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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태규의 직설] ‘의리와 인정’, 장훈의 야구인생 70년…한국 야구는 그에게 ‘배은망덕’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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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출신으로 일본 프로야구에서 큰 족적을 남겼던 장훈. 최근 일본으로 귀화한 사실을 밝혔다. 일본 이름은 하시모토 이사오이다. 이치로가 시애틀서 뛸 때 장훈이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게티이미지코리아
한국인 출신으로 일본 프로야구에서 큰 족적을 남겼던 장훈. 최근 일본으로 귀화한 사실을 밝혔다. 일본 이름은 하시모토 이사오이다. 이치로가 시애틀서 뛸 때 장훈이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게티이미지코리아

“일본 프로야구는 나를 ‘키워준 부모.’ 반대로 나는 한국 프로야구를 ‘낳아준 부모’다.”

재일동포 원로 야구인 장훈 씨(85)의 말. 모국에 생색내는 자랑이 아니다. 일본에서 태어나 야구 인생만 70여 년을 보낸 그에게 대한민국 야구는 영원한 살붙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다.

그는 고교 때 처음 모국 땅을 밟았다. 시합하면서 뜨거운 민족의식, 한국인이란 강한 자부심·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 1975년 한국 정부는 장훈과 신격호 일본 롯데 마린스구단주에게 “일본 프로의 한국계 선수들을 이끌고 한국에 와서 프로야구의 진수를 보여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장훈은 일본 양대 리그 회장들을 만나 협력을 얻었다. 그는 선수 겸 감독으로 원정단을 이끌며 서울에서 경기를 치렀다. 이때 일본 프로야구 심판들을 데려와 한국 심판들을 가르치도록 했다.

그는 한국 프로야구 창설의 밑그림을 그렸다. 출범 몇 년 전부터 이용일(전 KBO 사무총장)·이호헌(전 KBO 사무차장) 씨와 계속 구단은 어디에 둘 것인지, 몇 개 구단으로 구성할 것인지 의논한 끝에 계획서를 만들었다. 초대 총재 후보 명단도 함께 작성했다. 개막전에는 일본 프로야구 요미우리 구단주 등을 초청했다. 많은 재일동포 선수들을 꾸준히 보내는 등 프로야구가 단단히 뿌리내리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그만큼 장훈은 고국을, 한국 야구를 깊이 아끼고 사랑했다.

그런 장훈이 최근 일본 매체 회견에서 한국 야구인들의 의리 없음, 고마움 모름을 나무랐다. 한국야구위원회 총재 특별보좌역을 24년이나 했는데도 한국 시리즈 등에 단 한 번도 초청받지 못했다고 한다. 다른 섭섭한 일도 적지 않았기에 “평생 의리와 인정으로 살아왔다”는 그가 드러내 배신감을 표현했을 터.

실제 그의 의리와 인정은 일본 야구계에서 유명하다. 특히 재일동포 유력인사들과 친하다는 이유로 “일본 야구의 암”이란 모욕까지 당했으나 그들을 배반하지 않았다. 신의를 저버리지 않았다. 한국 야구를 진정으로 도운 것도 모국에 대한 의리였다. ‘의리’는 삶의 절대 가치였다.

한국인 출신으로 일본 프로야구에서 큰 족적을 남겼던 장훈. /게티이미지코리아
한국인 출신으로 일본 프로야구에서 큰 족적을 남겼던 장훈. /게티이미지코리아

■“장훈의 기록은 ‘언터쳐블’”

일부 한국인들은 ‘장훈’을 “그저 일본에서 야구 좀 잘한 동포 노인”쯤으로 알기도 한다. 하지만 그는 넘사벽 선수였다. 일본은 그를 “한국의 영웅”이라 불렀지만 일본 야구의 영웅이기도 했다.

스포츠에서 ‘언터쳐블(untouchable)’은 어떤 선수의 기록이 너무 뛰어나 누구도 넘어서기 거의 불가능하다고 여겨질 때 사용된다. 미국 프로야구 조 디마지오의 56경기 연속 안타, 프로농구 윌터 챔벌레인의 한 경기 100점 등이 ‘언터쳐블’로 꼽힌다. 디마지오는 83년 전, 챔벌레인은 63년 전 기록들. 그러나 아직 근방에도 간 선수가 없다.

