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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은 6.25 참전국이다. 미국을 제외하면 가장 먼저 파병했고, 육해공군을 모두 보냈다. 유엔군의 일원으로 참전국 중 가장 늦은 1972년까지 주둔했다. 현재도 약간 명의 의장대원과 기수단이 남아 ‘UN 연합사령부’ 소속으로 맡은 바 임무를 다하고 있다. 태국의 수도 방콕의 왕궁에서 자동차로 10분 거리에 ‘태국 왕실 후원 한국전 참전 용사 협회’가 있다. 반딧 마라이아리순 회장(86)은 육군 대장 출신으로 1961년에 임관해 1998년에 전역했다. 위라싹 깬마니 부회장(87)은 공군 중장 출신으로, 젊은 시절 전투기 조종사였다. 역시 1961년 임관해 1997년 전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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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제 한국에 파견되었나.
“둘 다 23기다. 태국군은 1년마다 교대했다. 50년도에 파견됐던 분들이 1기이고 저희는 마지막 기수인 23기다. 1972년에 철수할 당시의 멤버다. 129명이 남아있었다.”
– 대한민국 국민은 태국이 군대를 파병하고 가장 늦게까지 주둔한 데 대하여 지금도 감사하게 생각한다. 태국이 16개국 참전국 중에 가장 늦게까지 남아있던 이유는.
“유엔의 결정에 따르는 것이 국제사회에서 태국의 입장이었다. 군 입장에서는 한국전에 참전함으로 해서 전투 경험이 쌓인다는 점이 중요했다. 또 국제사회에서 태국의 위상을 높이자는 목적도 있었다. 가장 중요한 목적은 따로 있다.”
– 뭔가.
“북한의 침공에 맞서서 한반도의 평화를 지켜야 한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적이었다. 6.25는 유엔군 깃발아래 싸운 아직까지는 처음이자 마지막 전쟁이다. 유엔군 자체가 다국적군으로 이뤄져야 하기에 72년까지 주둔했고 지금도 소수의 군인이 한국에 남아있는 것이다.”
– 6.25 참전 당시 대대장이 끄리엔끄라이 아따난트나 중령이었고, 72년 철수 당시 태국군 책임자가 아들이었다.
“맞다. 저기 사진이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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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와 아들을 보낸 건 태국 정부의 배려인가.
“의도가 있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태국에선 아버지가 군인이면 아들도 군인인 경우가 많다. 그래서 그렇게 된 것이다.”
– 대한민국 국민은 이것을 굉장히 아름다운 인연이라고 생각한다.
“인연이 있는 것이라고 얘기할 수 있겠다. 운명이었는지도 모르겠다.”
– 파병 기준은.
“태국군 입장에서도 파병은 상당히 중요한 사건이었다. 그래서 지원자 가운데 정예 중의 정예를 선발해서 보냈다. 그러니까 아버지도 아들도 굉장히 훌륭했던 거다. 두 분 다 선발될 정도의 능력이 있었기 때문에 간 것이지 누구의 아들이라서 보낸 건 아니다.”
– 두 분은 어떤 군인이었나.
“두 분 다 훌륭한 군인이셨다. 아버지는 태국에 돌아와 장군으로 승진하고, 훗날 육사 교장을 지냈다. 태국 입장에서는 다른 곳에 파병할 일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두 분 다 태국군을 대표할만한 능력과 인품이 훌륭했기에 한국에 간 것이다.”
– 72년 당시 회장님 부회장님 계급은.
“육군 대위, 공군 대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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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무지는 어디였나.
“의정부였다. 의정부에만 있지 않고 유엔군 일원으로 훈련도 같이 하고, DMZ 경계 경비임무도 같이 수행했다. 판문점 지역에도 있었다. 유엔군 16개국 참전군의 일원으로 태국군이 참전했다는 것도 자랑스럽고, 끝까지 판문점 주변을 지키는 업무를 수행했다는 사실에 지금도 자부심을 느낀다.”
– 아직도 소수의 병력이 남아 있다.
“지금도 유엔 사령부 산하에 태국 군이 기수단으로 가 있다. 아직까지 역할을 하고 있다. 한국전은 휴전 중이다.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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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민 업무도 많이 했다고 알고 있다.
