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회를 시작할 때면 “우리는 성별·성적지향·성별정체성·장애·연령·국적 등에 관계 없이 모두가 동등한 참여자”라고 적힌 ‘평등한 집회를 위한 모두의 약속(평등 약속)’이 광장에 울려 퍼졌다. 집회 중 시민들은 케이팝(K-POP)과 민중가요에 맞춰 다양한 색의 응원봉을 흔들며 탄핵을 촉구했다. 그 사이를 누비는 자원봉사자들은 인원 분산과 통행로 확보를 통해 안전한 집회를 만들고자 힘썼다. 여의도 인근의 ‘선결제’ 매장 앞에는 시민들이 길게 줄을 섰고, 다른 매장에서 일하는 서비스 노동자들도 여느 때보다 바쁜 하루를 보냈다.
평등, 음악, 안전, 노동. 지난 14일 200만 명이 모인 윤석열 대통령 탄핵 촉구 집회(탄핵 집회)를 뒷받침한 요소들이다. 그 덕분에 우리는 ‘12.3 비상계엄 사태’ 이후의 광장을 절망이나 분노만으로 기억하지 않을 수 있게 됐다. 저절로 이뤄진 것이 아니다. 집회의 주인공인 시민들 뒤편에 누구도 소외받지 않는 평등하고 안전한 집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 이들이 있었다. 광장의 변화를 위해 고민하고 애쓴 그들의 이야기를 정리했다.
탄핵DJ “청년세대는 민중가요, 기성세대는 아이돌 음악 틀어달라더라, 감동적”
“국민의힘 의원들이 국회 본회의장에서 집단 퇴장하면서 탄핵 표결에 필요한 정족수가 부족한 상황이 되니, 현장 분위기가 엄청 무거웠어요. 비장한 분위기가 흘렀죠. 무대 공백도 있었어요. 주최 측이 모여 집회를 어떻게 이어갈지 회의를 시작했어요. 그런데 응원봉을 든 20대 여성 중심의 시민들이 일몰시간이었으니까, 반짝반짝 빛을 내면서 밀려오는 게 보였어요. 예전 같으면 비장하게 집회를 해야 할 타이밍이었는데, 그분들을 보면서 ‘이 싸움은 질 수 없는 싸움이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자신감 있게 ‘다만세(소녀시대 ‘다시 만난 세계)’를 틀었죠.” – 김지호 ‘윤석열 즉각 퇴진·사회대개혁 비상행동(비상행동)’ 행사기획팀장
지난 7일 오후 5시. 윤 대통령 탄핵소추안 첫 국회 표결 무산이 예견되던 순간에 대한 김지호 비상행동 행사기획팀장의 회상이다. 이후 밤 9시 20분경 국민의힘 의원들이 끝내 본회의장으로 돌아오지 않아 탄핵 표결이 무산될 때까지 시민들은 ‘삐딱하게’, ‘그대에게’, ‘위플래쉬’ 등 떼창하며 한겨울 추위 속에도 자리를 떠나지 않고 탄핵을 촉구했다.
이후 매일 국회 앞에서 이어진 탄핵 집회에서 K-POP은 광장에 있는 모두를 독려하는 힘을 발휘했다. 그 뒤에는 많은 사람이 알고 함께 부를 수 있는 익숙한 노래를 선곡하려는 주최 측의 노력이 있었다. 호응이라도 하듯 ‘탄핵 플레이리스트’ 구글 설문에는 2만여 명의 시민이 참여했다. 청년층은 “중장년이 좋아하는 노래”나 “민중가요”를 틀어달라고 부탁하고, 기성세대는 “아이돌 음악”을 많이 틀어달라고 요청하며 서로 배려하는 모습을 보인 것도 김 팀장은 감동적이었다고 밝혔다.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문화국장, 서울민예총 사무처장 등으로 일하며 긴 시간 집회 문화의 변화를 고민해온 것도 김 팀장이 ‘다만세’를 튼 선택의 배경으로 작용했다. 그는 “무겁고 엄숙한 분위기의 집회로는 다양한 시민이 함께하기 어려울 것 같다는 고민이 있었다”며 “11월 초 (윤 대통령 탄핵 집회)부터 캠핑차에 다는 백열전구를 행진차에 달고, 구호를 야구장 구호 형식으로 바꾸고, 개사곡도 만드는 등 변화를 시도해왔다”고 밝혔다.