장훈이 1980년 세운 3,085 안타는 90년 일본 프로야구 역사의 3대 기록 가운데 하나. 영어 쓰기 좋아하는 일본 매체들은 그 기록을 ‘언터쳐블’이라 한다. 어떤 수식어도 더는 필요 없다. 장훈이 얼마나 대단한 선수인지는 그 표현 하나만으로 충분하다. 23년간 평균 타율 0.319, 타격왕 7회. 통산 16년 3할과 9년 연속 3할 모두 일본 기록. 500홈런(504)·300도루(319)는 동시 달성도 일본 유일의 기록. 1990년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그런 장훈이 감독을 하지 않았던 것은 일본 야구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로 꼽힌다. 네 번이나 감독 제의를 받았으나 다 사양했다. 그 배경에는 의리의 인간관계와 어머니 충고가 얽혀 있었다.

장훈의 회고. “현역에서 은퇴한 1981년. 롯데 신격호 구단주께서 자택으로 불렀다. ‘감독을 맡아 주지 않겠나?’ 당시 감독은 야마우치 가즈히로. 내 성격상 그를 밀어내고 감독 자리에 오를 수는 없었다. 의리와 인정으로 살아왔기 때문이다.

“아닙니다. 감독이 되기에는 아직 미숙합니다.” 정중히 사양했다. 2년 뒤 다시 신 회장께서 연락해 감독을 말씀했다. “아직 공부가 부족합니다.”다시 한번 사양했다. 신 회장은 후보자 추천을 부탁했다. “내가 추천한 사람들 가운데 도바시 마사유키가 감독이 되었다.”

신 회장은 요미우리에서 뛰던 장훈을 구단주에게 특별 부탁해 롯데로 데려갔다. 나중에 감독을 맡기기 위해서였다. 그만큼 동포 장훈을 살뜰하게 아끼고 돌봤다.

야마우치는 장훈이 롯데 중심 타자로 “안타 제조기”라는 별명을 얻었을 때의 감독. 장훈의 타격 실력과 선수들을 이끄는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 장훈도 그를 무척 존경했다. 스승을 물 먹이는 일은 스스로 용납할 수 없었다.

1973년, 일본햄은 홈런왕 오스기 가츠오를 한신에 보내기로 했다. 발표만 남은 상황. 그러나 오스기는 요미우리 선수인 장훈의 집 현관에 정좌한 뒤 “형님, 제발 살려주세요!”라며 머리 숙였다. “도쿄를 떠날 형편이 아니다”며 눈물로 호소했다. 장훈은 8년 전 도에이에 연습생으로 입단한 그의 실력을 단박에 알아보고 각별히 챙겼다. 나중에 장훈은 3번, 오스기는 4번을 쳤다.

장훈은 다음 날 일본햄 도바시 감독을 찾아가 “제가 책임지고 돌볼 테니 없던 일로 해달라”고 사정했다. 감독은 “이야기가 끝났다”고 했으나 “2~3일 기다려 봐라”며 여운을 남겼다. 결국. 그는 장훈의 간곡한 부탁을 들어주었다. 트레이드는 취소됐다.

오스기가 다른 구단의 선배에게 호소한 것, 일본햄 감독이 다른 구단 선수의 부탁을 들어준 것 모두 장훈의 ‘의리와 인정’이 빚은 보기 드문 일이었다. 장훈은 10년 뒤 잊지 않고 롯데 감독 추천으로 그 은혜를 갚았다.

감독을 마다한 데는 어머니의 걱정도 컸다. “감독을 맡으면 늘 밤새 잠 못 이루며 고민하다 죽을 수도 있다”며 말렸다고 한다.

■“‘반 쪽발이’라 부르는 이들의 얼굴을 보고 싶다”

장훈의 의리·인정은 고국으로 간 재일동포 선수들을 위해서도 발휘되었다. 한국 프로야구에서 재일동포들은 병역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는 등 여러 이유로 차별받았다. 장훈은 그 문제를 프로야구 관계자 회의에서 지적했다. 재일동포들의 설움을 절절하게 대변했다.

