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아메리칸 드림은 이뤄진 거니?”
전화선 너머로 들려온 어머니의 목소리에 안성재 셰프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침묵 속에 묻어있는 부모님의 고생이 고스란히 전해져왔다. 차 한 대와 빈 통장으로 시작한 부모님의 이민 생활, 그리고 그 속에서 자라난 한 소년이 29년 만에 세계적인 셰프가 되어 고국에서 최고의 인기를 끌고 있다.
폭력과 가난 속에서 피워낸 꿈
최근 미국 유력지인 뉴욕타임스가 국내에서 유일한 미쉐린 3스타 셰프인 안성재(42)씨에 대한 기사를 홈페이지 첫 화면에 게재해 화제가 되고 있다.
13살의 나이로 미국에 도착한 소년은 양말과 티셔츠를 팔며 생계를 이어가야 했고, 부모님이 운영하는 중식당 일을 돕기도 했다.
한인들 사이의 총기 싸움이 벌어지는 혼란스러운 환경 속에서 청소년기를 보내야 했다.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싶다는 마음에 군대에 자원입대했고, 미국 동부와 유럽, 한국을 오가며 시야를 넓혔다.
이라크 전쟁터인 바그다드에서는 1년을 보냈고, 사담 후세인이 발견된 벙커 작전에도 투입됐다.
우연한 기회가 바꾼 운명
군 복무 중 모은 돈으로 포르쉐 정비공이 되겠다는 꿈을 안고 학교 입학을 앞둔 어느 날, 그의 인생은 180도 바뀌게 됐다.
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친 셰프복 차림의 요리학교 학생들의 모습에 이끌려 학교에 들어선 순간, 그는 자신의 진정한 꿈을 발견했다.
그날로 정비학교 등록금을 환불받고 요리의 길로 들어섰다. 첫날부터 생계를 위해 주방 보조 일을 시작했고, 고급 일식당에서는 월급도 없이 접시닦이부터 시작했다.
열정과 노력으로 2년 만에 주방을 총괄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추게 됐지만, 한국인임에도 일본인으로 오해받는 상황에 정체성의 혼란을 겪기도 했다.
그는 NYT와의 인터뷰에서 손님들이 자신을 한국인이 아닌 일본인으로 보는 듯한 느낌이 많이 불편했다 털어놨다.
그는 “그러한 것들이 날 많이 괴롭혔다”면서 “내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흉내내는 것처럼 느껴지는 상황이었다”라고 말했다.
세계가 인정한 한국인 셰프의 귀환
전환점은 우연히 찾아왔다. 미국 최고의 레스토랑 ‘프렌치 런드리’의 셰프가 그의 실력을 알아보고 스카우트한 것이다.
하루에도 천 통이 넘는 이력서가 쏟아지는 프렌치 런드리에서, 그는 미국 최고의 셰프 토마스 켈러 아래서 경험을 쌓았다.
나파밸리 와인밭 한가운데 있는 오두막에서 살면서도 꿈을 향해 달려갔다. 24세에 주방 보조로 시작한 그는 30세에 총괄 셰프가 됐고, 33세에는 샌프란시스코에 자신의 레스토랑 ‘모수’를 열었다.
개업 8개월 만에 미슐랭 1스타를 받으며 성공가도를 달렸지만, 2017년 많은 이들의 우려 속에 전격적으로 한국행을 선택했다.
고국에서 이룬 진정한 꿈
서울로 옮긴 ‘모수’는 놀라운 성과를 이뤄냈다. 2018년 미슐랭 1스타, 2019년 2스타를 거쳐 2022년에는 한국 유일의 3스타 레스토랑이 됐다.
이처럼 단기간에 3스타까지 오른 경우는 세계적으로도 매우 드문 일이었다.
이민을 떠나기 전 집 근처 코스모스 밭에서 보냈던 행복했던 시절을 기억하며 지은 ‘모수’라는 이름처럼, 그의 요리에는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과 자부심이 깊이 스며들어 있다.
최근까지도 무명에 가까웠던 그는 넷플릭스 요리 프로그램 ‘흑백요리사’에 심사위원으로 출연하며 대중적 인지도도 얻게 됐다.
뉴욕타임스는 “그의 아메리칸 드림이 궁극적으로 실현된 곳은 그의 모국이었다”면서 “그가 떠난 사이 한국은 음악과 예술, 텔레비전, 음식 분야의 세계적 강국으로 탈바꿈했다”고 평가했다.
어린 시절 할머니의 궁중요리를 보며 자란 소년은 이제 세계가 주목하는 셰프가 되어 한국 요리의 위상을 높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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