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격적인 리베로’ 일대 변혁…프로·대표팀서 모든 트로피 들어 올려
카리스마로 스타 휘어잡고 감독으로도 월드컵 우승…행정가로도 승승장구
(서울=연합뉴스) 안홍석 기자 = 8일(현지시간) 별세한 독일 축구의 전설 프란츠 베켄바워는 범접할 수 없는 실력과 절대적 카리스마로 그라운드를 지배했기에 ‘카이저(황제)’로 불렸다.
현역 시절 베켄바워는 존재 자체로 축구 수비 전술에 일대 변혁을 불러온 ‘창조적 파괴자’였다.
그는 중앙 미드필더로도 커리어 초반과 후반에 꽤 오래 뛰었으나 가장 빛난 건 ‘리베로’, ‘스위퍼’ 자리에서다.
수비 라인 뒤로 한 발 빠져서, 최후 저지선 역할을 하는 리베로, 스위퍼는 베켄바워가 활약한 1960년대에 아주 새로운 개념은 아니었다.
하지만 베켄바워는 이 포지션에 공격적인 요소를 도입해 전에 없던 특별한 수비수로 떠올랐다.
베켄바워는 당대 최고 수준의 미드필더, 공격수들보다 공을 잘 다룰 줄 알았기에 공을 걷어내는 데에만 집중하던 기존 리베로들과는 다른 플레이를 했다.
베켄바워는 공을 발밑에 두고 중원으로 돌진하거나 정확한 전진 패스를 날려 경기를 직접 풀어나갔다.
그가 공을 몰고 종원으로 올라서면 독일 미드필더진은 수적 우위를 점했다. 전방 공격수들 발 앞에 떨어지는 정확한 패스는 끊임없이 상대 수비진을 괴롭혔다.
베켄바워는 수비의 마지막이자, 공격의 시작점이었다.
축구의 수비는 예전과 같을 수 없게 됐다. 베켄바워의 등장은 1970년대 네덜란드에서 완성된, 전원 공격 전원 수비의 ‘토털 사커’ 전술과 같은 흐름에 있다.
율리안 나겔스만 독일 대표팀 감독은 “베켄바워의 리베로 포지션에 대한 해석이 축구를 변화시켰다. 어쩌면 1960년대 유럽에 퍼져있는 문화적 자유주의와 자유의 정신이 반영된 것일지도 모른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판’을 바꿔버릴 정도의 실력을 보여준 베켄바워는 카리스마도 강했다. 전방의 미드필더, 공격수들에게 늘 거만한 표정과 몸짓으로 ‘명령’하는 모습은 베켄바워의 상징과도 같았다.
그가 낸 성과도 카이저라는 별명에 부족함이 없다. 프로와 국가대표팀에서 들어 올릴 수 있는 트로피는 모두 들어 올렸다.
고향 팀인 바이에른 뮌헨 소속으로 프로에 데뷔한 그는 1군 무대에 선 첫 시즌에 팀을 분데스리가 승격으로 이끌었다.
이전까지 ‘명문’과는 거리가 먼 구단이던 뮌헨은 베켄바워와 함께 분데스리가 4차례, 독일축구협회컵(DFB 포칼) 4차례,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UCL)의 전신인 유러피언컵 3차례, 유러피언 컵위너스컵 1차례 등 수많은 우승컵을 수집하며 독일의 강팀으로 떠올랐다.
베켄바워는 잠시 미국 뉴욕 코스모스에서 뛰고 독일 무대로 복귀하고서도 함부르크에서 1981-1982시즌 분데스리가 우승을 해냈다.
서독 대표팀에서도 1974년 국제축구연맹(FIFA) 서독 월드컵 우승, 유로 1972(1972년 벨기에 유럽축구선수권대회) 우승을 이뤄냈다.
베켄바워는 지도자, 행정가로서도 승승장구했다.
현역에서 은퇴한 이듬해인 1984년, 불과 39세의 나이에 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한 베켄바워는 카리스마로 스타 선수들을 한데 묶어 1986년 멕시코 월드컵 준우승,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우승, 유로 1988 3위 등의 성적을 냈다.
베켄바워는 브라질의 마리우 자갈루에 이어 선수와 감독으로 월드컵을 제패한 역대 2번째 축구인이다. 자갈루는 베켄바워보다 3일 일찍 세상을 떠났다.
이들은 ‘스타 플레이어 출신 감독은 성공하기 어렵다’는 속설의 대표적인 반례로 자주 언급된다.
프랑스 마르세유(1990-1991시즌 리그1 우승) 감독을 거쳐 친정 뮌헨 지휘봉을 잡은 베켄바워는 1993-1994시즌 분데스리가 우승을 이끌었다.
이후에는 행정가로 나서 뮌헨에서 1994년부터 2002년까지 회장직을 맡았고, 2002년부터는 명예회장을 지냈다.
뮌헨은 매 시즌 흑자를 기록하는 건실한 운영으로 이름나 있다.
ahs@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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