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년 동안 계속된 이 전쟁은 수많은 패배에도 불구하고 어느 날엔가 한민족의 생명력이 가장 영광에 찬, 그리고 가장 용감한 증거로서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중략) 나는 전선의 병사들, 집에 남은 여자들의 헤아릴 수 없는 행동이나 공적, 역사상 그 예를 볼 수 없는 청소년들, 나의 이름을 붙인 히틀러 유겐트의 헌신을 보면서 기쁨에 찬 마음으로 죽는다](아돌프 히틀러, 「나의 투쟁」, 동서문화사, 2014, 1141-1142쪽).
위에 옮긴 글은 아돌프 히틀러가 스스로 목숨을 끊기 하루 반나절 앞선 4월29일 새벽 4시에 남긴 유언장의 일부다(1945년 4월30일 오후 3시30분 베를린 지하 벙커에서 자살). 유언장에서 히틀러는 패배를 인정하면서도, 그가 일으켰던 전쟁이 ‘영광에 찬 역사’로 기록될 것이라 주장했다. 유언장만 놓고 본다면, 히틀러는 자신을 전쟁범죄자로 여기지 않았다. 자신의 전쟁범죄를 부인하는 모습은 ‘내란수괴’임을 인정하지 않는 윤석열 대통령과 판박이다.
권력을 향한 욕망은 정치인이면 당연히 가져야 할 직업적 본성이라서 탓할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 욕망이 (누구라도 고개를 끄덕일 합리적이고 건설적인 욕망이 아니라) 아집과 독선으로 채워진 욕망이라면 문제다. 히틀러는 아리안 민족의 우수성을 내세워 동유럽에 독일인을 위한 생활공간(Lebensraun)을 마련한다는 망상으로 침략전쟁을 일으켰다. 그러면서 숱한 사람들을 죽이고 고통 속에 몰아넣었다. 윤석열도 뜬금없는 계엄 망상으로 많은 사람들을 고단하게 만들고 경제도 어렵게 됐다(따지고 보면, 아무것도 모르고 여의도로 출동한 20대 병사들이 윤석열 망상의 첫 희생자였다).
히틀러와 에바 브라운, 윤석열과 김건희
윤석열도 터무니없는 망상이란 점에선 히틀러에 뒤지지 않는다. 지난 세기에 많은 민주시민들이 피를 흘린 토양 위에서 21세기 민주국가로 자리 잡은 터에 비상계엄이란 날벼락을 내려 한국은 물론 전세계를 놀라게 만들었다. ‘북한 공산 세력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대한민국을 수호’한다는 명분은 지난날 박정희와 전두환 독재시절부터 워낙 많이 들어 식상하다. 윤석열은 그의 아집과 독선을 비판해온 사람들을 가리켜 ‘국민의 자유와 행복을 약탈하고 있는 파렴치한 종북 반국가 세력’으로 헐뜯었다. 그가 ‘자유 헌정질서’를 지킨다는 상투적인 명분으로 내민 비상계엄은 다름 아닌 내란이자 쿠데타 행위로밖에 볼 수 없다.
‘내란 수괴’로 찍힌 윤석열은 덩치는 작지 않지만 입은 너무나 경박스럽다. ‘바이든 날리면’ 논란이 가리키듯이, 덩칫값을 못하고 가볍다. 알코올 중독이 의심되는 잦은 술자리도 문제다. 술김에서였을까, 이번 대소동을 일으키기 전에도 측근들에게 “그냥 확 계엄해 버릴까”라는 말을 하곤 했다고 알려진다.
윤석열이 계엄을 선포한 여러 배경 가운데 하나는 곧 있을 예정이던 ‘김건희 특검법’이 꼽힌다. 말하자면 ‘마누라 방탄용 계엄’이란 얘기다. 윤석열과 그의 검찰 권력은 김건희의 파렴치한 범죄 혐의를 감싸고돌았다. 그때마다 사람들은 ‘벌거벗은 임금님’이 눈앞에 뻔히 보이는데도 아니라는 안데르센 동화를 떠올리곤 해왔다. 사랑하는 부인을 비난하는 자들이 더 없이 미웠을 것이다. 문제는 그 공격이 터무니없는 게 아니라 근거가 차고 넘친다는 데 있다. 모든 사람이 법 앞에 평등해야 한다는 점을 검사 출신인 윤석열이 모를 리 없다. 그러니 인간적으로 보자면, 그도 힘들 것이다.
