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기획]K바이오, ‘제약 강국’ 스위스서 배운다(下)
시계로 유명한 스위스의 수출 1등 공신은 제약산업이다. 인구는 약 892만명으로 934만명인 서울보다 적지만 2023년 제약·화학산업의 수출액은 1355억300만스위스프랑(약 220조5000억원)에 달한다. 스위스 전체 수출의 36%로 1위다. 2023년 한국의 수출 품목 1위인 반도체 수출액 986억3000만달러(약 145조6800억원)의 약 1.5배에 이르는 규모다. 스위스에서 제약·바이오 산업을 이끄는 곳은 바젤시다. 유럽 내 최대 바이오 클러스터(산업집적지)다. 10대 다국적 제약사인 노바티스와 로슈의 본거지이기도 하다. 이에 본지는 바젤에서 제약·바이오 산업 관계자들을 만나 비결을 듣고 K-제약·바이오 산업의 나아갈 길을 모색해봤다.
유럽 최대 바이오 집적지 바젤…’생명과학의 옥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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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젤 관계자들은 시의 성공 비결을 높은 수준의 바이오 산학연 생태계, 우수한 인재 영입, 지리적 위치, 낮은 세율 등을 꼽는다. 크리스토프 클뢰퍼 바젤투자청 대표는 ‘바젤 스위스 혁신센터'(기업이 대학·연구기관과 협력할 수 있게 조성한 공간)로 운영 중인 노바티스 캠퍼스의 한 건물에서 본지와 만나 “바젤에선 200여년 전쯤 직물산업으로 시작해 100여년 전엔 강과 소금광산이 있어 화학산업이 발달했으며 1970~1980년대에는 제약·바이오산업이 발전했다”며 “산업 전환이 빠르게 진행한 배경에 쉬운 스위스의 고용과 해고가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유럽 최대 제약 시장인 독일, 프랑스와 맞닿은 지리적 위치로 수출 등이 용이하고 이탈리아도 가까워 유럽 내 인재들을 쉽게 고용할 수 있다”며 “1000개가 넘는 우수한 연구그룹과, 생명과학 기업들, 대학, 노바티스와 로슈 등 대형 제약회사, 론자와 바켐 등 세계적 위탁개발생산(CDMO) 회사가 우수한 생태계를 이루고, 수많은 신생기업(스타트업) 등이 생명과학 분야를 풍부하게 한다”고 덧붙였다.
콘라딘 크래머 바젤시장도 본지와 인터뷰에서 “각 회사들이 연구개발에 상당한 투자를 하고 지역 내 바젤대, 바젤대병원, 프리드리히 미셔 생물의학연구소 등 우수한 연구기관을 통해 학계 산업계 의료계 간 역동적인 협업이 이뤄진다”며 “세계적 기업과 근접성은 자석효과를 발휘해 숙련된 인재를 끌어들인다”고 말했다. “바젤 일대에 생명과학 회사는 약 700~800개, 생명과학 전문 종사자는 3만3000여명으로 도시 내 생명과학 분야 회사와 기관의 밀도가 전 세계적으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고도 했다. 덕분에 전문가 간 교류도 활발하다는 설명이다.
기업의 자금 조달도 지원한다. 크래머 시장은 “치료 혁신 분야의 ‘베이스런치’와 의료기술 분야의 ‘데이원’ 같은 프로그램으로 신생기업을 발굴해 투자금 유치를 돕고 대형 제약사로부터 상담을 받을 수 있게 한다”고 설명했다.
2016년부터 스위스 연방정부와 지방정부 투자로 운영되고 있는 비영리기관인 바젤투자청은 지난해까지 260개 기업의 정착과 580개 신생기업의 설립을 지원했다. 바젤 혁신센터 내 실험실과 사무실 등을 저렴한 임대료로 제공한다. 클뢰퍼 대표는 “민간에서 바이오 실험실 최소 임대기간이 5년인데 우린 6개월도 가능하고, 실험실 내 한 자리만 빌리는 것도 가능하다”고 했다.
대학에서도 창업을 지원한다. 2017년 문을 연 바젤대학교 혁신소는 전문가 지도, 지원금 등으로 창업을 돕는다. 알렉산드로 마제티 바젤대 혁신소장은 “바젤대에선 1996년 이후 110개 이상의 기업이 탄생했고 2조4000억원 정도의 투자금을 유치했는데, 창업 기업의 절반 정도가 혁신소의 도움을 받았다”며 “창업 기업의 70~80%가 바이오 기업”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바젤대에선 필요에 의해 기술을 개발시키고 이게 창업으로 이어진다”며 “의대 교수들이 대형 제약사와도 협력을 많이 하다 보니 연구에 조예가 깊은 점도 강점”이라고도 했다.
