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늘 아시아 정상권에 있었던 한국과 이라크는 자주 만났다. 1977년, 1978년 메르데카배 결승에서는 2년 연속 마주쳤다. 두 차례 모두 한국의 승리. 1977년 1-0 결승골의 득점자는 차범근이다. 당시 메르데카배는 비공식 아시아 선수권대회로 불리기도 했다. 아시아축구연맹(AFC) 본부가 말레이시아에 있었고 영국 식민통치의 영향으로 축구리그와 대회를 아시아권에서는 가장 모범적으로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과 이라크는 지금까지 모두 23차례 대표팀 간 맞대결을 벌였다. 한국이 9승 12무 2패로 우세를 점하고 있다. 무승부가 12차례나 나올만큼 양국 간 대결은 늘 박빙의 격전이었다. 가장 최근의 대결은 2024년 1월 6일 아랍에미리트 아부다비에서 열린 중립지역 친선경기. 한국은 독일에서 뛰고 있는 이재성의 골로 1-0으로 승리했다.
2022년 카타르 월드컵 최종예선에서도 한국은 이라크와 만났다. 2021년 9월 2일 상암동에선 0-0 무승부. 이재성이 결정적인 골문 바로 앞 찬스를 놓쳐 두고두고 축구팬들의 원망을 들었다. 같은 해 11월 16일 카타르 도하에서 열린 어웨이 경기에서 이재성은 선제골을 넣으며 마음의 빚을 갚았다. 연이은 손흥민, 정우영의 골로 한국의 3-0 완승.
하지만, 통쾌한 승리보다는 억울하고 아쉬운 패배가 두고두고 기억에 남는 법. 한국 축구팬들에게 잊을 수 없는 경기가 있다. 1984년 LA 올림픽 예선이다. 1964년 도쿄 올림픽 이후 20년간 올림픽에 못 나가던 시절이다.
한국은 사우디아라비아와 A조 수위 결정전에서 승리하면 바로 본선에 갈 수 있었지만 4-5로 패했다. B조 2위인 이라크(1위는 카타르)와 한국은 1984년 4월 29일 싱가포르에서 남은 본선 한 자리 출전권을 놓고 단두대 매치를 벌였다. 전반 43분 이라크의 35m 롱슛이 한국 골문 구석에 꽃히며 이라크가 1-0으로 앞서 나갔고 경기 종료 시점까지 스코어는 바뀌지 않았다. 1964년 도쿄 올림픽 출전 이후 20년 간 이어진 지긋지긋한 징크스를 한국은 결국 깨지 못했다. 두 경기 중 한 번만 이기면 본선에 갈 수 있었지만, 두 경기 모두 단 한 골 차로 눈물을 흘려야 했다. 본선에 나선 이라크는 캐나다와 1-1로 비겼지만 유고슬라비아에 2-4, 카메룬에 0-1로 지며 조별리그에서 탈락했다.
2007년 아시안컵 준결승도 기억에 남는 경기다. 예선을 1승 1무 1패로 악전고투 끝에 통과하고 8강에서 무승부 후 승부차기로 4강에 오른 한국의 상대가 바로 이라크였다. 어수선한 국내 사정으로 제대로 훈련도 못한 팀이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이라크는 끈끈한 수비를 선보이며 0-0 무승부 후 승부차기에서 4-3으로 한국을 물리치고 결승전에 올랐다. 이라크는 결승에서 사우디를 1-0으로 꺾고 아시아 챔피언의 영예를 안았다. 사상 처음이자 아직까지는 마지막인 이라크의 아시안컵 우승이다. 전화(戰禍)에 지친 국민들에게 축구선수들이 선물한 값진 영광이었다. 2015년 아시안컵 준결승에서 한국은 이라크에게 빚을 갚았다. 이정협, 김영권의 연속 골로 2-0 승리.
|
이라크 축구가 한국에 은인 노릇을 한 적도 있다. 1994년 미국 월드컵 최종예선이다. 한국이 승점 6으로 골득실차에서 일본을 간발의 차로 앞서며 막차로 본선행 기차에 오른 ‘도하의 기적’의 주연 배우가 바로 이라크다. 일본은 ‘도하의 참극’이라 기억하고 사우디아라비아는 ‘도하의 감격’으로 되새기는, 아시아 축구에서 가장 드라마틱했던 어느 저녁으로 돌아가 보자. 1994년 미국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은 참가팀 6개국의 전력이 거의 비슷했던 탓에 서로 물고 물리는 초접전 양상이 마지막까지 이어진 역대급 혼전이다. 모든 팀이 단 한 경기만을 남겨놓은 시점에서의 상황은 다음과 같다. 아시아에 배당된 출전권은 2장이었다.
1위: 일본 승점 5, 2승1무1패, 5득점 2실점 +3
2위: 사우디 승점 5, 1승3무, 4득점 3실점 +1
3위: 대한민국 승점 4, 1승2무1패, 6득점 4실점 +2
4위: 이라크 승점 4, 1승2무1패, 7득점 7실점 0
5위: 이란 승점 4, 2승2패, 5득점 7실점 -2
6위: 북한 승점 2, 1승3패, 5득점 9실점 -4
승리는 2점, 무승부는 1점이 주어지던 시절이다. 6위 북한만 탈락 확정이고, 1~5위팀 모두가 다른 경기 결과에 따라 본선 진출이 가능한 초접전 양상. 일본과 사우디는 이기면 무조건 본선에 나가는 살짝 유리한 처지였지만, 무승부나 패배는 탈락을 의미했기에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다.
최종 매치업은 사우디-이란, 한국-북한, 일본-이라크. 공정을 기하기 위해 세 경기 모두 같은 시각에 킥오프했다.
사우디-이란 전은 사우디의 4-3 승리. 사우디의 본선행 확정과 이란의 탈락이었다. 만약 경기가 3-3이나 4-4로 끝났다면 사우디와 이란이 동반 탈락하고, 한국과 일본이 본선 무대에 올랐을 것이다. 사우디나 이란이나, 종료 휘슬이 울릴 때까지 긴장을 늦출 수 없었던 이유다.
다른 경기에서 한국이 북한을 3-0으로 물리쳤다. 경기가 끝난 시점에서의 일본-이라크 경기 스코어는 2-1로 일본이 앞서갔다. 이대로 경기가 끝나면 아시아의 출전권은 그때까지 월드컵에 한 번도 나가본 적이 없는 사우디와 일본의 차지였다.
그러나 경기 종료 10초를 남기고 모든 것이 변한다. 한국 대 북한의 경기 종료 후 30초가 지난 시점, 이라크가 최후의 터치를 헤드업 동점골로 성공시키며 2-2 무승부로 경기를 끝냈다. 득점자는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최전방까지 달려갔던 수비수 움란 자파르였다. 사우디와 한국의 본선 진출, 일본과 이라크는 탈락. 이라크는 동점골을 넣어도 탈락 확정이었지만, 스포츠맨십을 발휘해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했다. 예선 탈락으로 생각하고 어깨를 늘어뜨린 채 경기장을 빠져나오던 한국 선수들은 기적 같은 이라크의 득점 소식에 환호하며 한 덩어리로 얽혀 기쁨을 나누었다. 가수 김흥국 등 열혈 축구팬들은 자비로 움란 자파르를 한국으로 초대, ‘은혜를 갚기도’ 했다. 비록 자파르의 K리그 입단 소망은 실현되지 않았지만.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