행사기획팀 “朴 탄핵 광장에서 성차별과 싸웠던 기억에 ‘평등 약속’ 준비”
“5.18을 겪은 시민 분의 평일 집회 발언을 듣고 지난 14일(토요일) 집회 무대에서도 발언해주셨으면 해 부탁드렸어요. 그런데 평일 집회 발언 때 ‘정신병자’라는 단어를 사용하셔서, 섭외 요청을 드리면서 ‘다양한 사람이 함께 하고 있으니 그런 표현은 지양해 주셨으면 좋겠다’고 부탁드렸어요. 그러자 그 분께서 14일 발언에서는 ‘다양한 시민이 함께하고 있다’는 메시지까지 담아주셨어요. 감동적이었어요.” – 비상행동 행사기획팀 신혜정 한국여성민우회 활동가
이번 탄핵 집회에서 자유발언 가운데에는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 노동자, 이주민 등 이른바 ‘소수자’ 혹은 ‘약자’로 여겨지는 이들이 유독 많이 호명됐다. 집회 시작 전 시민들은 ‘정체성에 관계 없이 우리 모두는 동등한 참여자’라는 내용의 ‘평등 약속’을 함께 소리 내며 읽기도 했다. 평등한 집회를 만들기 위한 활동가들의 노력 덕택이었다.
신혜정 활동가는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집회 당시 성추행 사건도 있었고, 무대 위에서도 성차별적 발언이 나와 페미니스트 시민들이 집회에도 참여하고 성차별과도 싸워야 했던 기억이 있다”며 “이번 집회는 여성, 장애인, 청소년, 이주민 등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시민들에게 안전하고 열린 집회가 되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주최 측이 ‘평등 약속’을 준비했다”고 밝혔다.
자유발언에 나선 한 시민이 자신의 말을 수정했듯 ‘평등 약속’도 진화 중이다. 14일 집회에서 한 단체가 윤 대통령 탄핵을 기원하며 풍선을 날려보냈는데, 이에 대해 기후위기나 해양생물들에게 안 좋은 영향이 있을 것이라는 지적이 있었다. 해당 단체는 문제제기를 즉각 수용했고, 주최측도 ‘환경 집회 약속문(가칭)’을 고민 중이다. 신 활동가는 ‘평등 약속’은 “완성된 약속문”이라기보다는 모두 함께 만들어 가는 것이라며 “광장의 운영이 민주적일 때 우리들의 이야기도 민주적일 수 있다”고 강조했다.
질서유지팀 “자원봉사자들이 탄핵 가결에도 마냥 기뻐할 수는 없었던 이유는…“
“14일 탄핵안 가결이 돼서 저도 눈물이 날 것 같았는데 울 수만은 없었어요. 탄핵이 되자마자 국회 근처 무대 앞에 있던 시민들이 집회 장소를 빠져나가기 시작했어요. 반대로 무대와 멀리 있던 여의대로에 있는 많은 시민은 무대를 보러 국회 방향으로 오고 있었어요. 기쁜 마음과 안도하는 마음 사이로 인파 관리가 안 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겹쳤어요. 무전기를 들고 통행 관리에 주의해달라고 질서유지 자원봉사자 분들에게 계속 연락했죠.” – 비상행동 자원봉사단 담당 우동희 한국진보연대 정책국장
지난 14일 탄핵 집회에서 눈에 띈 점 중 하나는 집회 장소 바닥에 앉을 자리를 표시해 둔 안전테이프였다. 시민들이 앉아있는 구역 사이에서는 질서유지팀 자원봉사자들이 서서 통행로를 확보하고 시민들에게 이동을 부탁했다. 300여 명으로 이뤄진 자원봉사단과 관련한 업무는 비상행동에서 활동하는 우동희 정책국장이 맡았다.
