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위크|여의도=이미정 기자 윤석열 대통령 탄핵 소추안이 14일 국회를 통과했다. 현직 대통령에 대한 탄핵안이 국회를 통과한 건 헌정사상 세 번째이자 2016년 12월 박근혜 전 대통령 이후 8년 만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12·3 비상계엄’ 사태 11일 만에 모든 직무가 정지되고 탄핵 심판대에 서게 됐다.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로 촉발된 이번 사태는 경제·사회·외교·정치 전반에 큰 충격을 줬을 뿐 아니라, 민주주의의 근간을 뒤흔드는 초유의 사건이다. 다만 한국은 위기 속에서도 빠르게 민주주의 회복 탄력성을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이번 탄핵 촉구 집회에서 나타난 시위문화 양상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는 평이다.
◇ K-팝 응원봉, 비폭력·연대 상징으로… 젊은층, 새로운 집회 문화 주도
전 세계 주요 외신은 대통령 탄핵안 가결 소식을 신속하게 보도하면서 대통령 탄핵 촉구 시위를 집중 조명했다. AP통신은 14일(현지시각) ‘K-Pop 응원봉이 한국 대통령 탄핵을 촉발한 시위를 장악했다’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계엄령 선포 이후 윤 대통령 축출을 요구하는 시위에 K팝 응원봉, 크리스마스 조명, 심지어 산타클로스 복장까지 등장했다”며 “윤 대통령의 12·3(계엄)령은 대규모 시위를 촉발했고 독특한 시위 문화가 주목받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어 “젊은 시위대는 전통적으로 음악 콘서트에만 사용되던 K팝 응원봉을 들고 거리를 점령해 반대 의사를 표명하고 정치적 시위의 새로운 트렌드를 만들기 시작했다“며 ”은행가들로 가득했던 국회의사당 앞 여의도 금융가가 빛의 바다로 변모했다”고 전했다.
워싱턴포스트, BBC, 가디언 등 주요 외신들 역시 기존의 정치 시위의 다른 한국의 대통령 탄핵 촉구 시위 문화를 자세히 보도했다. 워싱턴포스트는 “다양한 연령대의 시민들이 응원봉을 흔들고 노래를 부르는 시위는 정치 시위가 아닌 K팝 콘서트처럼 느껴졌다”고 평했다.
또한 워싱턴포스트는 젊은 여성을 중심으로 한 K-팝 팬들이 이번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그들의 중심으로 새롭게 확산된 집회 문화도 조명했다.
특히 응원봉은 이번 시위에서 촛불을 대체하며 새로운 비폭력과 연대의 상징으로 부상하면서 외신의 큰 주목을 받았다.
이날 서울 여의도에서 열린 탄핵 찬성 집회에는 주최 측 추산 200만명(경찰 신고 집회 인원 20만명)의 구름떼 인파가 몰려들었다. 어린아이부터 청년, 중장년, 노인까지 다양한 연령층이 국회를 상대로 탄핵 찬성 목소리를 외치기 위해 한자리에 모였다.
집회 분위기는 과거의 박근혜 정권 탄핵 촛불집회와는 사뭇 달랐다. 주로 민중가요가 흘러나오며, 엄숙한 분위기가 감돌았던 과거 집회 때와 달리, 다양한 K-팝 노래나 대중가요가 흘러나오면서 분위기를 흥겹게 달궜다.
집회 중간중간 MZ세대(1980~2004년생) 세대들에게 익숙한 소녀시대, 지드래곤, 에스파 등 K-팝 가수의 노래들이 탄핵 촉구 구호에 맞춰 흘러나왔다.
여기에 김연자의 ‘아모르파티’ 등 중장년층에 친숙한 대중가요와 ‘임을 위한 행진곡’ 등의 민중가요도 등장하며 다양한 세대가 함께 어우러지는 모습이 연출됐다. 이들은 탄핵 촉구 팸플릿이나 가지각색 응원봉을 들고 한목소리를 냈다.
