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수 시절부터 지도자 생활까지 인천 원클럽맨
2009 고양역도세계선수권서 무제한급 금메달
“기본기 잘 가르치고 좋은 유산 남기도록 하겠다”
안용권(41) 인천시청 역도팀 감독은 한국 역도 역사에 큰 획을 그은 인물이다.
중학교 시절 주니어 대표팀에 선발되며 일찌감치 한국 역도를 이끌 재목으로 평가받았고, 기대에 부응하듯 지난 2009년 경기도 고양에서 열린 ‘세계역도선수권대회’서 금메달을 획득, 최고의 순간을 맛봤다.
특히 한국 역도가 ‘역도의 꽃’이라 불리는 남자 무제한급(+105kg)에서 처음 들어 올린 세계선수권 금메달이라 의미가 남달랐다. 안용권 감독은 그 대회에서 장미란(현 문화체육관광부 차관)과 함께 남녀 무제한급을 석권하며 한국 역도 역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이뿐만이 아니다. 선수 안용권은 그해 6월 열린 국제 친선대회에서 인상 부문 206kg을 들어 올리며 한국 신기록을 세우기도 했다(현재 무제한급은 종전 +105kg에서 +109kg로 조정).
안 감독은 바벨을 내려놓은 뒤에도 여전히 역도계에 몸담고 있다. 지금은 자신의 고향인 인천에서 제자들을 양성하며 ‘제2의 안용권’ 탄생에 힘을 쏟고 있다. 한때 한국에서 가장 힘이 셌던 사나이 안용권 감독을 선수들의 구슬땀이 흐르는 인천 문학경기장 내 역도훈련장에서 만났다.
Q : 올해로 인천시청 지휘봉을 잡은 지 5년이 됐다. 선수 시절과 지금의 감독 생활을 비교하면?
안용권 감독(이하 안) : 선수 때와 비교하면 역시나 몸이 편해졌다는 점이다. 매일 반복되는 훈련을 하다보면 지치고 힘들 수밖에 없는데 지금은 그런 고민을 하지 않아 좋다. 그렇다고 감독이 쉬운 것만은 아니다. 몸이 편한 대신 여러 부분들을 신경 써야 하니 정신적으로 힘이 들더라. 과거 나를 지도하셨던 감독님들이 얼마나 힘들었을 지 이제야 이해가 간다.
Q : 선수 시절 겪었던 감독들과 현재 감독들의 지도 방식 차이가 있나?
안 : 과거에 비해 훨씬 나아졌다고 생각한다. 특히 선수와 제자 사이가 수직적 관계보다 수평적 관계로 발전했다. 심지어 회식을 하더라도 주로 내가 돈을 내지만 가끔은 선수들과 회비를 걷어 먹기도 한다. 2차는 내가 내고(웃음). 이런 방식이 지도자나 선수 모두에게 편한 것 같다. 옛날 엄격했던 스승님들의 관리 방식대로 하라고 했으면 스트레스 받아 못 했을 것 같다.
Q : 선수들의 기강을 잡아야 할 때도 있을 텐데. 특히 선수들 하나하나 개성이 있어 훈련 지시를 잘 따르는 선수가 있는 반면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을 것 같다.
안 : 선수들에게는 역도가 직업이다. 인천시청과 계약을 맺고 일반 직장인들과 똑같이 출근하고 일(훈련)을 한 뒤 퇴근한다. 지금의 선수들 또한 과거와 달리 자기 직업에 대한 책임감을 갖고 있다. 돌출 행동을 하는 경우가 생긴다면 계약 규정에 따라 처리하면 된다. 가령 계약 기간이 끝난 뒤 재계약 불가를 통보하는 식이다. 그런 선수는 다른 곳으로 이적하기도 힘들다. 일반 회사와 마찬가지로 트러블 메이커를 안고 가는 건 그 조직에 큰 리스크를 동반하는 일이다.
Q : 감독님 역시 선수 시절을 거쳐 지금의 지도자 자리까지 왔다. 어떻게 역도 선수를 하게 됐나?
안 : 초등학교 때부터 토실토실한 편이었다. 중학교 입학해서도 뚱뚱한 체격이라 다이어트를 마음먹고 있던 찰나, 마침 학교(인천남중)에 역도부가 있었고 입부를 권유받았다. 당시 ‘역도를 하게 되면 나도 근육질이 될 수 있겠구나’라는 마음을 먹고 바벨을 잡았다.
Q : 운동 신경이 남달랐나?
안 : 6살 차이 나는 형이 있다. 어릴 때 함께 놀면 형을 이기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하지만 상대가 되겠나. 그래도 따라잡으려 했고 마침 살던 곳 주변에 산이 있어 이곳을 오르내렸다. 그래서 자연스레 기초 체력이 갖춰졌던 것 같다.
Q : 역도 유망주로 성장했고 2009년 고양서 열린 세계역도선수권대회서 금메달을 획득했다. 감독님 입장에서는 어쩌면 역도 인생에 있어 화양연화와 같은 순간이었을 것 같다.
안 : 우주의 기운이 쏠렸다고나 할까. 이 해에는 이상할 정도로 몸 상태가 좋았다. 사실 그 전에는 컨디션이 좋더라도 막상 대회 때 성적이 안 나오는 경우도 있었는데 2009년은 달랐다. 아픈 곳도 없었고 몸이 매일 매일 좋았다. 당연히 1년 내내 훈련도 잘 진행됐고 세계선수권서 결실을 맺었다.
Q : 당시 장미란(현 문화체육관광부 차관)과 남녀 동반 무제한급 금메달을 따면서 많은 주목을 받았을 텐데?
