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티비뉴스=김태우 기자] 북미 스포츠전문매체 ‘디 애슬레틱’의 칼럼니스트들은 최근 2023-2024 메이저리그 자유계약선수(FA) 시장을 총평하며 최악의 계약을 투표했다. 이 투표에서 이정후(26‧샌프란시스코)가 2위에 올랐다. 올 시즌을 앞두고 이정후와 6년 총액 1억1300만 달러에 계약한 샌프란시스코로서는 다소 성가실 수도 있는 투표 결과였다.
‘디 애슬레틱’의 칼럼니스트들이 이정후의 능력을 다 부정한 건 아니었다. 이정후의 뛰어난 타격 능력, 그리고 전성기로 들어가는 그의 나이를 높게 평가했다. 하지만 역시 ‘메이저리그에서 한 경기도 뛰지 않은’ 선수에게 시장 예상치보다 훨씬 높은 금액, 그것도 1억 달러 이상의 거금을 투자한 것에 대한 의구심은 있었다. 일본프로야구(NPB)도 아니고, 일본프로야구보다 한 단계 수준이 낮은 KBO리그이기도 했다. 일본에서 천재 타자라고 ‘극찬’을 받았던 스즈키 세이야(시카고 컵스)나 요시다 마사타카(보스턴)도 첫 시즌 고전했는데, KBO리그에서 뛰다 온 이정후에게 두 선수보다 더 많은 돈을 줄 만한 값어치가 있었는지는 여전한 논쟁이다.
하지만 이정후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이정후는 해당 보도가 나간 뒤 ‘스포티비뉴스’와 인터뷰에서 “별 생각 안 들고, 아무 생각 안 들었다. 솔직히 (좋은 기사라고) 좋은 느낌도 안 들고, (나쁜 기사라고) 안 좋은 느낌도 안 들었다”면서 “어차피 잘하면 되는 것이고, 내가 그런 걸 별로 신경 쓰는 스타일도 아니다. 그 돈을 내가 달라고 한 것도 아니고 어쩌겠나. 그 사람들도 그 사람의 일을 하는 거다. 그래서 앞으로도 별로 신경 안 쓸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자신은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런 이정후는 시범경기가 시작되자마자 자신의 값어치를 증명하며 미국의 회의적인 시선을 하나 둘씩 돌려놓고 있다. 이정후는 2일(한국시간) 미 애리조나주 스코츠데일의 스코츠데일 스타디움에서 열린 텍사스 레인저스와 ‘2024 메이저리그 시범경기’에 선발 1번 중견수로 출전해 이날도 안타를 때렸다. 1일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와 경기에도 선발 출전해 시범경기 첫 홈런을 포함해 장타 두 방을 때렸던 이정후는 시범경기 들어 처음으로 이틀 연속 선발 출전해 컨디션을 끌어올렸다.
이날 이정후는 첫 두 타석에서는 안타를 치지 못했으나 세 번째 타석에서는 기어이 안타를 때리며 시범경기 전 경기(3경기) 안타 행진을 이어 갔다. 이날로 이정후의 시범경기 성적은 3경기 출전, 타율 0.444(9타수 4안타), 출루율 0.444, 장타율 0.889, OPS(출루율+장타율) 1.333이 됐다. 다른 선수들처럼 메이저리그 경력이 없는 선수임을 고려하면 좋은 출발이라고 볼 수 있다. 게다가 이정후는 단순히 성적만 좋은 게 아니라 그간 많은 이들이 이정후에 품었던 의구심까지 하나둘씩 격파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의를 가지고 있다.