“같은 한국 사람인데 한국어 모른다고 누가 말했나? 그들은 일본에서 태어나 교육받으며 자랐다. 한국어를 배울 기회가 제대로 있었겠는가? 그런 사람을 ‘반 쪽발이’라 부르는 이들 얼굴을 한번 보고 싶다.

‘너희들 잘 돌아왔구나. 얼마나 고생이 많았느냐’고 응원해 주는 것이 정상 아닌가? ‘일본에서 편히 살다 왔지 않느냐?. 우리는 고생했는데’라니, 이게 말이 되나? 재일교포 1세들 모두 남의 나라에서 엎드려 기어 다니듯이 열심히 일했다. 죽을 힘을 다해 노력했다. 그런 배경이 있기에, 부모님의 피를 물려받은 우리는 재일동포의 자부심을 품고 살아가고 있다.”

재일동포 후배들이 받는 고국의 차별에 분노했으나 그는 평생 대한민국을 잊은 적이 없다: “처음 한국의 공항에 도착했을 때 한국 야구 관계자가 전혀 모르는 사이인 우리 인솔자와 끌어안고 우는 것을 봤다. 그 순간 생각했다. 이곳이 조국이구나.” 그때의 감동을 70여 년 고스란히 간직한 채 살아왔다.

■“한국인이라 말하면 되잖아요”

프로에 막 입단한 18세 장훈은 동포의 소개로 프로레슬링 선수 역도산을 만났다. 그는 장훈을 아껴 도쿄에 있을 때는 늘 데리고 다녔다. 하루는 역도산의 집에서 함께 술을 마셨다. 그는 가사 도우미를 돌려보내고 문을 잠갔다. 당시 재일동포 누구도 한국인임을 쉽게 밝힐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전후 일본의 영웅’이라 불린 역도산도 그랬다. 라디오에서 한국 음악이 흘러나왔다. 역도산은 기분 좋게 춤추기 시작했다. 고국을 그리는 본능은 숨길 수 없었던 것.

역도산은 한국인이라고 밝혔다. 장훈은 “소문이 사실이었군요”라며 기뻐했다. 들뜬 기분으로 “한국인이라면 한국인이라고 말하면 되잖아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역도산은 “너는 식민지 시대의 고통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건방진 소리 하지 마”라며 격노했다. 장훈의 어깨를 밀어 넘어뜨렸다. 장훈은 자신처럼 모든 동포들이 당당하게 신분을 밝혀야 하는 줄 알고 겁 없이 말을 했다가 혼이 났다. 그 후 두 사람 사이에서 민족 이야기가 다시는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일본에서 재일동포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지를 알게 해주는 일화다.

일본에서 장훈의 삶도 고단했다. 그와 가족은 히로시마 원폭 피해자. 가난한 어린 시절 불에 타 손가락 4개가 일그러진 오른손으로 야구를 했다. 프로 1년이 끝난 뒤 어머니 앞에서 “이 손가락만 제대로 됐어도 더 좋은 성적을 남길 수 있었을 텐데…”라고 중얼댔다. 그러자 어머니는 “엄마가 아들 손을 잘 살피지 않은 탓”이라며 통곡했다. 그 후 그는 동료 선수는 물론 자신의 가족에게조차 오른손을 드러내지 않았다.

은퇴 한참 뒤 요미우리 시절 감독에게 오른손을 보여주었다. 그러자 감독은 한순간 말문이 막히더니 “그런 손으로 어떻게…”라며 눈물을 흘렸다.

그런 고통을 겪은 탓인지 장훈은 지금도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좋은 나라다. 한 번도 한국인이라는 것을 숨긴 적 없는 삶을 살아왔다”라고 말한다. 그는 일본에 귀화만 했을 뿐 뼛속까지 영원한 한국인이다. 그의 고국에 대한 사랑, 고국 야구에 대한 헌신을 한국인들이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된다. 한국 야구인들이 배신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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