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 넣고 승부차기도 막으니 가장이라 해…난 집에서도 가장”
WK리그 세종스포츠토토 2년차…여자 월드컵서 2골 등 맹활약
(세종=연합뉴스) 이의진 설하은 기자 = 힐다 마가이아(28)는 10년 전 대뜸 집으로 찾아온 어느 동네 남자를 기억한다.
그가 누구냐고 묻자 마가이아는 “이름은 치에치 셀라툴이고, 구단 관계자도 아니다. 그냥 마을에 살던 사람”이라고 했다.
마가이아는 남아프리카공화국 북부 림포포주(州)의 작은 마을 데닐턴에서 자랐다. 거긴 여자축구팀이 없어 마가이아는 줄곧 남자들과 함께 뛰었다.
사실 ‘함께 뛴다’는 표현은 정확하지 않다. 마가이아는 훈련만 했다. 남자들이 나서는 공식전에 출전하지 못해 혼자 뜀박질하고 공만 찼다.
마가이아의 고향에서는 남자 선수도 장비 부족에 허덕였다. 보유한 축구공이 2개뿐인 팀도 있었다고 한다. 남자도 힘겹게 축구하는 곳에서 여자들의 ‘차례’는 돌아오지 않았다.
마가이아는 “공, 신발 등이 없으니 여자아이들은 점점 축구를 그만뒀다. 끝까지 남은 게 나뿐이었다”고 돌아봤다.
데닐턴에서 80㎞가량 떨어진 지역에 여자팀이 창단돼 ‘축구 유학’을 가보기도 했다. 하지만 구단주가 급사해 팀 창단은 없던 일이 됐고, 남자들과 훈련하면서도 ‘뛰지는 못하는’ 일상이 이어졌다.
마가이아가 “희망을 잃어갔다”고 표현한 2013년, 그 남자는 묵묵히 훈련하는 마가이아를 지켜보곤 했다.
하루는 셀라툴이 갑자기 마가이아의 집으로 향했다. 마가이아가 여자축구 선수로 살 수 있도록 도시로 데려가겠다고 어머니를 설득했다.
마가이아는 “의심스럽긴 했다. 갑자기 누가 집까지 찾아와 딸을 데려가겠다는데 믿을 수 있나”라며 “하지만 어머니는 나를 전적으로 믿어주시는 분이셔서 결국 허락하셨다”고 말했다.
그 남자가 마가이아를 인도한 곳은 데닐턴에서 약 100㎞ 떨어진 남아공의 행정수도 프리토리아 외곽의 마멜로디였다.
거기서 수소문 끝에 유수의 명문 프리토리아대에서 운영하는 여자축구 프로그램을 접한 마가이아는 비로소 선수 생활을 시작할 기반을 찾았다. 그 이후로는 모든 게 잘 풀렸다.
2017년 츠와네 공대 산하 팀으로 적을 옮기면서 남아공 여자축구 최상위 리그를 밟았고, 2019-2020시즌에는 ‘올해의 선수’로도 뽑혔다. 이 시즌 36골을 폭발했다.
2018년 국가대표로 처음 뽑힌 마가이아는 2021년 스웨덴의 모론 BK에 입단해 고국을 떠났고, 지난해 여자 실업축구 WK리그 세종스포츠토토에 입단해 한국과 인연을 맺었다.
지난달 31일 세종 시내 구단 숙소에서 연합뉴스와 만난 마가이아는 자신의 인생을 바꾼 ‘그 남자’의 제안을 곱씹었다. 마가이아는 “그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선의로 움직인 것 같다”고 했다.
셀라툴의 갑작스러운 제안을 받은 지 10년이 지난 지금 마가이아는 남아공 여자축구의 간판으로 떠올랐다.
마가이아는 지난달 20일 막을 내린 2023 국제축구연맹(FIFA) 여자 월드컵에서 조국에 사상 첫 16강 진출의 기쁨을 안겼다.
스웨덴과 첫 경기부터 득점포를 가동하더니 이탈리아와 G조 최종전에서 2-1로 달아나는 골을 터뜨렸고, 경기 종료 직전 3-2를 만드는 극장 골까지 도왔다.
이 승리 덕에 남아공은 조 이탈리아·아르헨티나를 조 3·4위로 밀어내고 역사를 썼다. 맹활약한 마가이아를 두고 현지 언론은 ‘가장'(breadwinner)이라는 표현을 쓴다.
이탈리아전 직후 환희에 찬 마가이아도 언론 인터뷰에서 이 별칭을 직접 언급했다.