히틀러의 애인 에바 브라운은 정치와 거리를 두었다. 관심종자마냥 함부로 여기저기 나서질 않았다. 베를린 다리 위에서 경찰들과 만나는 사진을 내보내 ‘독일 제3제국의 실세’인양 잘못 비쳐지는 바보짓 따윈 삼갔다. 학력과 이력 사기, 논문 표절, 주가 조작 혐의를 받지도 않았다. 히틀러도 에바를 공적 영역에서 떼놓는 신중함을 보였다. 안타깝게도 윤석열은 그러질 않았다.
히틀러와 에바는 소련군의 포격이 진동으로 전해지는 베를린 지하 벙커에서 조촐한 결혼식을 가진 뒤 곧 자살했다. 정치와 경제에 대혼란을 빚은 탄핵과 하야 정국은 아직은 안개 속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정신적 스트레스를 안겨준 윤석열과 그가 여신(女神)처럼 모셔온 김건희의 운명이 어찌 될지는 지켜볼 일이다.
히틀러는 유언장에서 자신의 공식 후계자로 둘을 꼽았다. 독일 해군대장 카를 되니츠(Karl Dönitz, 1891-1980)를 ‘제국 대통령’에, 선전장관 요제프 괴벨스(1897-1945)를 ‘제국 총리’로 지명했다. 히틀러 자살 바로 다음 날(5월1일) 괴벨스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기에, 되니츠가 사실상 1인 후계자가 됐다(군사장관, 해군 총사령관 겸직). 말이 ‘후계자’이지 패전 뒤처리의 궂은 임무를 떠맡았고, 대통령 재임 기간도 짧았다(1945년 4월30일~5월23일). 되니츠의 회고록 「10년 20일」(Memoirs: Ten Years And Twenty Days, 1958)은 히틀러 밑에서 10년, 그리고 대통령으로서 보낸 20일을 가리킨다.
“부끄러울 것 없다. 역사의 정당한 평가 받는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 잠수함 유보트(U-Boot)를 몰고 싸웠던 이력이 말해주듯, 되니츠는 ‘독일 해군 잠수함의 아버지’다. 널리 알려졌듯이,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치르면서 유보트는 연합국에게 엄청난 피해를 안겼다. 되니츠는 “300척의 유보트만 있으면 독일이 승리한다”고 큰소리쳤다. 제2차 세계대전 전반기에 되니츠는 유보트 전단을 지휘하며 나름 전과를 올렸다. 여러 척의 유보트가 떼거리로 몰려와 목표물을 공격하는 ‘늑대 떼 전술'(wolf pack strategy)이 바로 그때 나왔다. 전쟁 후반기엔 연합군이 항공기와 구축함을 중심으로 한 격침 전술을 개발하면서 유보트는 힘을 잃었다. 독일 쪽이 치른 피해도 컸다. 750척의 유보트가 격침됐고, 승무원 4만 명 가운데 3만 명이 죽었다.
1943년 1월 (히틀러의 신임을 잃은) 에리히 레더 제독의 뒤를 이어 되니츠는 해군 총사령관에 올랐다. 되니츠는 히틀러에게 굽신거리며 눈치를 살피는 ‘정치군인’은 아니었지만, 소련에게 항복한 다음 날(1945년 5월9일) 그의 이름으로 나온 마지막 ‘독일국방군 보고서’는 두고두고 논란을 불렀다.