◆ 시범경기 3경기 연속 안타, 미국도 ‘바람의 부자’ 조명했다
밥 멜빈 샌프란시스코 감독이 라인업 카드를 적는 데 있어 적어도 첫 칸은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이정후는 이날도 선발 1번 중견수로 출전했다. 세 경기 연속 이 자리다. 멜빈 감독은 팀의 스프링트레이닝이 시작되던 시점 이미 이정후를 올 시즌 내내 리드오프 및 중견수로 쓸 것이라 공언했다. 개막전에 그가 그 자리에 있지 않다면 그것도 충격일 것이라 덧붙였다. 팀 내에서 이정후보다 이 자리에 어울리는 선수도 없고, 이정후가 메이저리그 적응을 정면돌파할 수 있게끔 돕겠다는 의지도 느껴졌다.
샌프란시스코는 이날 이정후 뒤로 타이로 에스트라다(2루수)-마이클 콘포토(좌익수)-호르헤 솔레어(지명타자)-윌머 플로레스(1루수)-패트릭 베일리(포수)-JD 데이비스(3루수)-닉 아메드(유격수)-루이스 마토스(우익수)가 선발로 나섰다. 이정후와 FA 입단 동기인 호르헤 솔레어가 다시 4번 지명타자로 출전해 올 시즌 그의 포지션도 어렴풋이 유추할 수 있는 상황에서 주전급 선수들 상당수가 이날 경기에 나섰다. 이에 맞서는 지난해 월드시리즈 우승팀인 텍사스는 마커스 시미언(2루수)-레오디 타베라스(중견수)-와이어트 랭포드(좌익수)-에세키엘 두란(유격수)-샘 허프(포수)-블레인 크림(1루수)-저스틴 포스큐(지명타자)-데이비스 웬젤(3루수)-엘리어 에르난데스(우익수) 순으로 타순을 짰다. 주전과 비주전 선수들이 섞인 라인업이었다.
이정후가 이날 상대한 텍사스 선발 투수는 이정후도 기억할 만한 얼굴이었다. 아드리안 샘슨(33)이 선발이었다. 샘슨은 2020년 롯데 유니폼을 입고 KBO리그에서 뛰었다. 당시 현역 메이저리거로 대단히 높은 기대를 받았으나 시즌 전 부친상 등 개인사가 겹쳤고, 이후 자신의 구위를 끌어올리지 못함은 물론 KBO리그에 적응하지 못하며 성적이 기대 이하로 저조했다. 샘슨은 당시 25경기에서 9승12패 평균자책점 5.40에 그친 끝에 재계약에 실패했다.여전히 롯데 팬들에게는 아쉬운 선수로 남아있다.
그런 샘슨은 2020년 당시 LG(6경기), 한화-SK(각 4경기), 삼성-kt(각 3경기), KIA-두산(각 2경기), NC(1경기)에 나가 8개 구단과 맞대결을 한 경험이 있다. 그런데 유독 이정후의 소속팀인 키움과는 로테이션이 맞지 않아 한 경기도 등판하지 않았다. 이정후도 샘슨의 공을 볼 기회가 없었던 셈이다. 샘슨은 2020년 이후 미국으로 돌아가 마이너리그 계약을 했고, 2021년과 2022년은 시카고 컵스에서 대체 선발로 뛰며 나름 쏠쏠한 활약을 했다. 2021년 10경기(선발 5경기)에서 1승2패 평균자책점 2.80, 2022년에는 21경기(선발 19경기)에서 4승5패 평균자책점 3.11로 잘 던졌다. 하지만 부상 여파로 지난해는 마이너리그에만 있었고, 올해 텍사스에서 재기를 노리는 상황이었다. 오히려 상황은 샘슨에게 더 절박했다.
이정후는 그런 샘슨을 상대로는 안타를 치지 못했다. 1회 첫 타석에서는 중견수 뜬공을 쳤다. 3회에도 선두타자로 나왔지만 역시 타구가 빗맞았고 3루수 파울 플라이에 머물렀다. 샘슨은 2회 데이비스에서 3점 홈런을 맞는 등 고전한 끝에 3이닝 동안 4피안타(1피홈런) 1볼넷 3실점으로 이날 경기를 마무리했다.