바젤의 법인세율은 13%로 낮은 수준이다. 특정 연구개발 진행 시 추가 공제로 11%까지 낮아진다. 미국의 법인세 최고세율 21%, 한국 24% 대비 약 절반 수준이다.
바젤에선 한국의 제약·바이오산업의 발전을 위해 시간과 긴 호흡의 투자가 필요하다고 본다. 클뢰퍼 대표는 “한국 송도 등을 방문했는데 의약품 생산시설 등을 잘 만들어놨었다”며 “바젤 클러스터는 150년 정도 됐는데 그만큼 시간이 걸린다. 한국은 시작 단계이니 시간이 더 필요할 것”이라고 봤다.
김혜인 바젤대 혁신소 매니저는 “스위스에서 국가과제 등이 있을 경우 5년이 기본인데 한국에서는 1년짜리 프로젝트가 많다”며 “1년 안에 성과가 나오기 쉽지 않으니 더 기다려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마제티 소장은 “한국에선 투자자들이 독촉해 기업공개(IPO)를 빨리 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러다 보니 기술 개발과 해외 진출에 소홀해지는 면도 있는 것 같다”며 “혁신소에선 서울바이오허브 등과도 협업하며 한국 신생기업도 지원하는데, 해외 경험이 적은 회사들은 작은 시장이 있는 유럽에서 도전하고 경험해보는 것도 권한다”고 말했다.
정부가 왜 사기업 연구개발을 지원해야 하냐고? 스위스에서 찾은 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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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바젤에 진출한 한국기업 관계자들은 제약·바이오 산업 활성화를 위해선 정부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전략적 공적개발원조(ODA) 등으로 해외진출을 돕고 연구개발(R&D) 투자를 확대할 필요가 있다는 조언이다.
인공지능(AI) 기반 말라리아, 암 등 진단기기 제조업체인
노을의 김태환 스위스법인장 겸 최고사업책임자(CBO)는 본지와 인터뷰에서 “노을은 6년 전 바젤에 법인을 만들었고, 바젤투자청의 공유사무실을 쓰면서 바젤 내 노바티스, 스위스 정부 연구기관인 스위스TPH(열대·공중보건연구소) 등과 협업하고 세계보건기구(WHO)와도 끊임없이 소통하고 있다”며 “결국 네트워크(연결망) 싸움인데, 이를 구축할 수 있도록 정부가 도와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현지화 전략이 중요한데, 이를 통해 해외에서 계약체결 등의 성과가 나오기 때문”이라며 “해외에서 현지화를 하려면 돈이 많이 필요한데 정부가 공유사무실을 확보하고 현지 전문가를 채용할 수 있도록 재정적·제도적 지원을 해주면 바이오기업 경쟁력 강화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노을의 경우 약 6개월 전 독일 현지 인재를 채용했는데, 지난달 독일 1위 진단실험실 업체와 공급계약을 체결하며 독일 시장에 진출하는 성과를 냈다.
아울러 김 법인장은 정부가 국제기구에 자금을 지원할 때도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봤다. 그는 “정부가 국제기구에 자금을 지원하는 것은 국가 이익을 위해 하는 것”이라며 “한국 정부도 자금을 지원하면서 한국기업의 제품을 쓰도록 한다거나, 정부가 국제기구와 한국 기업 간 관계를 주선하는 등의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일본은 이런 것을 잘 활용하고 있다”고 했다.
정부의 연구개발 투자 강화도 필요하다는 견해다. 유전체 분석 생명공학기업인
마크로젠의 김봉조 유럽법인장은 “스위스는 바이오산업의 중심지로 신규고객의 유입과 확장을 위해 2023년 8월 바젤에 별도의 법인을 설립했다”며 “스위스는 연구개발 투자를 아끼지 않는데, 한국도 정부와 민간이 함께 연구개발 투자를 확대하고 혁신적인 기술 개발을 지원해야 한다”고 했다. 또 “대학과 연구소, 기업 간 협력으로 연구성과를 공유하고 이를 상용화하는 데 정부의 협력 기반 구축과 지원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스위스 내 제약·바이오업체 근무 한인 모임인 한·스위스 바이오제약네트워크의 김주하 회장은 “한국 내 거점 역할을 할 대형 제약사가 부재한 만큼 다국적 제약사의 연구소를 국내에 유치하고 세계 우수 인재와 기업들이 모일 수 있게 각종 혜택을 집적화한 시범지구 등을 설치하고 역량을 내재화하면 한국 내 다국적 제약사의 탄생 시간이 단축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바젤, 보스턴 등에 직원을 채용해 신약후보물질을 선별할 수 있는 안목을 기르고 유럽 등의 우수 바이오사를 인수합병하는 것도 추천한다”며 “싱가포르처럼 정부가 주도적으로 국내외 기업들을 유치해 혁신 연구 과제를 진행할 필요도 있다”고 제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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