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티비뉴스=잠실, 신원철 기자] 꿈 같은 하루가 지나고 곧바로 일상이 시작됐다. 18일 메이저리그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와 스페셜게임을 치른 LG 트윈스 선수단은 19일 마지막 시범경기를 위해 잠실구장에 모였다. 누군가에게는 잊지 못 할 추억이 됐고, 또 누군가에게는 잊어야 하는 기억이었다. 한편으로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는 순간이기도 했다.
LG는 18일 서울 고척스카이돔에서 열린 ‘2024 메이저리그 월드투어 서울 시리즈 스페셜게임’ 샌디에이고와 경기에서 4-5로 졌다. 점수 차가 보여주듯 석패였다. 선발 임찬규는 5이닝 동안 탈삼진을 7개나 기록했다. 오지환은 딜런 시즈로부터 홈런을 때려냈다. 마지막은 드라마 같았다. LG 선수들은 고우석이 샌디에이고 유니폼을 입고 세이브 상황에 등장하자 박수로 환영했지만 경기에서는 2점 홈런을 안겼다.
LG 염경엽 감독은 경기 전 “아무리 친선경기여도 모든 경기는 이기는 게 좋다”며 최고의 구성으로 최선의 경기를 하겠다고 밝혔다. 메이저리그 팀과 경기한다고 해서 시작부터 몸을 낮추지 않았다.
선수들의 마음가짐도 그랬다. 오지환은 경기 후 “개막을 앞두고 있기 때문에 이기는 경기를 하자고 했다. 시즌을 준비하는 중이기 때문에 플레이 다 하자는 마음으로 경기하자고 했다. 슬라이딩도 하고, 작전도 체크하자고 했다”며 승패를 가리는 진짜 경기로 받아들였다고 말했다. 그 마음이 모여 접전을 만들었다.
팀 코리아 주전 1루수이기도 했던 문보경은 다른 동료들보다 두 번이나 더 메이저리그 팀을 상대했다. 게다가 메이저리그 전문 기자의 주목까지 받았다. MLB 네트워크 존 폴 모로시 기자는 18일 경기 후 기자회견에서 염경엽 감독에게 1루수와 3루수로서 문보경의 가치를 알려달라고 물었다.
모로시 기자는 “문보경은 프리미어12와 WBC(월드베이스볼클래식), 올림픽에서 한국 대표팀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될 거다”라고 예견하기도 했다. 문보경에게 이 얘기를 전했더니 “와 문보경 출세했다”며 깜짝 놀랐다.
모로시 기자는 문보경의 공수주를 두루 칭찬했다. 공격에서는 KBO리그보다 더 빠른 공에 대처할 수 있는 스윙, 수비에서는 18일 샌디에이고전에서 마차도의 안타성 타구를 처리한 움직임, 주루에서는 체격에 비해 빠른 발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문보경은 “사실 타구는 베이스 쪽에서 수비해서 잡을만했다. 송구는 조금 ‘뽈뽈뽈’ 날아갔다”며 머쓱해했다. 도루 상황에 대해서는 자신이 잘했다는 말보다 샌디에이고 포수들의 송구 능력에 감탄한 일화를 들려줬다. 문보경은 “(17일)대표팀에서 도루했을 때 몰랐는데 영상으로 다시 보니 ‘앉아 쏴’를 했더라”라며 신기해했다. 이때 포수는 루이스 캄푸사노. 18일에는 카일 히가시오카에게 도루 저지를 당했다.
