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티비뉴스=김건일 기자] “모든 감독의 꿈은 A대표팀이지만, 그만큼 어려운 절차를 거쳐야 하고 검증받아야 하는 자리다. 나는 이 자리를 통해 그런 검증을 제대로 받고 싶다”
지난 2021년 9월 16일 서울 종로구 축구회관에서 열린 23세 이하 대표팀 감독 취임 비대면 기자회견에서 황선홍 감독은 이렇게 출사표를 던졌다.
이 자리에서 황 감독은 2024년 파리 올림픽 본선까지 23세 이하 대표팀을 이끌게 됐다. 2022 항저우 아시안게임 사령탑 역시 황 감독이었다.
황 감독은 지도자 생활 초창기인 포항 스틸러스에서 K리그 우승컵(2013)과 축구협회 FA컵(2012, 2013)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포항에서 퍼덕였던 황새의 날개는 FC서울에서 꺾였다. 2016년 FC서울 감독으로 부임하자마자 FC서울을 K리그 정상에 올려놓고 최우수 감독상까지 수상하며 꽃길을 걷는 듯했으나 이듬해 5위로 AFC 챔피언스리그 진출에 실패하더니 2018년엔 10위와 11위를 왓다갔다하며 성적 부진 책임을 지고 자진 사임했다.
그해 12월 중국 갑급 리그 옌벤 푸더 감독으로 부임했으나 구단이 해체되는 돌발 상황을 겪었다. 2020년 대전 하나 은행 시티즌 초대 감독으로 임명됐지만 1년을 버티지 못하고 성적 부진으로 다시 스스로 지휘봉을 내려놓았다.
연령별 대표팀은 황 감독의 감독 커리어에 터닝 포인트가 됐다. 지난해 끝난 2022 항저우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고 헹가레를 받았다. 대회 내내 3연속 우승에 대한 부담감을 안고 있었던 황 감독은 대회가 끝난 뒤에야 미소지었다.
아시안게임에서 한국은 다른 출전 국가보다 전력이 앞서 있는 것은 물론 병역 혜택이 있어 동기부여가 다른 국가보다 강했으며, 이 덕분에 이강인을 비롯해 해외파 및 와일드카드 차출이 수월했다. 7경기에서 27골 3도움이라는 압도적인 기록이 나온 이유다.
그래서 축구계에선 올림픽을 황 감독의 지도력을 검증할 무대로 판단했다. 황 감독은 항저우 아시안게임이 끝나자마자 “(내 커리어는) 계속 진행형이다. 이제 끝이 아니다. 내일이면 무언가를 갈망하게 될 거다. 그걸 이루기 위해 노력을 할 것”이라며 “묵묵히 내 길을 가겠다. 우승이 주는 건 오늘 하루 뿐이다. 내일부터 올림픽 예선을 준비해야 한다”고 의욕을 드러냈다.
아시안게임에서 성공으로 황 감독의 위상은 더욱 높아졌다. 대한축구협회는 2026년 국제축구연맹(FIFA) 북중미 월드컵 태국과 2연전을 앞두고 위르겐 클린스만 감독을 경질한 뒤 황 감독에게 SOS를 보냈다. 정해성 대한축구협회 국가대표전력강화위원장은 황 감독을 임시 감독으로 선임한 이유로 “다른 나라 협회에서도 필요한 경우 A대표팀 감독이 23세 이하 대표팀 감독 겸임하는 사례가 있었다”며 “황 감독을 1순위 후보로 꼽은 건 올림픽대표팀을 맡은 축구협회 지도자이면서 아시안게임 우승으로 최근 성과도 보여줬고, 국제대회 경험과 아시아축구에 대한 이해도 갖췄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고심 끝에 대한축구협회의 요청을 받아들인 황 감독은 뒤숭숭한 분위기에서 태국과 2연전을 1승 1무로 마무리해냈다. 그러면서 A대표팀 감독 후보로도 거론되기 시작했다. 정 위원장은 지난 2일 “32명 후보를 검토한 결과 11명을 후보 선상에 올리기로 했다”고 밝히면서 “국내 후보 4명 중 황 감독도 포함됐다”고 했다. 정 위원장은 황 감독에 대해 “첫 경기가 만족스럽지 못했지만 선수들과 3∼4일 동안 선수들과 자연스럽게 융화되는 것을 봤다”며 “황 감독은 그동안 내가 경험했던 대표팀의 분위기를 다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며 “(2연전을 치르면서)식사나 훈련 등에서 흠잡을 데가 없었다”고 높게 평가했다.
