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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의 기원 [김다은의 웹소설] <17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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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의 기원 [김다은의 웹소설] 17회
종의 기원 [김다은의 웹소설] 17회
연합뉴스

17. 조가대(弔歌隊)의 여자

죽음을 실감할 수 없는데, 조문객을 맞이하는 것은 무서운 일이었다. 아파트에서 1주일간 뒹굴며 거의 먹지 않았기에 기운이라고는 없었고, 대담장에서 도망친 뒤 자존감이 떨어져 정신적으로도 피폐해져 있었다. 가만히 서 있어도 다리와 심장이 후들후들 떨렸다. 장례식장에 허용된 동 시간대 99명의 조문객은 마치 전쟁터에서 훈련받은 전사들처럼, 한결같이 하얀 꽃을 영정 앞에 놓고 예의 바르게 나에게 목례를 했다. 하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죽음의 조문객들이 줄지어 왔다가 사라지는 모습은 마치 깨지 못하는 악몽처럼 반복되었다.

기독교식 장례식이라 다행히 무릎을 꿇지 않아도 되었다. 길가에 떨어져 죽은 참새 한 마리도 내 가슴을 쓰리게 하는데, 아버지의 죽음을 실감하지 못하는 무감각한 상태에서 이런 반복적인 시간을 얼마나 더 견딜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슬픔을 느끼지 못한 채 견디는 것도 힘들지만, 진정한 슬픔이 몰려오면 이곳에 서 있는 것조차 불가능할 것 같았다. 갑자기 성난 짐승처럼 인내의 끈을 끊고 도망치게 될까 봐 공포감이 엄습하곤 했다.

밤 3시가 넘어 빈소에 조문객들이 끊겼을 때, 나는 벽에 기대어 간신히 주저앉았다. 그때까지 한쪽 무릎을 절면서도 꿋꿋하게 사람들을 맞이하던 어머니가 나를 보고 서두없이 말을 건네셨다.

“올림픽 선수가 자기 과녁이 아닌 라이벌 과녁에 총을 쏘면 어떻게 되겠니?”

아무래도 어머니가 잠시 실성한 것이 분명했다. 여태 아버지의 죽음을 너무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어머니가 수상쩍었다. 겉으로 아무렇지 않게 보일수록 내면의 고통은 더 크게 느껴지는 법이다. 입관식 때 내가 무의식적으로 소설 속 대사를 큰소리로 내뱉었던 순간처럼, 어머니도 그런 혼란스러운 상태를 지나고 있는 모양이었다. 어머니가 나에게 했던 것처럼 혼란 상태를 자연스럽게 넘어갈 수 있도록 도와드리고 싶었다. 연로한 몸이 생각보다 작고 더 많이 구부러져 보여, 그 모습이 더욱 애처로웠다.

“올림픽에서 그런 실수를 범하다니, 귀신이라도 홀린 모양이네요.”

어머니의 슬픔이 왜 올림픽 과녁으로 빗나갔는지 그 맥락이 궁금해졌다. 나는 조심스레 해명하며 반문했다.

“입관식 때 제가 엉뚱한 말을 한 건 톨스토이의 단편소설 속 ‘관’에 관한 이야기를 떠올렸기 때문이었어요. 견디기 힘든 마음이 다른 생각으로 흐르고, 그게 무의식적으로 나왔던 거죠. 어머니도 그런 상태인 거죠?”

어머니는 부드럽고 강직한 표정으로, 마치 아버지가 빙의된 듯 말했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 있었던 일이란다. 남자 50m 소총에서 금메달 후보는 미국의 매슈 에먼스 선수였는데, 그가 마지막 1발을 오스트리아 경쟁자 과녁에 쏴버렸다. 선두를 달리던 에먼스는 결국 8위로 추락했지. 아버지께서 병원에서 이 황당한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아버지가 왜 그런 이야기를 하셨는지, 그 상황이나 맥락이 기억하시나요?”

“너도 과녁을 잘못 알고 쏘고 있다고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나는 짚이는 것이 있어서 물었다.

“혹시 아버지가 제 서울국제도서전 대담 영상을 보셨나요?”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본 것이 그 대담이었지.”

온몸에 온기가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아버지, 도와주세요’라고 외쳤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버지의 온화한 영정사진이 보였다.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아 가슴을 부여잡았다. 은퇴 후에야 아들의 일을 제대로 챙겨보셨던 아버지가, 아들이 가장 비참하게 무너지는 날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보셨다는 사실이 고통스러웠다. 내가 책의 표지 문구 한 줄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세계적인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채 대담을 이어가는 모습을 보며, 평생 외교관으로 살아온 아버지가 얼마나 부끄럽고 민망하셨을지 상상할 수 있었다.