17일 팀 코리아에서, 18일 LG와 다시 팀 코리아에서. 문보경은 스페셜게임 3경기에서 8타석 동안 모두 다른 투수들을 상대했다. 그는 “안타를 친다는 얘기는 아닌데, 생각했던 것보다는 방망이에 맞힐 만했다”며 “건드리지도 못할 줄 알았다”고 얘기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투수는 샌디에이고 좌완 아드리안 모레혼. 문보경은 “커브가 와…진짜 인정이다”라고 혀를 내둘렀다. 다저스전에 대해서는 “스톤은 체인지업이 엄청났다. 앞에 나간 선수들은 바비 밀러 공은 빠른데 그래도 칠만 하다고 했다. 스톤이 더 까다롭다고 하더라”라고 다른 대표팀 선수들의 감상도 들려줬다.
#문보경 서울 시리즈 스페셜게임 8타석 5타수 1안타 3볼넷
17일 vs 샌디에이고 4타석 2타수 1안타 2볼넷
2회 조니 브리토 – 볼넷
4회 예레미아 에스트라다 – 1루수 땅볼
7회 에니엘 데 로스 산토스 – 2루타
9회 로베르트 수아레스 – 볼넷
18일 vs 샌디에이고 3타석 2타수 무안타 1볼넷
2회 딜런 시즈 – 3루수 땅볼
5회 맷 왈드론 – 볼넷
7회 아드리안 모레혼 – 헛스윙 삼진
18일 vs 다저스 1타석 무안타
9회 개빈 스톤 – 헛스윙 삼진
LG 9번타자로 출전했던 신민재는 “그냥 재미있었다. 경기 전부터 재미있었다”며 미소를 지었다. 신민재는 3타수 1안타를 기록했는데, 3회 첫 타석에서 맷 왈드론의 몸쪽 커터를 잘 잡아당긴 타구가 안타가 됐다면 멀티히트가 될 수도 있었다. 베이스볼 서번트에 따르면 이 타구의 xBA(기대 타율)은 0.720이었다. 이렇게 안타가 될 확률이 높은 타구였는데 크로넨워스의 수비 위치가 좋았다. 신민재도 “1루수가 너무 뒤에 있었다”며 아쉬워했다.
오지환은 평소에도 외국인 선수들에게 자신의 수비가 어떤 수준인지 묻는 것을 즐긴다. 수비 실력을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그만큼 강하다. 이번에는 메이저리그 타자들의 강한 타구를 처리해 볼 기회였고, 또 실력을 보여줄 기회이기도 했다. 그런데 오지환에게는 타구가 딱 하나만 갔다.
오지환에게 타구가 많이 가지 않아 아쉽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전혀 아쉽지 않았다. 그냥 경기를 해본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좋았고, (김)하성이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이크 크로넨워스나 잰더 보가츠 같은 (전직 유격수)선수들 사이에서 하성이가 아시아 선수로서 자리를 잡고 있다는게 의미가 컸던 것 같다”고 말했다.
메이저리거들과 경기하면서 느낀 점에 대해서는 “메이저리그라는 엄청난 곳에서 뛰는 선수들도 타구를 준비하는 자세나 스텝 등 정말 기본기에 충실한 모습을 봤다. 그리고 로스터가 아직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백업선수들이 어떻게든 하려고 하는 의지를 보이는 그런 모습들이 더 눈에 띄었던 것 같다”며 “우리나라와는 피지컬에서 차이가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또 우리가 흔히 말하는 데이터 측면, 공의 회전 수나 릴리즈 포인트, 투구의 무브먼트 같은 것들이 좋다고 느꼈다”고 밝혔다.
딜런 시즈를 상대로 홈런을 친 장면에 대해서는 “잊고 싶다”고 의외의 답변을 했다. 메이저리그 투수, 그것도 불과 2년 전 아메리칸리그 사이영상 투표에서 2위에 오른 에이스급 투수로부터 홈런을 친 사실 자체는 기쁘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편에 메이저리그라는 큰 무대에 도전하지 못한, 꿈조차 꾸지 못했던 과거의 자신에 대한 후회가 남는 눈치였다.