우 정책국장은 14일 집회 본행사 시작 5시간 전인 오전 10시부터 자원봉사자들이 집회 장소에 모여 도로 바닥에 앉을 수 있는 자리와 통행로를 구분하는 테이프를 붙였다고 말했다. 집회 중 곳곳에 배치된 자원봉사자들은 인파 관리를 위해 노력했다. 통행로를 확보하고 무전 등으로 정보를 공유하며 사람이 덜 몰린 곳을 파악해 해당 장소로 시민들에게 이동을 부탁하는 것이 주된 일이었다.
우 정책국장은 “그동안 큰 사고가 없이 집회가 진행돼 너무 다행”이라며 앞으로도 탄핵 집회가 안전하게 진행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그는 향후 집회 진행과 관련해선 “많은 사람이 광화문에 모이면, 광화문광장 개방이 필요해질 수도 있다”며 그럴 경우 서울시가 “광화문광장 집회를 허가하면 안정적인 공간을 확보할 수 있어 더 안전하게 집회를 진행할 수 있을 것”이라며 서울시의 전향적 입장을 촉구했다.
여의도 일대 서비스 노동자에게 작은 위로를 전한 이들
“7일 탄핵 집회에 100만 명이 모였잖아요. 그 다음 주 집회에도 100만 명이 넘게 모일 거라는 기사가 많았고요. 7일 여의도에서 서비스 노동자들이 고생하는 걸 봤거든요. 이 분들을 독려하기 위한 캠페인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서비스 노동자들 고맙습니다’ 캠페인을 준비했어요.” – 장종수 온라인노동조합 사무처장
최근 2주간 여의도 일대에서 가장 바빴던 이들은 편의점, 카페, 식당 등에서 일하는 노동자였을지도 모른다. 실제 7일 여의도 인근 편의점들은 물품이 모두 팔려 텅 빈 매대를 드러냈고, 문 연 카페와 식당들은 손님들로 가득했다. 편의점이나 식당에서 앉을 장소를 찾지 못해 거리에 앉아 컵라면으로 허기를 채우는 시민들도 있었다.
직장갑질119와 온라인노조는 이에 주목해 14일 여의도 일대에서 ‘서비스 노동자들 고맙습니다’ 캠페인을 벌였다. 서비스 노동자들에게 감사함을 표하는 문구를 적은 현수막을 집회 장소 인근에 붙였다. 근처 매장을 돌며 “시민들을 위해 맛있는 음식과 따뜻한 장소를 내어주신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라고 적은 위로 엽서도 전했다.
장종수 사무처장은 위로 엽서를 돌릴 때도 노동자들이 “중간에 엽서를 볼 새도 없이 너무 바쁘게 일하고 계셨다”며 “나중에 보시고라도 위로를 받으실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 사장님들도 노동자들의 노고에 대해 한번 더 생각해주셨으면 하는 마음에서 엽서를 돌렸다”고 밝혔다. 아울러 시민들에게는 이번 탄핵 집회를 떠올릴 때 “서비스 노동자들의 노고도 기억해 줬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윤 대통령 탄핵 집회를 뒷받침한 이들의 마지막 당부는 똑같았다. 이들은 “아직 ‘12.3 비상계엄 사태’를 주도한 윤 대통령의 탄핵이 확정된 것도, 처벌받은 것도 아니”라며 “계속 이 문제에 관심을 갖고, 앞으로도 집회에 많은 시민이 모였으면 한다”고 한목소리로 말했다. 시민들이 광장에 모이는 한 누구도 소외받지 않는, 평등하고 안전한 집회를 만들기 위한 이들의 노력도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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