안 : 안타깝게도 당시 군인(국군체육부대) 신분이었다. 세계선수권을 준비하기 위해 파견 나온 형태였고, 대회가 끝나자마자 곧바로 훈련소로 들어갔다. 그래서 누려야 할 것을 하나도 못 누렸다(웃음). 그래도 기억나는 게 있다. 입상한 다음날 사진이 필요해 사진관을 갔더니 나를 알아보는 분이 계셨다. 어제 TV에서 봤다고. 이때 살짝 설렜는데 어쨌거나 결론은 훈련소행이었다.
Q : 감독님은 인천에서 나고 자랐고, 선수 시절에도 인천시청에만 속했던 원클럽맨이다. 인천 역도하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는데 바로 스승인 故(고) 김경식 감독이다. 김 전 감독은 어떤 분이셨나.
안 : 오로지 역도, 그리고 제자들 육성에만 관심 있으셨던 분이다. 그래서 안용권이라는 선수가 나왔다. 한편으로는 왜 그렇게 역도만 바라보고 사셨는지, 안타까울 뿐이다. 지도자가 되고 난 뒤 김경식 감독님께 배운 부분도 있다. 바로 선수들에 대한 책임감, 집중력이다. 감독님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스승을 따라가는 제자라고나 할까. 무엇보다 감독님은 생전에 청렴하셔서 많은 칭찬을 받으셨던 분이다.
Q : 감독님이 돌아가시고 ‘김경식배 역도 대회’ 개최를 추진했었는데?
안 : 개최만 하면 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참가할 선수들의 일정이 잘 맞지 않았고, 이후 코로나19가 터지면서 흐지부지됐다. 다시 추진할 마음은 있고, 또 그렇게 해야 한다.
Q : 역도라는 종목은 힘도 세야 하지만 매우 기술적인 부분을 요구하는 스포츠다. 게다가 멘탈 또한 간과할 수 없다. 선수들을 지도할 때 중점을 두는 부분이 있다면?
안 : 지도자의 성향에 따라 다르다. 힘을 먼저 키운 뒤 기술을 가르칠 수도 있고, 기술을 먼저 터득하게 하고 나서 힘을 키우기도 한다. 나의 경우 기술에 무게를 둔다. 힘은 바벨을 계속 들다보면 자연스럽게 길러진다고 판단한다. 자세가 고착화 되어 버리면 나중에 고치기가 너무 힘들다. 그래서 역도를 시작할 때 기술을 잘 익혀놓는 것이 중요하다.
Q : 대회에 나갔는데 선수가 크게 긴장을 할 때도 있을 것이다. 멘탈(정신력) 부분은 어떻게 지도하나.
안 : 평소 선수들에게 장난도 치고, 농담도 건네는데 경기장에서도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크게 다르지 않게 행동한다. 다만 어이없는 실수를 하거나 정신을 놓고 있다면 아예 말을 하지 않는다. 그럼 선수들이 깨닫는다. 지금 심각한 상황이라고.
Q : 지도자 생활을 하면서 바라는 점이 있다면?
안 : 인천시청 소속 선수들이 아시안게임이나 세계선수권에서 입상하기도 하지만 성적만으로 무언가를 이뤘다라고 나를 평가하고 싶지 않다. 그저 선수들이 안용권에게 기본적인 틀을 잘 배웠구나, 그리고 이를 중, 고교 선수들이 자연스럽게 이어 받아 잘 성장했으면 하는 바람, 그런 좋은 유산을 남기고 싶다. 인천에서 좋은 선수가 계속 나왔으면 하고. 나 또한 하루하루 선수들에게 최선을 다하고 모든 것을 주기 위해 노력한다.
Q : 중, 고교 선수들에게 재능 기부를 하고 있는데.
안 : 학생들을 대상으로 재능기부라고는 하지만, 이곳으로 불러 함께 훈련하는 방식이다. 자연스럽게 실업팀 선배들의 훈련하는 모습을 보면 스스로 깨닫고 배우는 부분이 분명 있다. 평일에도 오고, 방학 때도 초청한다.
Q : 그렇게 역도 원석이 발굴될 수도 있겠다.
안 : 나 역시 그렇게 컸다. 형들 하는 것을 보며 따라하고 배우기도 했다. 그렇게 하다 보면 목적의식이 분명해진다. 내가 열심히 하면 나중에 커서 저들과 함께 할 수 있겠구나라고. 기록적인 부분에서도 내가 지금 어느 정도 위치에 있구나, 이를 뛰어넘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구나, 아직 멀었구나 등등 깨닫는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된다.
Q : 일반인들은 ‘역도를 하면 키가 크지 않는다’라는 인식을 갖고 있다. 그런데 감독님은 키가 190cm가 넘는다. 뭐가 맞는 말인가.
안 : 성장과 역도는 관련이 없다. 이미 과학적으로 증명된 부분이다. 다만 과거 역도 선수들을 살펴보면 키가 작으신 분들이 많았다. 한국 역도를 대표하는 인물을 떠올리면 전병관 선생님(1988년 서울 올림픽 금메달)이 나오지 않나.
오히려 체급별로 봐야 맞을 것 같다. 경량급의 경우 체중을 맞추기 위해 식사량을 조절하고 성장기에 제대로 된 음식을 섭취하지 못해 크지 못한 경우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잘 먹고 운동하면 무럭무럭 자란다.
Q : 마지막 질문 드리겠다. 지금은 바벨을 내려놓으셨지만 현역 시절 3대 몇 치셨나.
안 : 데드리프트는 350kg, 백 스쿼트도 350kg였다. 백 스쿼트의 경우 바벨에 원판을 다 끼우지 못할 정도였다. 다 끼우면 370kg까지 될 텐데 충분히 가능했다. 다만 빠질까봐 위험해 그렇게 까지 하지는 않았다. 벤치프레스는 많이 들지 못해 150kg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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