[국방군은 승리의 전망이 없는 전투를 중지했다. 이것은 거의 6년 동안의 영웅적 전투의 종결을 뜻한다. 결국 국방군은 강력한 적에게 명예롭게 무릎을 꿇었다. 독일 장병들은 우리 조국을 위해 용감하게 싸웠으며, 자신의 선서에 충실했으며, 잊을 수 없는 용맹스런 행동을 보여주었다. 전방과 후방에서 독일인들이 이룩한 유일무이한 위업은 훗날 정당한 역사적 평가 속에서 가치를 인정받을 것이다](볼프람 베테, 「독일국방군」, 미지북스, 2011, 261쪽).
히틀러의 유언장 맥락과 다를 바 없다. 되니츠는 덧붙여 “우리는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 독일 정규군과 독일 민족이 이 6년 동안 인내하며 보여주었던 바는 역사와 세계에서도 유일한 것”이라 주장했다. “우리의 적들도 독일인이 육지와 바다와 공중에서 보인 업적과 희생에 존경을 나타낼 것이다”라고도 했다. 독일군이 저질렀던 전쟁범죄를 인정하거나, 사과나 유감 표명조차 없다.
되니츠의 보고서는 독일의 침략전쟁으로 말미암은 희생자와 유족들에게 용서를 빌지도 않았다. 1945년 8월15일 일본 국왕 히로히토의 알 듯 모를 듯한 (‘패전’이나 ‘항복’이란 단어가 빠진) 8.15 종전 조서(詔書)와 닮았다. 히로히토가 마이크 앞에서 조서를 읊은 이른바 ‘옥음(玉音) 방송’에서도 일본의 전쟁범죄로 엄청난 피해와 고통을 겪은 이들에 대한 사과는 없었다.
되니츠가 전하려 했던 위 보고서의 요점은 ‘전쟁에서 졌지만 독일군은 영웅적으로 명예롭게 싸웠다’는 것이다. 패전국 독일의 시민들을 물론 연합국 사람들에게 이런 자화자찬은 매우 공허하게 들렸을 것이다. 더구나 나치의 전쟁범죄 희생자 가족들이 위 보고서 내용을 전해 들었다면 ‘말장난을 하는 것이냐’며 화를 냈을 것이 틀림없다.
‘히틀러의 장군들’의 각서
되니츠 보고서는 다른 ‘히틀러의 장군들’이 앞으로 있을 전범재판에서 자신들을 방어하는 1차 자료로 쓰였다. 1945년 11월 장군들은 이를 참고 삼아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 제출할 공동 견해서(Memorandum, 각서)를 만들었다. “우리는 전쟁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다”는 주장을 담은 문서였다.
이 문서가 나오기까지 무대 뒤에서 바삐 움직인 미군 장성이 있었다. 미 육군 소장 윌리엄 도너번(William Donovan)이다. 도너반의 이력을 살펴보면 남다른 데가 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소령(대대장)으로 프랑스 전선에서 싸워 명예훈장을 받았고, 전쟁 뒤엔 검사로 뉴욕시 서부지검 검사장을 지냈다.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진 뒤 루스벨트 대통령의 정보조정관(Coordinator of Information, COI)으로 일하다가, 전략사무국(OSS)의 초대 국장을 지냈다(계급은 육군 소장). OSS는 잘 알려졌듯이 1947년 출범한 미 중앙정보부(CIA)의 모체다.
독일 패전 뒤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연합국(승전국)에선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 나치당 지도자들뿐 아니라 독일 육군 참모들과 군단장을 비롯한 장군들에게도 전쟁범죄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도너번은 ‘패전국의 장군들이 범죄자로 처벌돼선 안 된다’는 생각을 지녔다. 승자는 법관이 되고 패자는 피고석에 선다는 ‘승자의 재판’ 논리로 독일 장성들을 죄수 다루듯이 해선 안 된다고 여겼다.
정보기관에서 일해 온 이력 때문일까, 도너번은 앞으로 있을 미국과 소련의 대립 구도를 내다보았다. 독일을 미국 편으로 확실하게 끌어들이려면, 장군들을 처벌하는 게 도움이 안 된다고 봤다. 독일국방군이 전쟁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다는 이른바 ‘독일군 무오류 신화’를 비판해온 독일 역사학자 볼프람 베테(프라이부르크대, 전쟁사)의 글을 보자.
