밴스 미국 부통령도 트럼프 대통령을 거들고 나서면서 언쟁은 다시 밴스 부통령으로 옮겨갔다. 밴스 부통령이 “당신은 한 번이라도 고맙다고 말한 적이 있나”라고 묻기 무섭게 젤렌스키 대통령은 “여러 번 했다”고 응수했으며, 이에 밴스 부통령은 “이 자리에서 했는지를 말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후 트럼프 대통령은 “당신은 이미 말을 많이 했다”며 젤렌스키 대통령의 발언을 중단 시키기도 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이 밴스 부통령에게 “만약 부통령께서 전쟁에 대해 큰 소리로 말하려면…”이라고 말을 꺼내자 트럼프 대통령은 “부통령은 큰 소리를 낸적이 없다”고 막아섰다. 트럼프 대통령은 그러면서 “당신의 국가는 큰 위기에 처해있다. 지금 이기고 있는 것이 아니다”라며 미국과의 협상을 받아들일 것을 요구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금까지 우크라이나에 대한 미국의 지원이 “어리석다”고도 표현했다. 제렌스키 대통령이 “우리는 전쟁이 시작될 때부터 홀로 서 있다. 물론 우리는 감사하다. 고맙다고 말했다”라고 말하자, 트럼프 대통령은 “우리는 우크라이나에 3500억 달러에 달하는 어리석은 선물을 줬다”며 “우리가 지원한 장비가 아니었다면 전쟁은 2주만에 끝났을 것”이라고 말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곧장 “아마 3일 이었을 것이다. 푸틴이 3일이라고 말했다”고 응수했다. 이는 ‘그래서 우리를 지원하지 않고 러시아와 같은 입장에 설 것이냐’는 뜻을 담은 항의의 표시로 풀이된다.
이후 이어지던 논쟁은 트럼프 대통령이 “우리와 함께라면 당신에는 (협상, 생존) 카드가 있겠지만 우리가 없다면 당신에게 카드는 없다”며 발언은 마무리 됐다. 이후 오찬과 기자회견 일정이 있었지만 젤렌스키 대통령은 회담 직후, 오찬을 한시간 여 남겨두고 백악관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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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매체 파이낸셜타임스(FT)는 이날 정상회담을 두고 “참사(debacle)”라고 표현했다. FT에 따르면 한 유럽 외교관은 “우리는 이제 잠에서 깨서 ‘이게 전부다’라는 걸 깨달아야 한다”고 말했다. 또다른 외교관은 “대서양 넘어 있는 부모는 우리를 집에서 내쫓고 용돈도 끊고, 상속권도 박탈했다”며 “우리는 혼자다”고 말했다. 도널드 터스크 폴란드 총리만이 “젤렌스키 대통령과 우크라이나 친구들, 여러분들은 혼자가 아니다”라고 위로했다.
이날 자리는 전쟁 종전 및 양국간 경제협력 문제에 대해 담판을 벌이기 위한 자리였다. 광물 협정은 우크라이나의 희토류 등 광물 자원을 미국과 우크라이나가 공동 개발한 뒤 양국 공동 기금에 재투자한다는 내용을 담을 예정이었다. 공개된 문서에는 “미국 정부는 우크라이나가 지속적인 평화를 구축하는 데 필요한 안보 보장을 확보하려는 노력을 지원한다”는 문구가 담겼다.
다만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종전 협상 노력은 시작단계부터 우크라이나와 유럽의 불만을 샀다. 트럼프 행정부는 앞서 종전협상 준비를 시작하면서 우크라이나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가입 불가를 시사하고 러시아가 2014년 이래 강탈한 우크라이나 영토에 대한 ‘전면적 원상회복’도 어렵다는 입장을 사실상 표명했다. 특히 우크라이나와 유럽을 제외한 채 러시아와의 고위급 대화(18일 사우디아라비아)에 먼저 나서면서 우크라이나와 유럽의 반발을 산 바 있다.
이날 결렬에도 불구하고 협상이 재개될 가능성은 남았다. 트럼프 대통령은 트루스소셜 글에서 “그는 평화를 맞을 준비가 됐을 때 다시 돌아올 수 있다”며 협상 재개 여지를 남겨뒀다.
한편, 트럼프 대통령이 우크라이나에 제공한 미국 지원의 규모를 3500억 달러(약 510조원)라고 주장한 것과 관련 BBC는 전날 실제 액수는 그보다 적다고 보도했다. 독일 킬(Kiel) 연구소 집계에 따르면 2022년 1월부터 지난해 까지 미국의 우크라이나 지원 금액은 1197억 달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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