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업계가 연구개발(R&D) 인력의 주 52시간 근무를 예외적으로 적용하기 위한 제도 개선에 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반도체 산업의 글로벌 경쟁이 치열해지는 가운데 초격차 기술 확보 등 경쟁력 제고를 위해 52시간 족쇄를 푸는 제도적 뒷받침이 필요하다는 시각에서다.
블룸버그는 최근 AI 반도체 시장을 주도하는 미국 엔비디아 직원들이 종종 새벽 1~2시까지 일하면서 주 7일 근무도 한다고 보도했다. 대만 TSMC 연구개발팀은 하루 24시간 3교대를 통해 릴레이식으로 연구가 이어지도록 하는 시스템을 갖춘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과 일본이 시행하는 ‘화이트칼라 이그젬션(고연봉 관리·전문직 근로시간 규제 적용 제외)’는 최근 업계의 관심이 높은 노동시장 유연화 정책이다.
미국은 고위관리직·행정직·전문직·컴퓨터직·영업직에 해당하면서 주 684달러 이상을 버는 근로자, 연 10만7432달러(1억5000만원) 이상 고소득 근로자를 근로시간 규제에서 예외로 둔다.
일본은 ‘고도 프로페셔널 제도’를 통해 금융상품 개발·자산 운용·유가증권시장 분석·컨설팅·연구개발(R&D) 등 다섯 가지 업종 근로자 중 근로소득이 연 1075만엔(9750만원) 이상이면 근로시간 및 초과근로수당 등 규제를 적용하지 않는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는 간담회와 발표회 등을 통해 R&D에 유연한 근로시간 제도가 필요하다는 데 공감하고 목소리를 냈다.
한국반도체산업협회는 11월 28일 경기 평택 삼성전자 평택공장에서 ‘한국 반도체 다시 날자’를 주제로 정부·기업 초청 간담회를 열었다.
김정회 한국반도체산업협회 부회장은 “최근 젠슨 황 엔비디아 CEO가 한국 기업에 ‘HBM을 더 빨리 만들어 줄 수 없냐’고 얘기할 정도로 기술 발전 속도가 매우 빠르고 제품 개발에 훨씬 많은 인력이 필요하다”며 “후발주자인 한국이 미국과 일본을 쫓아갈 수 있었던 건 속도였는데 지금은 속도를 장점이라고 말할 수 있겠나”라고 말했다.
업계는 난이도가 높은 반도체 연구개발은 높은 수준의 전문성과 집중력이 요구되는 점, 고객사의 발주량 변화나 품질 이슈에 따라 업무량 변동이 잦은 특성이 있는 점을 지적했다. 또 연구를 30분만 더하면 되는 상황에 장비 전원이 꺼져 다음 날 다시 2시간 동안 장비를 세팅하면서 연구가 지연되는 등의 현장 사례도 소개했다.
남석우 삼성전자 사장은 “급변하는 글로벌 시장 환경과 국가간 치열한 경쟁 속에서 우리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해 있다”며 “앞으로도 지속적인 협력과 지원을 부탁한다”고 말했다.
18일 열린 한국공학한림원 ‘반도체특별위원회 연구결과 발표회’에선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업계 1위 대만 TSMC의 모델을 벤치마킹한 ‘KSMC'(Korea Semiconductor Manufacturing Company)를 만들자는 산·학계의 제안이 나왔다.
이 자리에서 반도체 산업 경쟁력 강화를 위해 주 52시간 제도 완화 필요성이 언급됐다.
안현 SK하이닉스 개발총괄 사장은 이날 ‘주 52시간이 근무에 큰 걸림돌이 되냐’는 물음에 “TSMC 출신에게 들었는데 엔지니어 관점에서 보자면 반도체 개발은 가속이 붙어서 관성이 있어야 한다”며 “주 52시간이 좋은 제도지만 개발이나 특수활동에 있어서는 조금 부정적인 습관이나 관행을 만들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반도체특위 공동위원장인 곽노정 SK하이닉스 대표이사(사장)는 “그동안 통상적으로 대기업에 설비투자를 지원하고 (소부장 업체가) 낙수효과를 보는 식으로 해오고 있었다”며 “이제는 그 반대로 직접 소부장 업체에 지원하고 이를 통한 연구개발(R&D) 경쟁력 확보로 전체 생태계 확장을 하는 방식인 ‘분수효과’도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이광영 기자
gwang0e@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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