[도너번은 독일군 참모 집단을 범죄조직으로 처벌하는 것에 반대하여, 독일 장군들에게 최선의 변론 기회를 제공하려 했다. 그는 이 (각서) 제안 때문에 미국 주임검사 로버트 잭슨과 격론을 벌였다. 그 시기에 벌써 냉전이라는 새로운 상황의 징후가 보이기 시작했다. 도너번은 미국이 소련과의 갈등 속에서 독일을 우방으로 얻어야 하며 이를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뉘른베르크 법정의 미국 대표들 가운데 하나였다](볼프람 베테, 263쪽).
도너번의 제안에 따라 히틀러의 장군들이 뉘른베르크의 빈 방에서 만나 만든 공동 견해서(각서)의 제목은 ‘1920-1945년의 독일 육군'(Das Deutsche Herr von 1920-1945). 여기에 함께 한 장군은 발터 폰 브라우히취(1938-1941년 육군총사령관), 에리히 폰 만슈타인(1941-1942년 육군 제11군 사령관, 그 뒤 1944년 3월까지 육군 남부방면군 사령관), 프란츠 할더(1938-1942년 육군 참모장), 발터 바를리몬트(1938-1944년 국방군 작전참모), 지크프리트 베스트팔(서방면군 사령부 참모장) 등 5명이었다.
만슈타인은 국제군사재판의 증인으로 뉘른베르크에 와 있었다. 캐나다 역사학자 베노 르메이(캐나다 왕립군사대학, 독일사)가 쓴 만슈타인 평전(Erich von Manstein: Hitler’s Master Strategist, 2006)에서 공동 견해서(각서)의 내용을 보자.
[독일국방군 장성들은 군인으로서의 의무만을-명령에 복종하고 군사적 문제에 대해서만 한정하여-수행했으며, 국가와 조국, 국가수반(히틀러)에 대해 헌신하고 봉사하는 탈정치적 군사적 전통에 따라 반역할 수 없었다. 독일국방군은 나치 조직과 구별되는 별도의 조직이며, 프로이센의 오랜 군사적 전통인 기사도 정신에 충실했으며, 민족사회주의(나치) 이념에 휘둘리지 않았던 조직이었다. 또한 국방군은 나치 정당과 친위대(SS)에 적대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전쟁의 시작과 동부전선에서 전쟁범죄를 명령한 히틀러의 지시에도 반대한 조직이었다](베노 르메이, 「히틀러의 장군들 1 만슈타인 평전」, 좋은땅, 2017, 565-566쪽).
“독일국방군은 전쟁범죄와는 거리가 멀었다”는 것이 위 견해서의 요점이었다. 나치 친위대와 아인자츠그루펜(Einsatzgruppen, 이동학살부대)이 저질렀던 학살범죄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을 뿐만 아니라, 친위대의 전쟁범죄적 행동을 반대했다고 우겼다. 견해서는 한술 더 떠, ‘독일국방군 장성들이 히틀러의 지시에 반대했다’는 믿기 어려운 주장을 내세웠다.
생전의 히틀러는 독일국방군을 가리켜 ‘나치 정권을 지탱하는 두 번째 기둥’으로 높이 평가하곤 했다(첫째 기둥은 나치당). 만슈타인 평전을 쓴 르메이는 견해서 작성에 참여한 독일군 장성들의 낯 두꺼운 태도에 매우 비판적이다. 장군들의 협력이 없었다면 히틀러가 침략전쟁을 펼치고 그에 따른 전쟁범죄를 저지를 수 없었기에 결국 장군들은 ‘히틀러의 공범자’라는 지적이다.
“전쟁범죄 책임지려는 자는 없었다”
1945년 11월19일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 증거자료로 제출된 공동 견해서는 연구자들로부터 ‘자기기만적 문서’라는 혹평을 받았다. 독일 역사학자 볼프람 베테는 장군들이 무죄 주장을 하고나선 배경을 놓고 전쟁사 연구자 만프레트 메서슈미트(독일 울름대)의 비판적 분석 글을 이렇게 옮겼다.
