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해해 죄송하다”는 팬들 위로에 치유돼…”LG 감독은 참 좋은 자리”
단장을 목표로 키운 ‘넓은 시야’…29년만의 LG 우승 밑거름으로 작용
“500승·400패 해봤다…공부하고 성숙해졌으니 이젠 감독 제대로 할 때”
(서울=연합뉴스) 장현구 기자 = 누구나 인생에서 한 번쯤은 눈부시게 빛날 때가 있다.
프로야구 LG 트윈스 염경엽(55) 감독에게 검은 토끼해인 2023년은 야구 인생에서 잊을 수 없는 해다.
‘독이 든 성배’라는 꼬리표가 붙은 LG 지휘봉을 잡자마자 트윈스의 한국시리즈 우승 한(恨)을 29년 만에 풀고 명장의 반열에 올랐다.
LG의 정상 탈환은 일개 프로 종목의 화제에 그치지 않고 일종의 사회 현상이 됐다.
삼성 라이온즈가 창단 후 처음으로 한국시리즈 우승컵을 품에 안은 2002년의 사건과 비견될 만큼 국내 굴지 재벌 기업의 한풀이는 사회 전반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그 덕에 염 감독은 체육인으로는 이례적으로 한 시사 주간지의 표지와 커버 스토리 주인공이 됐다.
염 감독은 2000년에는 현대 유니콘스에서 선수로, 2018년에는 SK 와이번스(현 SSG 랜더스)에서 단장으로, 그리고 2023년엔 LG에서 감독으로 한국시리즈 정상을 밟아 경력을 더욱 화려하게 꾸몄다.
청룡의 해인 2024년을 맞아 염 감독에게 선수들의 헹가래를 받던 지난해 우승 순간이 야구 인생의 하이라이트가 아니었느냐고 묻자 “내 인생의 화양연화(花樣年華·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는 지금부터”라는 답이 돌아왔다.
염 감독은 “프로야구 감독으로 500승 가까이 거뒀고 400번 가까이 져봤다.(통산 492승 9무 381패) 이기고 지는 여러 경험을 통해 많이 공부했고, 나도 성숙해졌다고 생각한다”면서 “이젠 감독으로서 정말 제대로 된 일을 시작할 시기가 됐다”며 ‘LG 왕조’ 구축에 본격 착수하겠다고 새해 다짐을 밝혔다.
400번은 이기고, 져봐야 감독의 길이 보일 것이라는 김인식 전 야구대표팀 감독의 한마디가 번쩍 스쳐 갔다.
연합뉴스는 2023년이 저물던 12월 28일 서울 잠실야구장 감독실에서 염 감독과 새해 인터뷰를 진행했다.
◇ 우승은 위로와 치유의 기쁨
염 감독은 지인들과 부부 동반으로 떠난 연말 미국 하와이주 여행에서도 LG 팬들의 축하 인사에 감동했다.
“하와이에서도 많은 LG 팬이 축하를 건네주셨고, 비행기 승무원도 LG 팬이라며 감사해주셔서 참 흐뭇했어요. 독이 든 성배라는 말도 있지만, 어쨌든 LG 감독 자리는 참 좋은 자리 같아요.”
우승 후 쏟아진 여러 축하 인사 중에서도 염 감독의 뇌리에 강하게 박힌 말은 “오해해서 죄송했다”는 팬들의 감사 인사였다.
현대를 떠나 2008년 스카우트로 LG 유니폼을 입은 염 감독은 이듬해 운영팀장, 2010∼2011년 LG 수비 코치를 지냈다. 운영팀장 재직시절 지연·학연에 얽매여 팀을 망가뜨렸다는 팬들의 비난에 가까운 비판을 듣고 구단주의 만류에도 쫓기듯 LG를 떠났다.
“우승 후 여러 곳에서 팬들을 뵀는데, 만나본 팬들의 10% 정도가 당시를 떠올리며 오해해서 죄송하다는 말씀을 해주셨어요. 밖으로 말할 순 없었지만, LG를 떠날 당시가 내 야구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고 속상했던 시기였어요.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왔는데 연줄에 의지해 권력이나 휘두른 사람이 됐으니 상처로 남았죠. 그런데 우승 후에 팬들이 오해했다는 말씀을 해주셔서 제게 참 많은 위로가 됐어요. 당시 일을 이젠 추억처럼 편하게 웃으며 얘기할 수 있다는 게 너무 좋습니다. 프로야구 선수나 감독, 코치는 팬들의 관심과 사랑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인데 12년 전 LG 팬들에게 무너졌던 신뢰를 이번에 되찾아서 마음에 남았던 큰 상처가 다 나았어요.”
한여름에도 유광 점퍼를 입고 야구장을 찾은 LG 팬들도 염 감독이 이끈 우승으로 타들어 갔던 갈증을 씻어냈다. 서로에게 위로가 된 해피엔딩이었다.