임찬규는 5이닝 동안 모두 10개의 헛스윙을 끌어냈다. 체인지업에 8번, 커브와 포심 패스트볼에 각각 1번의 헛스윙이 나왔다. 경기 후에는 “내 체인지업과 변화구로 미국 타자들과 승부해보고 싶었는데 결과가 좋아서 다행이다. 세계 최고의 타자들인 만큼 실투를 던지지 않으려고 했는데 좋은 결과가 있었다. 우선은 생소하다는 점, 처음이라는 점 때문에 중심에 맞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또 “개구리가 황소처럼 보이겠다고 몸을 부풀리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나는 그냥 개구리처럼 던지려고 했다”며 ‘명언’을 남겼다. 개구리의 전략은 누구보다 느리게였다. 임찬규는 페르난도 타티스 주니어에게 58.6마일(94.3㎞) 커브를 던졌는데, LG와 샌디에이고의 스페셜게임에서 가장 느린 공이었다.
▶ 웃어야 하나 울어야 하나…박수로 환영한 고우석에게 홈런 안겼다
9회에는 극적인 장면이 연출됐다. 샌디에이고는 5-2로 앞선 9회 세이브 상황에서 고우석을 마운드에 올렸다. 마이크 실트 감독이 고우석에게 처음으로 세이브 상황을 맡기는 순간이었다. LG 선수들도, 팬들도 박수로 고우석을 맞이했다.
염경엽 감독은 경기 전 “알아서 잡혀주지 않겠나”라고 농담을 했지만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선두타자 박해민이 안타를 쳤고, 1사 후에는 대타 이재원이 고우석의 한가운데 포심 패스트볼을 걷어올려 담장을 넘겼다. 이날 경기를 통틀어 가장 빠른 타구가 이재원의 방망이에서 나왔다. 시속 110.9마일, 178.4㎞ 총알 타구였다.
고우석은 개막 26인 로스터 진입이 불투명한 상태였는데 이날 경기로 입지가 더욱 불안해졌다. 그러나 이재원 역시 비슷한 처지였다. 이미 지난해 잦은 부상으로 큰 기회를 놓친데다 올해도 상무 입대를 바라보고 있어 시간까지 충분하지 않았다. 누군가에게는 비극일 수 밖에 없는 맞대결, 이 비극의 주인공은 고우석이 됐다.
이재원은 홈런을 치고도 마음껏 웃지 못했다. 경기 후에는 신민재 문보경과 대화를 나누는 고우석을 먼발치에서 슬쩍 바라보는 장면이 샌디에이고 구단 포토그래퍼의 렌즈에 잡혔다. 복잡한 감정이 섞인 얼굴이었다. 이재원은 19일 ‘야구 잘하고 하겠다’며 조심스럽게 인터뷰를 사양했다. 이 홈런에도 이재원은 개막 엔트리 합류를 확신할 수 없는 위치에 있다.
박해민은 사실 그럴 의도가 아니었다고 했다. 그는 “빨리 치고 죽으려고 했는데 결과는 내가 통제 못 하니까…그리고 원래 우석이 공 잘 쳤다”고 말했다. 삼성 시절 박해민은 고우석 상대로 통산 13타수 3안타(2루타 2개, 타율 0.231)에 삼진 3개를 기록했다. 대신 2019년부터 3년 동안은 8타수 3안타(타율 0.375)로 강했다. 직구 타이밍을 놓치지 않으려고 집중한 결과다.
염경엽 감독은 사실 9회 고우석 상대로 3번 타순에서 김현수를 그대로 둘지 대타 이재원을 투입할지 고민했다고 했다. 그는 “(김)현수보다는 재원이가 상대하기 편할 것 같았다. 그래서 김현수에게 재원이 치게 하자고 얘기했다. 사실 일석이조 아닌가. 이재원도 그런 경기 경험을 하면 좋은 것이고,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는 모르지만 우석이에게도 김현수보다는 재원이가 편할 거로 생각했다. 그런데 거기서 홈런을 치네”라고 얘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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