[(메서슈미트에 따르면) 장군들은 독일 육군이 나치당 및 나치 친위대와 대립했고, 히틀러의 중요 결정들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전쟁범죄에 대한 명령에 반대했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을 자신들의 최우선 관심 사항이라 보았다. 그러므로 그들의 자기 변론은 수십 년간 대중이 국방군에 대해 갖게 될 이미지의 주요 요소들 모두를 이미 포함하고 있었다. 즉 그들은 제2차 세계대전 동안 그들이 실제 행한 것들과 국방군 최고사령부와 육군 최고사령부가 행한 역할을 숨겼다](볼프람 베테, 264쪽).
메서슈미트는 결론적으로 “각서 작성자 중 자신이 행한 것이나 행하지 못한 것에 대해 책임을 지려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고 히틀러의 장군들을 냉혹하게 비판했다. 이런 비판에도 불구하고 문제의 각서는 ‘깨끗한 독일군 신화’를 만들어내는 단단한 밑돌 몫을 해냈다. 실제로 그 뒤 열린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 장군들의 변호인단은 한결같이 무죄를 주장하면서 각서의 내용을 변론에 거듭 활용했다.
장군들이 공동 견해서를 통해 무죄를 주장했다는 사실은 독일의 거의 모든 장교들에게 알려졌다. 비록 전쟁을 승리로 이끌지는 못했더라도 그 장군들이 지녔던 무게감 때문에 정규군인 국방군 장교는 물론, 나치 친위대 장교들마저 스스로를 무죄로 여기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앞서 살펴본 되니츠 보고서와 더불어 이 공동 견해서는 “독일국방군은 전쟁범죄에 관한 한 떳떳하고 흠잡을 수 없이 깨끗하다”는 신화를 퍼트렸다. 비판적 연구자들은 이런 상황을 가리켜 “각서의 내용이 역사적 진실로까지 격상됐다”고 지적했다(볼프람 베테, 264쪽).
뉘른베르크 전범재판, 장군 3명에게 사형
뉘른베르크 전범재판(공식 명칭은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 IMT 재판)은 1945년 11월부터 1946년 10월까지 1년 가까이 이어졌다. 1946년 10월15일 피고인 24명 가운데 22명에게 선고가 내려졌다(1명은 감옥에서 자살, 다른 1명은 재판 도중 병사). 이들 22명에게 매겨진 형량은 교수형 12명, 종신형 3명, 징역 20년 2명, 징역 15년 1명, 징역 10년 1명이었다(무죄 3명).
교수형 판결을 받은 12명 가운데 1946년 10월16일 실제로 교수형이 집행된 피고는 10명이었다. 권력 서열상 2인자였던 헤르만 괴링(공군 원수)은 사형 집행 전날 밤 몰래 숨겨둔 독극물 캡슐을 삼켜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마르틴 보어만(히틀러의 비서부장)은 행방불명된 상태로 궐석재판에서 사형 판결을 받았다(보어만은 1945년 5월2일 베를린을 탈출하다가 사망했다는 사실이 1972년에야 뒤늦게 드러났다).
12명의 사형수 가운데 독일국방군 주요 지휘관은 3명이다. 공군 총사령관과 4개년 경제계획청장을 지낸 헤르만 괴링(공군 원수), 육군 총사령관 빌헬름 카이텔 원수, 독일국방군 작전부장 알프레드 요들 대장 등 3명이다. 전 해군 총사령관 에리히 레더(해군 원수)는 무기징역, 히틀러가 자살하면서 대통령으로 지명됐던 카를 되니츠(해군 원수)는 10년 형을 받았다. 이들은 하나같이 독일국방군의 전쟁범죄를 인정하지 않았다.