“양로원, 고아원 가서 봉사활동도 많이 했다.”
– 한국에 오셨을 때 가장 기억나는 일이 있다면.
“처음에 갔을 때 눈 내리는 것 보고 굉장히 기뻤다. 생전 처음 보는 눈이라 신기하고 즐거웠다. 하지만 얼마 지나고 나서 그것이 그렇게 반가워할 일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눈 오면 바로 치워야 하지 않나. 우리끼리 얘기지만, 경기 북부와 DMZ는 정말 눈이 많이 오더라.”
– 혹시 지금도 기억하는 한국어가 있나.
“이뻐요. 저는 여러분을 사랑합니다.”
– 72년 철군 환송식 때 한국에서는 국무총리도 참석하고 의전이 성대했다.
“김포공항에서 행사를 했다. 파병 갈 때는 배타고 갔는데 태국 돌아올 때는 비행기를 탔다. 유엔 의장대도 나오고 한국 고관들도 많이 참석하시고, 아주 성대한 환송식이었다.”
– 태국 공군의 수송기는 의료 장비가 갖춰진 유일한 수송기여서 전쟁 기간 동안 매우 큰 공헌을 했다. 미리 준비를 했던 건가.
“한국전쟁을 위해서 특별히 개조한 거다. 유엔군의 요청이 있었다고 알고 있다. 태국은 군인 뿐 아니라 의료 지원단도 보냈다. 당연히 거기에 맞춰서 장비를 보낸 거다.”
– 6.25 때 태국군 129명이 전사했다. 그분들을 생각하면 어떤 심정인가.
“태국 기록에는 전사자가 136명이다. 전투에 나가서 전사자가 발생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유엔군의 일원으로 참전, 나라를 위해서 그리고 우방 대한민국을 위해서 전사한 분들은 한분 한분이 모두 영웅이다. 전사자 본인, 가족도도 명예롭게 생각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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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2년에 철군 후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나.
“여러 번 다녀왔다. 한국 정부로부터 훈장도 받았다. 대한민국은 저희에겐 제2의 고향이다. 지금도 한국을 방문하고 싶다.”
– 가장 최근에 다녀오신 건 언제인가.
“4년 전, 코로나 직전이다.”
– 1972년과 비교해 가장 달라진 점은.
“마지막 방문 때 롯데타워에 올라갔다. 72년도만 하더라도 한강에 다리가 몇 개 없었다. 롯데 타워에서 보니 다리가 정말 많더라. 계속 몇 개인지 세다가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그것 한 가지만 보더라도 그동안에 얼마나 많은 발전과 변화가 있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
– 대한민국이 자랑스럽나.
“물론이다. 대한민국은 제 삶의 중요한 일부다. 88 서울 올림픽, 2002 월드컵, 2018 평창 종계올림픽 등 세계적 이벤트를 모두 개최한 나라가 몇이나 되나. 대한민국은 지금 세계가 인정하는 선진국이다. 한국이 자랑스럽다.”
– 태국과 한국의 관계에 대한 생각은.
“예전엔 태국이 한국을 도왔지만 지금은 대한민국이 우리에게 구축함과 비행기를 판다. 아마 탱크도 구입 논의를 하고 있을 것이다. 한국은 그런 나라가 됐다. 놀라운 변화가 있었다. 원조 받던 나라가 세계에 원조하는 나라로 올라섰다. 지금은 경제적으로 세계 상위 10위권 안에 들었지 않나. 저희 일처럼 기쁘게 생각하고 또 축하도 드리고 싶다.”
– 한국 국민들에게 이 얘기는 꼭 좀 하고 싶다 하는 것이 있다면.”한국과 태국의 관계는 어려울 때 외면하지 않고, 서로 손을 내밀고 도와주는 관계다. 그런 관계가 계속 이어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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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끝으로 빠뜨린 말씀이 있다면.
“70년 이상 지난 일을 잊지 않고 이렇게 찾아와서 감사를 표시해 주는 것에 감동한다. 우리를 기억해 주셔서 정말 감사하다.”
–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되겠지만, 혹시 한국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두 분은 참전 의사가 있으신가.
“아직 안 죽었다면 당연히 참전한다. 한국 편에 서서 끝까지 싸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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