“프랑스 작가가 인간을 ‘종’으로 만드는 가장 강력한 것이 죽음이라고 했을 때, 아버지는 말없이 눈물을 흘리셨다. 죽음이 두려워서 우신 건 아니야. 그 작가가 죽음의 종에 대해 이야기할 때, 네가 ‘공갈 아기’로 대응하는 모습을 보고 우신 것 같았어. 죽음을 알지 못하니 생명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한다고 하셨지.”

어지러움이 밀려왔다. 아버지를 죽음으로 이끈 결정적인 원인은 지병이 아니라, 내가 대담에서 보여준 진정성 없는 모습이었던 것 같았다. 죽은 대담, 그리고 진정 죽음을 알지 못하는 죽음의 종! 프랑스 작가가 우리 모두 썩어갈 것이라 말했을 때, 내 안에서 일었던 작은 떨림이 다시 느껴졌다. 나는 어머니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내 어설픈 대답이 어머니까지 충격에 빠뜨릴까 봐 말을 잇지 못했다.

“눈물을 흘리시고 나서 뜬금없이 올림픽 이야기를 꺼내시길래, 그저 그런가 보다 했어. 아버지께서 가끔 치매 증상도 보였으니까. 그런데 그 말을 하고 나서 쓰러지셨지.”

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내 몸을 조여왔다. 나는 비로소 아버지가 떠났다는 사실과 더 이상 아버지와 어떤 대화를 나눌 수 없다는 현실을 마주했다. 아버지의 얼굴을 다시는 볼 수 없고, 목소리도 다시는 들을 수 없다는 무서운 사실에 직면했다. 영정 뒤에서 우리의 대화를 들을 수 없는 아버지가 느껴지자 고통과 공포가 이루 말할 수 없이 깊어졌다.

“왜 과녁을 비껴간 올림픽 선수의 이야기를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하셨는지는, 나도 정확히 알 수 없구나.”

나는 달아나고 싶었다. 내가 구역질을 하는 것을 보고 어머니가 나를 식탁으로 데려갔다. 뭔가를 먹이시려고 했다. 그때 저쪽 테이블에 앉아있던 여자가 어머니를 보고 우리 자리로 왔다. 입관식에서 보았던 여자였다. 아직 돌아가지 않고 있었다. 어머니가 그녀를 소개했다.

“아버지와 내가 다니는 교회의 조가대에서 왔어.”

“조가대라면?”

“장례식장에서 고인을 위해 노래하는 합창단이야.”

어머니는 사람들 앞에서는 나에게도 항상 존댓말을 사용하셨다. 코로나로 장례식장에서 찬송가를 부를 수 없었다. 조가대의 존재가 이 자리에서 무슨 의미가 있는지 묻고 싶었지만, 그런 기운이 나지 않았다. 어머니는 내 마음을 알아채고 그 의미를 설명했다.

“저들은 영혼으로도 노래를 부를 수 있어요.”

어머니는 음식을 챙기러 자리를 떴다. 어머니가 왜 이 여인과 나의 자리를 마련했는지 이상했지만, 깊이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그녀는 아버지의 조문객일 뿐이었다. 그 여자의 손에 들린 책을 보니, 입관식에서 내가 놓고 온 책이었다. 하얀 가죽 표지였다.

“『인공낙원의 문』의 표지 문구의 출처가 바로 이 책이에요.”

“아! 당신은….”

여자가 누구인지 깨달았다. 김아리랑 팀장을 대신해 대담장에 왔던 노랑머리가 흑발로 나타나서 알아보지 못한 것이다. 흔히 자신의 책을 읽어달라고 무리하게 책을 보내오거나 부탁하는 사람이 있었다. 여자가 입관식에서 책을 건넸을 때는 이곳까지 찾아와서 책 홍보를 부탁하는가 싶어서 모르는 척 그곳에 두고 나왔다. 지레짐작으로 괘씸하게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 여자가 그녀였다. 대담장을 도망 나온 나의 실책을 자신의 것으로 덮어썼던 바로 그 여자!

▶다음 회에 계속 …

종의 기원 [김다은의 웹소설] 17회
종의 기원 [김다은의 웹소설] 17회

김다은은 ‘당신을 닮은 나라’가 1995년 제3회 국민문학상을 수상하면서 소설가로 등단했다. ‘덕중의 정원’ ‘훈민정음의 비밀’ ‘쥐식인 블루스’ 등 20여권 소설책을 출간하고, 다수 번역돼 해외 소개됐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주관한 폴란드 바르샤바대학 작가 레지던시를 비롯, 청송 객주 문학관, 정선 여량면 아우라지 레지던시, 해남 인송문학촌 토문재 레시던시에 참가했다. 이화여대 불어교육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파리8대학에서 불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추계예술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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