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21일, 서울로 올라오던 전봉준 투쟁단 트랙터가 남태령에서 봉쇄당했다. 경찰이 농민들을 폭력적으로 저지하는 동영상이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이에 SNS에서 분노의 소리가 증폭됐다.
“경찰들은 밥을 처먹지 말라”, “나라의 근간은 농민이다”와 같은 목소리들이 들고일어나는가 하면, 전농 후원 공지가 쇄도하기 시작했다. 이 불길의 발화점은 청년들, 특히 2030 여성들이었다.
2016년 촛불정국에도 전봉준 투쟁단에 응원이 쏟아졌지만, 그때는 광화문으로 진격하는 아군 이미지에 대한 열광이었지 트랙터에 실린 농민들의 분노와 멍든 마음까지는 헤아리지 못한 터였다. 더군다나 경찰이 양재IC에서 투쟁단을 봉쇄되자 대중의 기억 속에 트랙터는 까무룩히 잊혀졌다. 대치 과정에서 농민들이 외롭게 다치고 경찰들에게 서럽게 끌려갔다는 사실도.
그러나 22일, 남태령의 동짓날 새벽은 판이했다. 트랙터 앞에서 물결치는 천 개의 응원봉들, 칼바람 속에서 노래와 춤으로 서로를 감싸안은 연대의 열기. 누가 봐도 전혀 새로운 시간이었다.
이번 시국에서 가장 역동적이고 감동적인 장면이 아닐까. 그것은 대통령 하나만을 파면하는 데 집중하는 ‘탄핵의 시간’도 아니며, 정권 재창출이라는 정치 일정표에 종속된 ‘민주당의 시간’과도 다르다. 오히려 2016년 ‘나중에’로 가차없이 밀려났던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 노동자 들이 2024년 ‘가장 먼저’ 달려와 농민들과 함께 펼쳐낸 광장의 시간이었다. 충분히 애도되지 못한 유령처럼, 제 삶이 부정당한 주체들은 반드시 돌아오기 마련이다.
‘나라는 2030 여성을 버렸지만 2030 여성은 나라를 구하기 위해 이 자리에 왔다’며 응원봉을 들고 트랙터 앞에 몰려온 젊은 여성들, 아무리 광장에서 무지개 깃발을 흔들어도 끝내 나중에 라는 말과 함께 영겁처럼 배신당해왔던 성소수자들, 이 정부든 저 정부든 끊임없이 권리를 부정당해왔던 장애인들, 기본권 보장도 없이 죽고 다치고 생존의 수레바퀴에 갈려나가는 노동자들, 그리고 저 소멸의 끝자락에서 외롭게 저항하는 농민들. 이렇게 뒷전으로 밀려나 있던 바로 이 시민 주체들이 서로를 돌보고 서로를 부조하기 위해 연대의 스크럼을 짠 채 우금치와 백남기의 기억을 끌어안고 마침내 차벽을 뚫어낸 이 역사적인 순간은 정확히 ‘시민의 시간’이다.
시민의 시간은 동심원을 그리며 세차게 퍼져나간다. 남태평 대첩 직후 전태일 의료센터에 쏟아진 수억 원의 기부금처럼, 여성 농민의 농산물 플랫폼인 ‘언니네 텃밭’에 우우 밀려든 회원가입처럼, 안국역에 드러눕고 전장연과 함께 이동권 투쟁을 벌인 2030 여성들처럼, 거통고 조선 하청지회 파업기금에 간밤의 눈같이 쌓인 후원금처럼, 또는 저기 353일째 고공농성을 벌이던 구미 옵티칼 공장에 줄지어 밀려든 생수들처럼. 바야흐로 연대의 지평선이 펼쳐졌다.
광장은 여러 시간이 흐르기도 하고, 단 하나의 시간이 지배적이기도 하다. 2016 시국 때는 다양한 시민 주체들을 배제한 의회와 민주당의 시간이 지배적이었다. 문재인 지지자들은 성소수자들을 향해 매몰차게 나중에를 외쳤고, 뒤이어 우원식 국회의장은 2020년 총선에서 “동성애를 반대합니다”며 자신의 기독교 신앙을 태연하게 자랑했다. 그 나중에는 오늘날까지도 여봐란 듯 이어진다. 12월4일, 국회 앞에서 이재명 대표는 박경석 전장연 대표에게 이렇게 속삭였다. “이런 행사하는 데 와서 그렇게 하면 그게 호소력이 있겠어요? 더 미움받지.”
당연히 탄핵의 시간은 중요하다. 친위쿠데타를 일으킨 윤석열과 내란 종범들을 지옥 끝까지 쫓아가서라도 발본색원해야 한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시민의 시간도 필연적으로 중요하다. 시민의 시간이 또 나중에로 밀려나면, 그리고 광장을 수놓는 수천 개의 빛들이 꺼져 버린다면 다시 만날 민주주의는 또다시 불완전할 것이고, 우리가 다시 만날 세계는 여전히 불평등할 것이기 때문이다.
윤석열 세계, 괴물 윤석열을 대통령에 앉히고 그 부패한 일당을 제멋대로 날뛰게 만든 이 병폐적 세계는 단순히 윤석열 개인 하나 제거한다고 해서 무너지지 않는다. 불완전한 민주주의와 불평등한 세계가 지속되는 한 제2의, 제3의 윤석열이 끊임없이 귀환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지난 2016의 결정적 교훈이다. 그리고 2024의 광장, 우리는 비로소 다른 시간이 펼쳐지는 광경을 목도하고 있다. 남태령이 그 서막이다.
반드시, 나중에로 유예됐던 시간들은 이 망가진 세계를 구원하기 위해 약속처럼 귀환한다. 윤석열 세계의 시간을 뿌리까지 도려내고 봉인할 수 있는 것, 그것이 시민의 시간이다. 탄핵 너머를 응시하며 더 많은 민주주의, 더 많은 연대와 평등, 더 많은 꿈의 언어를 광장에 쏟아내야 하는 시간, 바로 남태령에서 온 소녀가 들고 있는 불꽃의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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