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주지훈이 영화 ‘탈출: 프로젝트 사일런스’(감독 김태곤, 이하 탈출)에서 연기한 조박은 단순한 인물이다. 절체절명 재난 앞에서 그는 자신과 반려견만을 생각한다. 인명구조나 안위보다 순간의 이익을 좇는다. 말하는 것도 영 미덥지 않다. 뺀질거리는 말들을 듣다 보면 헛웃음이 난다. 심각한 상황에서 조박이 나타날 때면 어딘지 숨통이 트이는 듯하다.
지난 10일 서울 소격동 한 카페에서 만난 주지훈은 “그렇게 기능해야 하는 게 내 역할”이라며 흡족해했다. 그가 ‘탈출’에 참여한 이유는 단순했다. “팝콘무비(가볍게 볼 수 있는 영화)를 해보고 싶은” 마음에서다. 쉽지만은 않았다. 무거운 극 분위기와 가벼운 캐릭터가 겉돌까 염려했단다. 주지훈은 “희화화할 생각 없이 조박을 이해하는 데 집중했다”고 돌아봤다. “위기 상황에서 스트레스를 받을 때 날카로워지거나 아예 긴장감을 놔버리는 사람이 있잖아요. 조박은 후자라고 봤어요. 감정을 1차원적으로 내뱉는 편이니 거기서 발생하는 재치를 살리려 했죠.”
조박에게 다가가기 위해 주지훈은 각본에도 없던 그의 과거사를 상상했다. 부유하지 못한 가정에서 자라 학교를 자퇴하고 일용직으로 산다거나, 타인에게 관심이 없어 반려견 조디에게만 마음을 열었다는 설정이 하나둘씩 쌓였다. 그러면서 조박을 표현할 수 있는 폭도 넓어졌다. “이기적이어도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란 해석은 극 전반에서 조박의 변화를 설명할 수 있는 단서가 됐다. 외적으로는 머리를 잘 감지 않고 미용실도 가지 않아 헝클어진 장발을 떠올렸다고 한다. 어린 시절 봐왔던 불량한 형들의 모습을 투영한 결과다. 이 같은 요소가 하나씩 모여 탄생한 게 지금의 조박이다.
주지훈은 스스로를 “해야 하면 해내는 성격”이라고 했다. 모델로 일하다 배우로 전향할 때도 이 같은 마음이었다고 돌아봤다. 그는 “배우는 등장하는 순간 드라마가 생겨야 한다”고 했다. 존재만으로도 극적 상황이나 전환점을 만들어야 한다는 의미다. 그런 마음으로 조박을 연기했다. “예측은 할 수 없어도 예상되는 범위에 있고 싶었어요. 생동감을 살리고 싶어 현장에서 발생하는 호흡을 연기에 반영하려 했죠.” 준비는 마쳐놓되 즉흥성을 반영하는 게 그의 연기 주법이다. 반면 그의 상대역이던 고(故) 이선균은 치밀한 계산 아래 연기하는 배우다. 전혀 다른 두 사람이 상반된 캐릭터를 맡아 마주하자 볼거리는 배가된다. 주지훈은 영화의 무게감에 캐릭터를 맞추고 싶어 후시녹음에도 열성적으로 참여했다고 한다.
다작을 이어가는 주지훈에게 ‘탈출’은 해보고 싶던 도전으로 기억된다. 그는 언제나 “쓰임새 있는 배우”를 목표로 달려왔다. 역할의 경중과 관련 없이 해보고 싶으면 달려드는 게 그의 직업론이다. 주지훈은 “최고를 목표로 하진 않는다”면서 “최고만 추구하면 콘텐츠의 다양성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고 힘줘 말했다. “관객이 있어야 콘텐츠가 존재하는 만큼 대중이 좋아하는 작품을 만들고 싶다”고 말을 잇던 그는 “때로는 맛보지 않았던 것도 선뵈고 싶은 게 대중문화 예술산업 종사자로서의 마음”이라고 했다. 중압감만큼 책임 의식도 나날이 커진다. 주지훈은 “최고보다 최선을 다하면 배우로서 자연스럽게 나이들 수 있다고 믿는다”며 씩 웃었다.
“나이가 들수록 내면에 많은 게 쌓이잖아요. 그런 게 모여 연기 재료가 되고요. 늘 여러 역할로 쓰이고 싶다는 욕심이 있었어요. 일단 최선을 다해야 부족할 때 개선을 할 수 있더라고요. 그런 마음으로 달리니까 연기가 점점 더 재밌어졌어요. 점점 주위에 연기하거나 작품 만드는 사람이 많아지다 보니 자연스럽게 다작하고… 그러면서 지금의 제가 됐죠. 요즘은 제작·기획에도 도전 중이에요. 이렇게 흘러가면서 사람들의 인생에 깊게 스미고 싶어요. 좋게 나이 먹는 배우, 멋있잖아요.”
김예슬 기자 yeye@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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