“전쟁범죄 인정한 사람은 없었다”
나치 전범들을 피고석에 세운 전범재판을 꼽을 때 (널리 알려진,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 말고도) 미국이 단독으로 연 12개의 재판을 빼놓을 수 없다. 이 재판들을 가리켜 ‘뉘른베르크 후속 재판'(Subsequent Nuremberg Trials)이라 일컫는다. △나치 의사들의 전쟁범죄를 다룬 ‘의사 재판'(후속 재판 1), △나치 법률가들을 다룬 ‘법관 재판'(후속 재판 3), △군수산업을 운영했던 독일 기업인들을 단죄한 ‘쿠르프 재판'(후속 재판 10) 등이다(후속 재판에 대해선 다음 주 글에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본다).
후속 재판 가운데 독일 군부 엘리트 장성들을 다룬 재판이 ‘국방군 최고사령부 재판'(Prozess Oberkommando der Wehrmacht, 후속 재판 12)이다. 12개 후속 재판 가운데 맨 나중에 열린 이 재판은 (나치 전시지도부 핵심들을 단죄한)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 기소되지 않았던 ‘히틀러의 장군들’을 피고석에 세웠다. 모두 14명의 피고들은 특히 동부 유럽에서 벌어졌던 학살을 계획하고 실행에 옮기도록 명령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뉘른베르크 사법청 법정에서 1947년 12월30일부터 1948년 10월28일까지 10개월 동안 233회의 공판이 이어졌던 재판에서 14명 피고 가운데 사형 판결을 받은 자는 없다. 무기형 2명, 징역 15년 2명, 징역 12년 3명, 징역 8년 1명, 나머지 4명에겐 징역 3~5년이 내려졌다(2명은 무죄 석방).
무기징역 형을 받은 2명의 장군은 헤르만 라이네케와 발터 바를리몬트다. 라이네케는 국방군사령부(OWK)의 일반군무청장과 보병대장(육군 중장)을 지냈고, 바를리몬트는 국방군사령부의 작전참모국 국가방위부장 자리에 있었다. 이 둘은 소련군 포로들을 처형하거나 굶기고 학대해 죽도록 만들었다는 혐의를 받았다(유대인 대량학살 혐의를 다루진 않았기에 두고두고 논란을 불렀다). 두 장군은 무기형을 받았음에도 동서 냉전이 격화되는 분위기를 타고 1954년에 풀려나, 그 뒤 20년 넘게 목숨을 이어갔다. 이들은 늦게라도 지난 죄를 반성하며 살았을까. 법정 태도를 떠올리면, 꼭 그렇진 않을 듯하다. 베테의 관련 글을 보자.
[피고인들은 다른 전범재판에서의 피고인들과 마찬가지로 개인적 죄책에 대해 모두 부인했다. 명령을 수행했을 뿐이라는 주장, 범죄에 대해 몰랐다는 주장, 상세한 것을 기억할 수 없다는 주장을 하면서 말이다. 피고인들 중 양심의 가책을 느끼거나 죄책을 인정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다만 블라스코비치 장군의 자살이 이를 암시할 뿐이다}(볼프람 베테, 277쪽).
냉전 덕에 흐지부지 풀려난 전범들
요하네스 블라스코비츠(육군 상급대장, 1883-1948)은 재판이 시작된 지 1개월이 지난 1948년 2월 초, 옥중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개신교 목사의 아들인 그는 독일군이 학살의 공범자 또는 방관자로 머무는 상황을 못 마땅하게 여겼다. 1939년 독일의 폴란드 침공 때 제8군 사령관이었던 그는 “아인자츠그루펜(기동학살대)의 민간인 학살은 전쟁범죄”라며 베를린 사령부에 항의의 뜻을 전했다. 그 뒤 서부전선의 제1군 사령관으로 옮겨갔다. 히틀러는 블라스코비츠가 민간인 학살에 항의했다는 이유로 그를 육군 원수로 진급시키지 않았다고 알려진다.
