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티비뉴스=베로비치(미 플로리다주), 김태우 기자] SSG 사이드암 박민호(32)는 지난해 5월 12일 인천 한화전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이날 박민호는 아웃카운트 하나를 잡는 동안 안타 2개를 맞는 부진 끝에 마운드를 내려갔다. 그러나 평상시의 교체 시점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박민호는 “이 상황에서 바꾼다는 것은 ‘2군으로 내리겠다는 의미구나’고 생각했다”고 떠올렸다. 직감이었다.
예상대로였다. 경기 후 “강화도(2군)로 가서 준비하라”고 이야기를 들었다. 나름 각오는 했던 일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2군에 가서 열심히 하면 다시 1군으로 올라올 기회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나름대로 자신감도 있었다. 절박하게 시즌을 준비하면서 운동도 많이 했다. 당장 2023년 플로리다 1차 캠프 투수 최우수선수(MVP)가 박민호였다. 1군 첫 10경기에서 피안타율이 다소 높기는 했지만 그래도 평균자책점은 0.90이었다. 자신은 있었다.
그러나 박민호의 지난해 1군 등판 기록은 여기서 끝이 났다. 박민호는 “그 경기가 지난해 1군 마지막 경기가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아직도 기억이 난다”고 말꼬리를 흐렸다. 2군에서 열심히 준비했고 여름까지 성적도 좋았는데 좀처럼 콜업 기회가 오지 않자 심리적으로도 흔들렸다. 동기부여가 떨어지고, 급기야 “야구를 그만둬야 하나”는 생각까지 했다고 털어놨다. 9월 26일 1군에 올라왔으나 엔트리에 있으면서도 끝까지 등판 기회가 주어지지 않자 이런 생각은 더 강해졌다. 박민호는 “내가 더 잘했어야 했다”며 남을 탓하지 않으면서 “작년 시즌이 끝나고 그만하려고 했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박민호는 한때 팀 불펜의 중요 선수였다. 2019년 47경기, 2020년에는 57경기, 2021년에는 40경기에 나갔다. 특히 2019년과 2020년은 모두 50이닝 이상을 던지면서 2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했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팀 불펜에 반드시 필요한 선수였다. 성적이 처진 뒤에는 절박하게 매달렸다. 박민호는 “지난 2년간 정말 절박하게 준비했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운동을 했고, 더 잘하려고 발버둥을 쳤다”고 했다. 1‧2군 성적도 나쁜 건 아니었다. 그럼에도 1군에서 던지지 못했다. 이제 더 이상 팀이 자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 같았다. 박민호는 “(김)태훈이형이 은퇴하는 것을 보고 남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면서 은퇴 직전까지 갔던 지난해 막판을 이야기했다.
그런 박민호를 잡아준 건 새로운 코칭스태프와 선배 투수들이었다. 새 코칭스태프는 박민호를 1군에서 경쟁시킬 계획이었다. 플로리다 1차 캠프 명단에도 일찌감치 포함했다. “하기 싫어서 그런 게 아니라 기회가 오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은퇴 생각을 했다”는 박민호는 코칭스태프의 부름에 응하기로 했다. 노경은 고효준 등 선배 투수들도 박민호의 흔들리는 마음을 잡아주기 위해 노력했다. 이들은 “마흔인 우리에 비해 너는 아직 젊다. 아프지도 않지 않느냐”면서 후배가 다시 도전하길 바랐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박민호는 올해도 플로리다 캠프에서 1군 엔트리 경쟁을 벌이고 있다. 보장된 것은 없다. 자신이 봐도 좋은 동료들이 많다. 그런데 오히려 지난 2년보다 더 편하게 운동을 하려고 한다고 했다. 박민호는 “캠프 명단에 딱 들어가 있길래 올해는 ‘모르겠다, 그냥 해 보자’는 생각만 했다. 그래서 올해는 운동을 오히려 더 편하게 하고 있다. 아픈 곳도 없다”면서 “내 공이 좋으면 감독님도 쓰실 것이다”고 이야기했다. 많은 것을 내려놓은 목소리였다.
그런데 정작 코칭스태프의 평가는 다르다. 박민호가 이번 캠프에서 가장 절박하게 달려드는 선수라고 입을 모은다. 이숭용 SSG 감독도 “박민호가 굉장히 열심히 해서 몸을 잘 만들어놨다”면서 “투수 파트는 박민호가 자꾸 좋다고 어필을 한다. 절박하게 열심히 한다고 하더라. 그런데 내 눈에도 그런 게 보인다.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더라. 나는 박민호를 좋게 봤다. 이제 경기에 들어가서 하는 것을 봐야 한다”며 공정한 기회 부여를 약속했다.
스스로는 편하게 한다고 해도 지난 몇 년간 쌓인 그 절박함을 몸에서 다 털어낼 수는 없었던 셈이다. 박민호는 “이제 나만이 아니라 우리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한다”고 농담하며 웃은 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할 뿐이다. 나는 편하게 한다고 하는데 주변에서는 그렇지 않은 것 같다고 자꾸 이야기를 하신다. 어쨌든 결과가 좋아야 한다”고 각오를 다졌다.
예전에는 1군에 올라가지 못하면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제는 서른이 넘은 나이, 시련을 겪으면서 조금은 편하게 세상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졌다. 종착점이 어디든 달려볼 셈이다. 대신 최선을 다해 자신이 가진 것은 쏟아 붓고 후회는 남기지 않겠다는 각오다. 팀에 좋은 롤모델도 있다. 박민호는 “경은이형이나 효준이형이나 ‘한 물 갔다’는 그런 시선을 받으셨고 방출된 뒤 우리 팀에 오셨다.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나도 그런 색안경을 깨고 싶다. 한계에 부딪히면 받아들일 준비는 되어 있다. 대신 다 쏟아 붓겠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려고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때로는 지나친 절박과 강박보다는, 가벼운 발걸음이 도움이 될 때가 있다. 박민호가 그렇게 2024년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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