하지만 이정후는 굴하지 않았다. 어쩌면 경기 마지막 타석이 될 수도 있었던 5회 세 번째 타석에서 기어이 안타를 때렸다. 샌프란시스코가 4-2로 앞선 5회 주자 없는 상황에서 타석에 선 이정후는 텍사스 두 번째 투수 우완 콜 윈을 상대했다. 이정후는 2S에 몰렸으나 3구째 95마일(153㎞)짜리 패스트볼을 받아쳐 2루수 옆을 스쳐 외야로 나가는 중전 안타를 만들어냈다. 시범경기 전 경기 안타 행진이 이어지는 순간이었다.
메이저리그 공식 홈페이지(MLB.com)의 현지 중계진은 “2루수 조나단 오날레스가 다이빙했지만 닿지 않았다”고 안타 상황을 설명한 뒤 “2스트라이크 이후의 대처 능력이 굉장히 돋보인다. 인플레이 타구를 잘 만들어내고 이런 강점이 캑터스 리그(애리조나 시범경기)에서도 이어지고 있다”고 이정후의 강점을 칭찬했다. 이정후는 이후 콘포토의 내야안타 때 2루에 갔으나 후속타가 터지지 않으며 이닝을 마쳤고, 6회말 타석에서 대타 도노반 윌튼으로 교체돼 경기를 마쳤다.
현지 언론은 이정후의 특별한 점도 다뤘다. 바로 이날 텍사스 더그아웃에는 아버지인 이종범 텍사스 육성 특별 인스트럭터가 자리했기 때문이다. 지난해를 끝으로 LG를 떠난 이종범 코치는 현재 텍사스에서 코치 연수를 받고 있다. 원래 마이너리그 선수들을 상대하는 만큼 이날 시범경기에 올지 미지수였지만 구단의 배려로 더그아웃에서 경기를 지켜볼 수 있었다는 후문이다. 자연히 아들인 이정후와 재회가 이뤄졌다. 같은 애리조나에 있어도 서로 훈련 시설의 위치가 꽤 떨어져 있어(스코츠데일-서프라이즈) 반가울 만한 재회였다.
부자는 경기 전 기념사진도 촬영했는데 현지 언론도 부자의 관계를 조명하고 또 소개했다. 북미 스포츠전문매체 ‘디 애슬레틱’의 베테랑 샌프란시스코 담당기자 앤드루 배걸리는 자신의 SNS에 부자가 함께 찍은 사진을 올리기도 했다. 메이저리그 공식 홈페이지(MLB.com)는 ‘이정후의 아버지이자 KBO리그의 레전드인 이종범은 올해 레인저스 마이너리그 캠프에서 인스트럭터로 활동하고 있다. 스코츠데일 스타디움으로 와 경기에 앞서 아들과 경기장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고 소개했다.
◆ 빠른 공? 파워? 주루? 누가 이정후 의심했나… 천천히 맞춰지는 퍼즐 조각
지난해 팀 타격 성적이 내셔널리그 최하위 수준으로 처진 샌프란시스코는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적임자로 이정후를 낙점했다. 샌프란시스코는 오라클파크라는, 타자들이 비교적 장타를 때리기 어려운 경기장을 홈으로 삼고 있다. 특히 좌타자들에게 불리하다. 그렇다면 정교함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지난해 팀 타율을 내셔널리그 최하위 수준이었다. 특히 좌타자와 중견수 포지션은 난제였다. 많은 선수들이 실험됐으나 누구도 눈높이를 맞추지 못했다. 그래서 샌프란시스코는 자유계약선수(FA) 시장에서 돈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코디 벨린저라는 최대어를 제쳐두고 데려온 선수가 바로 이정후였다. 이정후에 대한 기대치를 실감할 수 있다.