당시 마가이아는 “다들 날 가장(breadwinner)이라 부른다. 가장이 없으면 빵(bread)도 구할 수 없다. 그래서 내가 조국에 빵을 마련해 줘야 한다”고 말했다. 나라 전체를 기쁘게 한 득점을 빵에 빗댄 것이다.
가장은 마가이아의 오래된 별명이다. 마가이아는 “남아공 클럽 경기 중 골도 넣고, 승부차기에서 골키퍼로 나서 한 차례 선방한 적이 있다. 그때부터 나를 동료들이 가장이라 불렀다”고 설명했다.
이어 “지난해 열린 아프리카 여자 네이션스컵 결승에서 내가 2골을 넣어 남아공이 2-1로 모로코를 꺾고 우승했다. 그때도 동료들이 ‘우리한테 빵을 줬으니 네가 가장이야’라고 했다”고 덧붙였다.
공교롭게도 이 별명은 마가이아의 가족 사정에도 퍽 알맞다.
두 언니가 분가했다는 마가이아는 “남자 형제도 있다. 그 딸이 벌써 11살이다. 집에 함께 산다. 내 어머니까지 이렇게 한 가족”이라며 “이들은 내 전부다. 이들을 돌봐야 한다. 난 집에서도 가장”이라고 말했다.
‘가장’ 마가이아는 일단 이번 월드컵에서 활약 덕에 최소 8천만원가량을 집에 가져다줄 수 있게 됐다.
FIFA가 라운드별 진출 상황에 따라 선수 개인이 받을 상금 규모를 고정해뒀기 때문이다. 16강에 진출한 팀 모든 선수가 6만달러(약 8천만원)씩 받는다.
마가이아는 “가족을 위해 전력을 다할 뿐이다. 주어진 임무를 열정적으로 하려는 데는 그런 이유가 있다”며 “받은 과제는 최대한 잘 해내야 한다. 그래야 가족을 부양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번 대회를 통해 마가이아는 WK리그에서 뛰는 외국 선수 중 처음으로 월드컵에서 골 맛을 본 선수가 됐다.
마가이아는 “에이전트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다. 첫 월드컵 무대에서 이룬 성과라 정말 자랑스럽다”고 웃었다. 올 시즌 9골을 넣은 마가이아는 문미라(수원FC·12골)에 이어 리그 득점 랭킹 2위에 올라 있다.
3일 홈에서 열리는 창녕WFC와 올 시즌 정규리그 최종전으로 WK리그 두 번째 시즌을 마치는 마가이아는 곧장 귀국한다. 남아공은 세계 최강으로 군림한 미국과 이달 하순 A매치 연전을 펼친다. 마가이아는 실력을 발휘할 준비를 하고 있다.
마가이아의 꿈은 언젠가 지소연(수원FC)처럼 첼시(잉글랜드)에서 뛰는 것이다.
마가이아는 “아직은 때가 아니지만, 할 수 있다는 믿음을 지킨다면 언젠가는 하느님이 첼시에 데려다주실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뭐든 가능하다’, ‘불가능은 없다’가 내 신조다. 불행에 처했다고 해서 헤쳐 나갈 수 없는 건 아니다”라며 “쉽지는 않겠지만 신념을 가지고 온 힘을 다 쏟으면 된다”고 강조했다.
마가이아가 보기에 지금 여자축구에 필요한 것도 일종의 ‘믿음’이다.
마가이아는 여자 선수도 남자만큼 축구를 잘 할 수 있고, 격렬한 경기를 보여줄 수 있다고 믿는다.
그는 “여자 선수들도 90분을 넘어 연장까지 120분, 심지어 승부차기까지 가는 격렬한 경기를 보여준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가 남자 선수들과 다를 게 없다고 생각한다”며 “그 정도 능력은 있다고 믿어야 한다. 우리도 적어도 90분간은 열심히 공을 쫓아 뛴다”고 말했다.
또, 마가이아는 여자축구가 한동안 ‘우상향’할 것이라고 믿는다.
마가이아는 “이전 여자 월드컵과 비교해보면 안다. 이번 대회에서 모든 팀이 대단히 발전했다”며 “사람들은 강호들이 승승장구할 것이라고 했지만 다들 고전했다. 세계 각지에서 여자축구가 엄청나게 성장 중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옳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거다. 더 큰 지지와 함께 성장하면 언젠가는 여자축구의 규모도 남자축구만큼 커질 수 있다고 믿는다”고 덧붙였다.
pual07@yna.co.kr, soruh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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