◇ 단장을 목표로 달려왔더니 넓게 보였다
프로 10년 통산 타율 0.195, 홈런 5개, 타점 110개를 남긴 염 감독은 주저하지 않고 자신을 ‘실패한 선수’라고 규정한다.
선수로 실패했기에 감독이 될 수 없다고 은퇴 후 삶을 전망한 염 감독은 대신 야구단 단장이 되려고 프런트 밑바닥부터 경험을 쌓았다.
한 팀의 시스템을 세우는 단장이 되겠다는 확실한 목표를 세웠기에 염 감독은 모든 걸 허투루 넘기지 않았다. 스카우트 시절 쌓은 미국프로야구 메이저리그 네트워크를 통해 자료를 구하는 대로 번역해 책으로 만들어 해마다 저장하고 요약하고 파쇄하는 일을 1998년부터 25년간 반복했다.
요즘엔 서재에 있던 자료를 모바일로 볼 수 있게 변환해 휴대전화, 태블릿 PC로 어디서든 활용한다.
“(운영팀장, 단장, 스카우트, 해설위원, KBO 기술위원장 등 그간 거쳐온) 직책이 아니라 단장이라는 목표가 있었기 때문에 포괄적인 공부를 한 게 나중에 감독이 됐을 때도 크게 도움이 됐어요. 감독으로서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 바탕이 된 거죠. 현대 시절에는 육성팀장, 운영팀장, 스카우트 팀장, 기획팀장 네 가지 보직을 다 했는데 미국의 매뉴얼을 우리 식으로 바꾸고 ‘염경엽식’으로 만들고, 그런 자료를 수집하고 변용하면서 나만의 야구를 정립할 수 있었어요.”
◇ 초점을 여러 곳으로 분산시키는 야구…내 라이벌은 ‘바로 나’
염 감독의 야구를 딱히 한마디로 정의하긴 어렵지만, 2023년에 선보인 스타일을 보면 상대의 초점을 흐트러뜨리는 야구 정도로 표현할 수 있다.
“언론이나 팬들이 작년에 우리가 초반에 자주 뛰는 것(도루 시도)을 두고 많이 의아해하셨어요. 시즌 막판에 그 이유를 우리 선수들의 망설임과 두려움을 떨치기 위해서였다고 설명했는데요. 실패하더라도 뛰어야 우리 야구를 할 수 있기 때문이었어요. 주자가 뛰어야 우리에게 득점 기회가 생기고, 상대 팀을 흔들 수 있다고 봤어요. 상대 팀은 우리를 하나의 초점으로만 보면 훨씬 쉽게 상대하잖아요. 제 생각은 그런 초점을 타자, 주자, 여러 상황으로 분산시켜 상대 팀이 우리에게 말려들도록 만들려고 했어요. 제가 단장 출신이라 뛰는 야구가 실패했을 때 구단 고위층의 반응이 어떨지 대충 예상은 하죠. 재미있는 건 김인석 사장님이나 차명석 단장님도 각자 ‘왜 저렇게 뛸까’라고 생각하셨을 테지만, 제게 ‘뛰는 야구’를 두고 두 분 다 어떤 말씀도 안 하셨어요. 저를 배려하고 믿어주신 점을 무척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내 중심을 잡고, 상대를 흔든다면 이길 수 있다는 확고한 철학이 있기에 염 감독에게 라이벌 감독은 따로 없다.
“최대 라이벌은 나 자신이라고 생각해요. 자신의 한계를 정하지 말라고 선수들에게도 얘기합니다. 한계를 정하는 순간 떨어지는 것밖에 없어요. 요즘도 조금 피곤할 때면 아침에 일어나 나 자신에게 이런 얘기를 해요. ‘정신 차려. 어떻게 여기까지 왔어. 루틴을 지켜야지’라고 말해요.”
듣기만 해도 인생을 ‘피곤하게’ 사는 염 감독은 2019∼2020년 SK 시절 처절한 실패를 맛보고 야인 시절 자신의 리더십을 업그레이드했다고 했다.
넥센 히어로즈, SK 감독 시절보다 점수 나면 더 크게 웃고 선수들과 하이파이브도 더 신나게 하는 방식으로 액션을 바꿨다. 건강 문제로 SK에서 한 번 쓰러진 뒤 감정을 속에 묻어뒀다가는 더 아찔한 상황에 직면할 수 있다는 위기감에서다.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는 것보다는 좋으면 내가 더 기뻐해 주는 게 선수들의 감정선과 더 가까워질 수 있는 좋은 방법이라고 봤어요. 리더십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메이저리그 감독들이 감정 표현에 인색하지 않은 데 다 이유가 있죠. 선수들과 공감할 수 있도록 내 스타일을 바꾼 게 참 잘한 것 같다고 생각해요.”
한동안 잊힌 LG의 신바람은 더그아웃에서부터 잠실구장 관중석을 계단처럼 타고 넘어, 그렇게 다시 전국으로 불었다.
cany9900@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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