무기징역을 받은 두 피고가 1954년에 풀려났고. 나머지 유기징역을 받은 피고들도 마찬가지로 1954년까지는 모두 풀려났다. 서독 초대 총리 콘라트 아데나워와 연방의회를 비롯한 정치권은 동독을 비롯한 공산권의 위협에 맞서 서독의 재무장을 바랐다. 나토(NATO)의 맹주인 미국은 서독의 재무장을 노골적으로 부추겼다. 그런 분위기 아래 ‘군사 기술자’인 전범들이 잇달아 사면을 받고 풀려났다 (일본을 동맹국으로 붙잡아두려는 워싱턴의 동아시아정책에 따라,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1948년 12월 ‘크리스마스 특사’로 일본 전범자들을 풀어주었던 것과 마찬가지다. 본 연재 7 참조).
소련, “그자들을 전범재판에 넘겨야 마땅”
‘독일군 기동전의 대가’로 이름이 알려진 에리히 폰 만슈타인은 독일국방군 남부집단군에 속한 제11군 최고사령관을 지냈다. 1945년 독일이 패한 뒤 다른 3명의 독일 장성(발터 폰 브라우히치,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아돌프 슈트라우스)과 함께 영국 웨일즈 지방의 포로수용소에 갇혔다. 하지만 이들은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 넘겨지지 않았다. 영국과 미국이 이들을 감싸주는 것이 아니냐는 논란이 따랐다.
전쟁 중에 엄청난 희생자를 냈던 소련 쪽에선 “그자들을 전범재판에 넘겨야 마땅하다”고 거듭 주장했다. 결국 만슈타인은 1949년 뒤늦게 군사법정에 섰다(그 사이에 다른 3명의 장성 가운데 브라우히치는 수용소에서 죽었고 나머지 둘은 몸이 아파 풀려났다). 독일의 영국 관할지역인 함부르크 군사법정의 검찰관은 △히틀러와 나치 정권의 인종말살 정책을 적극 지지했고, △독일군 점령지에서 유대인과 소련군 정치위원들을 죽이도록 지시했고 △아인자츠그루펜의 집단학살을 지원했다는 혐의를 (구체적인 물증을 들어가며) 낱낱이 고발했다.
지난 주 글에서 만슈타인이 ‘유대-볼셰비즘 체제의 절멸’을 강조하면서 “유대인에게 혹독한 죗값을 받아내야 한다”고 지시한 사실을 살펴봤다. 하지만 만슈타인은 무죄를 주장했다. 헌법에 따라 전쟁 결정권은 히틀러가 쥐고 있었고, “군 사령관들은 전쟁을 일으킬 생각이 없었기에, 전쟁을 벌인다는 결정을 최대한 막으려 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주어진 명령에 따라 의무를 수행한 게 전부인 군인들을 범죄자로 취급해선 안 된다”는 논리를 폈다. 그는 나아가 “유대인 학살에 대해선 전혀 몰랐다”고 발뺌했다. 만슈타인 평전을 쓴 캐나다 역사학자 베노 르메이(캐나다 왕립군사대학, 독일사)를 비롯한 연구자들은 그의 주장이 대부분 뻔뻔스런 거짓이라 못 박았다.
처칠이 변호사 대준 만슈타인 변호 비용
만슈타인 재판은 전쟁범죄라는 역사적 진실이 냉전이라는 국제정치 논리에 밀려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서독을 재무장시켜 서방 진영의 동맹국으로 묶어두려는 미국과 영국의 정치권과 군부 지도자들은 만슈타인 재판을 못 마땅하게 여겼다. 그들은 독일 국방군이 다른 보통의 군대와 마찬가지로 ‘오로지 나라를 지키려는 순수한 군사적 차원에서 전쟁을 치렀다’고 사람들이 보길 바랐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영국을 이끌었던 윈스턴 처칠은 만슈타인이 영국인 변호사 2명을 고용할 수 있도록 비용을 마련해주기까지 했다(이를 두고 처칠을 가리켜 ‘지난날의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으로 감싼 대인배’라고 볼 수 있을까는 독자들의 판단에 맡긴다). 처칠의 도움을 받아 만슈타인이 채용한 영국인 변호사들은 영국 노동당 출신의 현직 하원의원들이었다.