◇ 젊은층부터 노년층까지… 세대간 통합 이끈 K-집회
시민들의 탄핵 촉구 목소리는 결국 이날 탄핵안 가결을 이끌어냈다. 탄핵안은 재석 의원 300명 중 찬성 204표로 가결됐다. 1차 투표와 달리, 여당 의원이 전원 표결에 참여한 가운데 일부 여당 의원 중 찬성투표를 던진 이들이 나타나면서 가결로 이어졌다. 여당 일부에서 이탈표가 나타난 데는 시민들의 대규모 탄핵 촉구 시위가 영향을 준 것으로 풀이된다.
이번 탄핵 촉구 시위는 평화적인 방식으로 질서 있게 진행됐다는 점에서 성숙한 시민의식이 빛났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시위 현장에선 집회 참여자를 위한 물품 기부나 선결제 문화가 확산된 바 있다. 많은 인파에 따른 안전사고를 막기 위해 시민들은 안전관리 요원의 안내에 따라 질서 정연하게 움직이기도 했다.
특히 정치에 무관심하다고 여겨지던 MZ세대들이 이번 시위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새로운 시민문화를 만들었다는 점은 고무적이다. 워싱턴포스트는 조앤 조 미국 웨슬리언대학 동아시아학 교수의 분석을 인용해 “젊은 세대의 민주주의에 대한 이러한 참여와 헌신은 한국 민주주의 미래에 대한 희망적인 신호”라고 전하기도 했다.
이날 집회 현장에서 만난 임경란(52) 씨는 젊은 세대층의 참여와, 바뀐 집회 문화에 대해 “너무 좋았다”며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서울 종로구에서 나고 자란 뒤 대학 시절부터 다양한 시위에 참여 본 경험이 많다는 임경란 씨는 여고동창생 2명과 함께 이날 시위 현장을 찾았다.
◇ “이전 집회와는 달라, 다정한 연대 힘 느껴”
그는 “8년 전 광화문 탄핵 집회 때와 비교하면 많이 달라진 것 같다”며 “소통 방식과 시위 문화에 있어 새로운 패러다임이 만들어진 것 같다”고 평했다. 임경란 씨는 “젊은 친구들에게 이러한 불안한 상황을 겪게 한 것에 대해 미안한 마음이 컸다”면서 “이 친구들이 그들만의 방식으로 새로운 시위 문화를 이끌어가는 모습이 너무 좋고 고맙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번 사태를 계기로 젊은 친구들이 시민 참여를 통해 무언가 바꿔 갈 수 있다는 효능감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30대 직장인 김미영(가명) 씨도 이번 시위에서 세대간 통합이 이뤄지는 모습을 보며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말했다.
김미영 씨는 “저보다 어린 친구들이 나와서 응원봉을 흔드는 것을 보고 감명을 받았다. 그리고 나이가 많으신 분들이 집회에 흘러나오는 K-팝 노래를 함께 따라 부르기 위해 가사를 외우려고 노력하는 모습도 인상 깊었다. 반대로 어린 친구들은 잘 모르는 민중가요를 공부해서 부르기도 했다. 우리 사회가 (세대간 및 성별 간) 갈라치기가 심화되고 있었는데 이번 집회 현장에선 모두가 한마음이 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는 책 제목처럼, 사랑이나 따뜻한 행동이 힘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을 이번 집회 현장에서 느꼈다”고 답했다.
듀크대학교 진화인류학 교수인 브라이언 헤어 등이 쓴 저서인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는 ‘다정함’과 ‘연대’가 인류의 진화와 번영의 관점에서 어떠한 역할을 해왔는지를 연구한 책이다.
‘응원봉’으로 대표된 이번 시위가 새로운 평화 집회 문화를 만들어낸 가운데, 시민사회의 정치 참여 양상에 대한 변화로 이어질 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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