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스피드스케이팅의 ‘살아있는 전설’ 이승훈(36·알펜시아)이 대역전극을 펼치며 약 7년 만에 월드컵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24일(한국 시각) 폴란드 토마슈프마조비에츠키의 로도와 아레나에서 열린 2024-2025 국제빙상경기연맹(ISU) 월드컵 5차 대회 남자 매스스타트에서 이승훈은 놀라운 역전극을 선보였다. 400m 트랙 16바퀴를 도는 레이스에서 20명의 선수 중 최하위인 20위로 출발한 그는 마지막 순간 폭발적인 스퍼트로 선두권을 제치고 7분48초05의 기록으로 금메달을 차지했다.
이날 경기에서는 이승훈의 노련한 전략이 제대로 빛을 발했다. 레이스 초반부터 중반까지 그는 19위, 18위를 오가며 체력을 비축했다. 다른 선수들이 속도를 올리며 경기 흐름을 흔들었지만, 이승훈은 차분히 자신의 페이스를 유지했다. 결승선을 4바퀴 남길 때까지도 16위에 머물러 있던 그는, 13바퀴째에 9위, 14바퀴째에 8위로 서서히 순위를 끌어올렸다. 15바퀴에서는 3위까지 치고 올라가며 역전극에 시동을 걸었다.
극적인 순간은 마지막 바퀴에서 펼쳐졌다. 바깥쪽으로 빠져나온 이승훈은 순식간에 3위까지 치고 올라갔고, 마지막 곡선주로에서 사사키 쇼무(일본), 리피오 벵거(스위스)를 제치며 선두로 올라섰다. 마지막 직선주로에서 그는 남은 체력을 모두 쏟아부으며 결승선을 가장 먼저 통과했다. 결승선을 통과한 직후 이승훈은 주먹을 불끈 쥐며 승리의 기쁨을 만끽했다.
특히 이승훈은 이날 자신보다 17살이나 어린 일본의 사사키와 선두 경쟁에서 당당히 우위를 차지하며 베테랑 선수의 노련미를 마음껏 뽐냈다.
이승훈은 스프린트 포인트 60점을 획득해 네덜란드의 바트 훌베르프(7분48초51·스프린트 포인트 40점)와 이탈리아의 안드레 지오바니니(7분48초57·스프린트 포인트 21점)를 제치고 정상에 올랐다. 이는 2017년 12월 미국 솔트레이크시티 월드컵 3차 대회 이후 약 7년 만의 금메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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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훈의 이력은 한국 빙상의 역사와 맞닿아 있다. 쇼트트랙 선수로 시작해 2010년 밴쿠버 동계올림픽 대표 선발전 탈락 후 스피드스케이팅으로 전향한 그는, 1년 만에 올림픽에 출전해 5000m 은메달과 10000m 금메달을 획득하며 아시아 남자 선수 최초의 장거리 메달리스트가 됐다. 2014년 소치올림픽에서는 팀 추월 은메달을, 2018년 평창올림픽에서는 초대 매스스타트 챔피언의 영광을 안았다.
월드컵에서도 이승훈의 활약은 눈부셨다. 매스스타트가 처음 도입된 2011-12시즌에 1승을 거둔 것을 시작으로, 2014-15시즌에는 3회 우승과 함께 종합 랭킹 1위에 올랐다. 2016-17시즌에도 2회 우승으로 시즌 1위를 차지했고, 2017-18시즌에는 2회 우승을 추가하며 통산 8승을 기록했다.
하지만 평창올림픽 이후 이승훈은 어려운 시기를 겪었다. 대표팀 훈련 특혜 논란과 과거 후배 선수 폭행 문제로 약 3년간 대회 출전이 제한됐다. 복귀 후에도 매스스타트에서 2021-22시즌 13위, 2022-23시즌 8위, 지난 시즌 13위에 그치며 입상권과 거리가 있었다. 올 시즌도 5차 대회 전까지는 13위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최근 열린 2025 하얼빈 동계아시안게임에서 정재원, 박상언과 함께 남자 팀 추월 은메달을 획득하며 한국 선수 역대 동계아시안게임 최다 메달(9개) 기록을 세웠다. 이는 기존 김동성이 보유했던 8개를 뛰어넘는 신기록으로 주목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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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날 진행된 다른 종목에서도 한국 선수들의 활약이 돋보였다. 남자 팀 스프린트에서는 차민규(동두천시청), 김준호(강원도청), 조상혁(의정부시청)이 1분20초47로 미국(1분19초27)에 이어 은메달을 차지했다. 특히 김준호는 지난 22일 남자 500m 1차 레이스에서 동메달을 획득한 데 이어 이번 대회에서 두 번째 메달을 목에 걸었다.
여자 500m 2차 레이스에서는 하얼빈아시안게임 2관왕 이나현(한국체대)이 38초15로 4위를 기록했다. 3위 안젤리카 부이치크(폴란드·38초03)와는 불과 0.09초 차이였다. 같은 종목에서 김민선(의정부시청)은 38초22로 6위를 기록했다. 우승은 미국의 에린 잭슨(37초81)이 차지했고, 쇼트트랙에서 스피드스케이팅으로 전향한 쉬자너 스휠팅(네덜란드·37초92)이 은메달을 획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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