따라서 2024 파리 올림픽 예선을 겸하는 아시아축구연맹(AFC) U-23 아시안컵은 황 감독에겐 부임 당시 스스로 이야기했던 A대표팀 자격을 검증할 수 있는 무대 중 하나였다.
그러나 하필이면 이 대회에서 황 감독은 연령별 대표팀 감독 부임 이후 최악의 성과를 냈다. 26일(한국시간) 카타르 도하의 압둘라 빈 칼리파 스타디움에서 열린 대회 준결승전에서 신태용 감독이 이끄는 인도네시아에 승부차기끝에 10-11(2-2)로 졌다.
황선홍호는 출발부터 삐걱댔다. 지난달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끝난 2024 서아시아축구연맹(WAFF) 대회는 이번 대회를 앞두고 마지막 모의고사였지만 황 감독이 A대표팀을 임시로 지휘하게 되면서 황 감독이 아닌 명재용 수석코치 체재로 치렀다. 대회를 치르고 이후에도 23세 이하 아시안컵 대표팀을 구성해야 할 시간을 황 감독은 A대표팀에 투자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대표팀 구성 문제로 이어졌다. 황선홍호 핵심이었던 유럽파들이 빠지면서 문제가 생겼다. 유럽 축구가 리그 일정 중이었기 때문에 차출 협조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배준호(스토크시티)는 소속팀에서 핵심 전력으로 꼽히며 김지수(브렌트포드)와 양현준(셀틱FC) 역시 백업 또는 로테이션 멤버로 소속팀이 필요로 했다. 이번 대회에 합류한 해외파는 김민우(뒤셀도르프), 정상빈(미네소타 유나이티드) 단 두 명. 황선홍호가 대체 선수를 발탁했다는 소식만 연일 전해졌다.
게다가 중앙 수비수 중 이한범(미트윌란)과 김지수에 이어 세 번째 옵션으로 평가받았던 조위제(부천FC1995)가 부상으로 빠지면서 이번 대표팀엔 전문 중앙 수비수가 세 명뿐인 아이러니한 대표팀이 구성됐다. 중국과 조별리그 2차전에서 서명관이 햄스트링 부상을 당하자 뛸 수 있는 전문 센터백은 단 두 명뿐이었다.
준비를 제대로 하지 않고 원했던 결과를 바라는 것은 사치였다. 답답한 경기력은 조별리그부터 시작됐다. 아랍에미레이트와 경기에서 후반 추가 시간 이영준의 결승골로 승점 3점을 챙겼지만 득점이 나오기 전까지 무려 20개가 넘는 크로스가 모두 무위로 돌아갔다. 한 수 아래로 평가받는 중국과 경기에선 중국의 압박에 실점 위기를 맞고 주도권을 내주는 그간 중국과 국제 대항전에선 보기 힘든 장면이 연거푸 만들어졌다.
부족한 수비 뎁스도 결국 일을 냈다. 서명관의 부상이 여전히 나아지지 않자 26일 인도네시아와 대회 준결승전에서 황 감독은 일본과 조별리그 3차전과 같이 스리백으로 나섰다. 전문 센터백인 변준수를 오른쪽 수비수로 배치한 가운데 왼쪽 측면 수비수인 조현택을 왼쪽 중앙 수비수, 그리고 미드필더 이강희를 한 칸 내려 포어 리베로를 맡겼다.
조직력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스리백은 이날 경기에서 어색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수비진이 흔들리면서 전반전에만 라파엘 스트라윅에게 두 골을 허용했다. 첫 번째 실점은 수비 위치 선정 실패가 드러났고 두 번째 실점은 수비진 호흡이 맞지 않아 일어났다.
황 감독은 임시 감독직을 수락한 자리에서 “대한민국 축구가 큰 위기에 처해 있고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이다. 14년 동안 대표 선수 생활을 하면서 많은 혜택을 받았다. 축구인 한 사람으로서 도움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고심 끝에 결정했다”고 밝혔다. 한국 축구에 ‘급한 불’은 껐지만 정작 원래 목표였던 올림픽 티켓은 무산됐다.
한국 축구가 올림픽에 나가지 못한 것은 40년 만. 황 감독의 2년 7개월 동안 연령별 대표팀 여정은 A대표팀 감독으로서 능력을 검증받고 싶어했던 개인의 커리어는 물론이고 한국 축구 역사에 큰 흠을 남긴 채 마무리됐다.
다만 올림픽 탈락 책임을 온전히 황 감독에게만 돌릴 수 없다. 한국 축구가 위기에 빠져 있는 상황에서 황 감독이 대한축구협회의 임시 감독직 요청을 고사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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