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은 12일 대국민담화에서 계엄 발동은 ‘고도의 통치행위’라며 ‘내란죄’ 혐의를 전면 부인했다. 오히려 12·3 군사계엄 당시 국회 소집을 방해하지 않고 소규모 군을 투입시키는 등 피해를 최소화하려고 노력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들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
내란 아닌 고도의 통치행위?
앞서 지난 11일 윤상현 국민의힘 의원도 1997년 대법원 판례를 언급하며 ‘비상계엄은 고도의 정치행위로 본다’고 주장했다. 윤 대통령과 윤상현 의원의 주장은 1997년 신군부측이 상고심에서 1980년 5·17 비상계엄 전국 확대가 ‘고도의 정치적 행위’라며 사법심사 대상이 아니라고 한 것과 일맥상통한다.
1997년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대통령의 비상계엄의 선포나 확대 행위는 고도의 정치적·군사적 성격을 지니고 있는 행위”라고 판단한 건 사실이다. 그러나 “비상계엄의 선포나 확대가 국헌 문란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행해진 경우, 법원은 그 자체가 범죄 행위에 해당하는지의 여부에 관해 심사할 수 있다”고 했다. 즉 ‘국헌문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계엄은 ‘고도의 통치행위’로 보기 어렵다.
대법원은 국헌문란의 목적은 “외부적으로 드러난 행위와 그 행위에 이르게 된 경위 및 그 행위의 결과 등을 종합해 판단한다”고 했다. 12·12 군사반란의 경우 정보기관 장악, 비상계엄 전국확대, 국회의사당 점거 및 폐쇄, 정치활동 규제 등을 ‘국헌문란’의 목적을 가진 행위이자 ‘국헌문란’으로 판단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선포한 12·3 비상계엄의 경우도 문제가 될 소지가 크다. 우선, 계엄군은 중앙선거관리위원회와 국회에 침투했는데 헌법과 계엄법에는 계엄사령부가 국회와 선관위의 업무를 관장하거나 제한할 수 있다는 규정이 없다. 국회의원들의 진입을 막고, 체포를 하려 했다는 점도 ‘국헌문란’ 소지가 있다.
국회 표결 안 막았다?
윤석열 대통령은 담화를 통해 국회 소집을 방해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이는 내란죄 적용 대상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언급한 것으로 보이는데 군과 정보당국의 증언과는 차이가 크다.
홍장원 국가정보원 1차장이 지난 7일 비상계엄 체포 명단을 공개해 계엄군이 국회의원 체포를 하려 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명단에는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 조국 조국혁신당 대표, 우원식 국회의장 등 주요 정치인들이 포함됐다. 군이 경찰까지 동원해 체포조를 운영하려 한 사실도 드러났다. 11일 한겨레는 국군방첩사령부(방첩사)가 경찰청 국가수사본부에 ‘국회의원 체포조’로 수사인력 100명 파견을 요청한 사실을 단독 보도했다. 계엄군은 국회의원 체포에 이어 구금까지 준비한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다.
대통령이 직접 국회 표결을 저지하려 했다는 증언도 있다. 곽종근 전 특전사령관은 지난 10일 국회 국방위원회 전체회의에 출석해 “(지난 3일 밤) 대통령께서 제게 직접 비화폰으로 전화했다”며 “의결 정족수가 아직 안 채워진 것 같다. 빨리 문을 부수고 들어가 안에 있는 인원을 끄집어내라고 말했다”고 밝혔다.
국회의원의 국회 진입을 방해하지 않았다는 주장도 사실과 다르다. 당초 경찰은 국회의원, 국회 직원, 당직자, 보좌진 등은 신분 확인 후 입장시켰으나 오후 11시부터는 국회의원의 출입도 불허했다. 당시 현장의 경찰은 항의하는 국회의원들에게 “11시부터는 국회의원도 들여보내지 말라는 지시가 있었다”고 밝혔다.
지난 11일 경찰 국가수사본부 특별수사단이 조지호 경찰청장과 김봉식 서울경찰청장을 긴급체포한 사유도 ‘위법적 국회 통제’를 했기 때문이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조지호 경찰청장은 특별수사단 조사에서 계엄 선포 직후 국회 통제는 자신의 지시였고, 박안수 당시 계엄사령관의 요청에 따랐다고 진술했다.
일부러 소수 부대만 투입?
윤석열 대통령은 극소수의 부대만 투입했고 임무도 질서유지였기에 문제 없다는 취지의 주장을 반복했는데 이 역시 따져볼 필요가 있다. 당일 투입된 부대가 소수이긴 하지만 707특임대 등 이른바 특수 정예부대라는 점, 군 지휘관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들 부대가 지시 받은 내용이 ‘질서유지’가 아니라는 점을 고려하면 인명사고가 발생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오히려 현장에선 명령대로 이행하면 인명사고가 발생할 수 있어 사실상 항명을 이어갔다는 증언도 있다.
당일 소수의 부대만 투입될 수밖에 없는 여건도 있다. 사전에 알려질 경우 작전이 실패로 돌아갈 가능성이 높고, 현대 사회에선 대규모 병력 이동에 제한이 있다.
2004년 「월간중앙」 9월호 ‘군은 청와대를 어떻게 보나’ 기사에서 현역 사단장은 “이제 한국에서 군사 쿠데타는 영원히 불가능하다”고 단언했다. 그 이유는 “설사 모의가 성공했더라도 거사로 이어지기 어렵다. 특정 부대, 특정 집단의 일거수일투족이 사람들에 의해 순식간에 세상에 알려지기 때문”이라며 “중앙으로 치고 들어오려고 해도 교통체증 때문에 이동이 어렵다”고 했다.
장기적인 상황에 대비해 예비병력을 둔 점도 윤석열 대통령의 주장과는 상반된다. 곽종근 전 특전사령관에 따르면 계엄이 선포된 3일엔 수도권 지역의 특전사 병력을 먼저 동원한 다음, 4일엔 후방의 7공수여단과 13공수여단 등 병력들을 추가로 서울에 투입할 계획이 있었다. 이들 후방 부대는 각각 전북 익산, 충북 증평에 주둔하고 있다. 당일엔 핵심 대상만을 장악하고 이후 대대적인 병력 증원을 계획한 정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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