사실 KBO리그는 메이저리그보다 두 단계 아래의 레벨이고, 대략 더블A에서 트리플A 사이의 수준으로 평가된다. 그래서 KBO리그에서 메이저리그로 진출하는 선수들은 항상 “메이저리그의 빠른 구속에 대응할 수 있는가”는 의문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KBO리그 투수들의 평균 구속보다 메이저리그 투수들의 평균 구속이 시속 3~4㎞ 이상 높기 때문이다. 이정후도 시범경기 첫 판 이후 이 문제를 인정하면서 “패스트볼도 그렇지만 확실히 다른 건 변화구의 구속”이라고 인정한 바 있다. 강정호와 김하성은 적응해 성공했고, 반대로 박병호는 이 변화에 적응하지 못해 실패했다.
그런데 이정후는 시범경기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 이정후는 1일 애리조나와 경기에서 장타 두 방을 터뜨렸다. 첫 번째 타석에서 애리조나 선발 넬슨의 커터를 받아쳐 2루타를 친 이정후는 두 번째 타석에서는 넬슨의 4구째 94.7마일(152.4㎞)짜리 포심패스트볼을 그대로 받아쳐 우측 담장을 넘겼다. 타구 속도 109.7마일(176.5㎞)짜리의 타구는 18도의 발사각을 그리며 총알 같이 418피트를 날아갔다. 그리고 2일에도 역시 95마일짜리 패스트볼을 받아쳐 다시 안타를 만들어냈다. 95마일 수준의 공을 KBO리그에서 사실 쉽게 볼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러나 이정후는 마치 계속 봤다는 듯 별 문제 없이 타격해 안타와 장타를 만들어내고 있다.
샌프란시스코는 다소간의 적응기가 있을지는 몰라도 이정후가 결국은 메이저리그의 수준 높을 공을 적응하고 공략할 것이라는 확신 속에 이정후에 6년 계약을 제안했다. 이정후의 적응력과 그에 필요한 타격 메커니즘을 굉장히 높게 평가한 것이다. 지금까지는 샌프란시스코의 계획대로 이정후가 적응하고 있음이 최근 두 차례 시범경기에서 모두 드러났다.
장점도 보여주고 있다. 현지 언론이 이정후 영입 당시 가장 홍보한 능력은 2S 이후의 대응이었다. 이정후는 KBO리그 통산 삼진보다 볼넷이 더 많다. 선구안이 뛰어나고, 2S 이후 콘택트로 어쨌든 인플레이 타구를 만드는 능력이 좋다는 것을 상징한다. 삼진은 인플레이 타구 자체가 만들어지지 않는, 타자에게는 최악의 이벤트다. 이정후는 그런 이벤트를 피할 수 있는 능력을 갖췄다.
그리고 이 장점은 계속 드러나고 있다. 세 경기 모두 2S 카운트에서 안타를 쳤다. 2월 28일 시애틀전에서는 올스타 투수인 조지 커비를 상대로 2S에서 우전 안타를 때렸고, 1일 애리조나전에서도 역시 2S 상황에서 넬슨의 커터를 잡아 당겨 2루타를 기록했다. 2일 역시 2S라는 타자가 절대 불리한 카운트에서 패스트볼을 중전 안타로 바꿔놓으며 장점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여기에 주루에서도 생각했던 것보다 더 좋은 선수라는 것이 증명되고 있다. 2월 28일 시애틀전에서 안타로 출루한 뒤 과감한 2루 도루에 나선 것은 현지 언론의 큰 조명을 받았다. 도루도 아닌데 이정후가 스피드에 자신감을 가지고 있다는 데 많은 언론들이 놀란 상황이었다. KBO리그 기록을 봤을 때 이정후의 장점은 발이 아닌 것 같았는데, 실제로 보니 빨랐다는 평가도 많다. 이정후는 1일 홈런을 친 뒤에도 전력 질주해 1루를 4.1초 만에 밟았다. 리그 평균 이상의 스프린트 스피드였다. 게다가 파워가 없다는 선입견을 시범경기 두 경기 만에 터뜨린 장쾌한 홈런으로 비웃기도 했다. 이정후의 출발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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