이들은 글 위에서 살펴본 ‘장군들의 1945년 각서’와 ‘되니츠 보고서’를 참고삼아 변론서를 작성했다. 이들은 마치 독일군의 명예회복을 위해 일어난 십자군 전사들처럼 비쳐졌다. 변론서는 “국방군은 놀라운 절제와 군율을 보여주었다”며 그 범죄에 관련된 독일국방군의 역할을 부정했다. 따라서 만슈타인은 결코 전범자가 될 수 없다는 주장이었다.
그런 변론에도 불구하고 만슈타인의 전쟁범죄 사실이 지워지는 것은 아니다. 영국 군사법원은 만슈타인에게 18년의 징역형을 매겼다. 하지만 실제 복역은 4년에 그쳤다. 1950년 12년으로 감형되더니 1953년 슬그머니 풀려났다. 동서냉전의 바람을 타고 풀려난 만슈타인은 회고록 「잃어버린 승리」(Verlorene Siege, 1955)을 펴냈다. 이 책에서 만슈타인은 유대인 학살을 전혀 다루지 않았다. 단 한 줄의 해명이나 사과도 없다. 오히려 책 서문에서 독일군을 ‘영웅적이고 헌신적인’ 군대로 그려냈다.
[나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높은 지위를 가긴 사령관의 시각으로 문제를 거시적으로 바라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인들이 맡은 임무에 대해 영웅적이고 헌신적인 자세와 철저한 자기희생의 정신을 보유했던 독일 병사들, 그리고 이런 병사들과 융화되었고 부여된 책임에 대해 임할 준비가 돼있던 모든 지휘관들의 리더십이 독일군의 결정적인 성공요소였음을 보여주고 싶었다](에리히 폰 만슈타인, 「잃어버린 승리: 만슈타인 회고록」, 좋은땅, 2018, 17쪽).
장군들의 회고록, 범죄 부인하며 히틀러 깎아내려
1950년대 독일에선 전직 장군들의 회고록이 잇달아 나왔다. 그 책들은 두 가지 공통점을 지녔다. 첫째, 유대인을 포함한 민간인 학살 범죄를 다루지 않았고(다루더라도 자신의 가담 혐의를 부인했고), 둘째, 히틀러를 깎아내렸다. 고도의 전문성을 지닌 군사 지휘관들이 전략․전술을 짜야하는 전쟁의 특성을 무시하고 이것저것 간섭하고 독단적인 결정을 밀어붙인 철부지 ‘꼬마 하사'(kleiner Gefreiter)로 그렸다. 만슈타인의 「잃어버린 승리」가 히틀러를 낮춰 본 대표적인 보기다.
글이 길어져 여기서 매듭지어야겠다. 앞에서 살펴본 만슈타인과 되니츠는 군사 전략가로는 뛰어난 인물들이다. 이들을 포함한 독일국방군의 엘리트 장군들 덕분에 히틀러와 골수 나치 당원들은 “유대인을 절멸시키고 점령지를 유럽 전역으로 넓혀 독일인의 생활공간(Lebensraum)을 확보하겠다”는 야망을 한때나마 (독일이 승세를 타던 전쟁 전반부에) 이룰 수 있었다.
결론적으로, 이들 ‘히틀러의 장군들’은 침략전쟁 과정에서 저질러졌던 독일군의 전쟁범죄에 대해선 눈을 감았다. 그러면서 “독일국방군은 전쟁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다”는 이른바 ‘흠 없는 방패'(unbelflekte Schild)로서의 ‘깨끗한 독일군 신화’를 퍼트렸다. 여기엔 미국도 한몫 했다. 서독을 재무장시켜 서방 진영의 동맹국으로 묶어두려 했다. 그런 1950년대 동서 냉전 분위기가 ‘깨끗한 독일군 신화’가 자리 잡는 것을 도왔고, 옥중의 장군들은 짧은 복역 뒤 풀려날 수 있었다.
자유의 몸이 된 ‘히틀러의 장군들’은 지난날 독일국방군(Wehrmacht)의 엘리트 장교로서 전쟁범죄를 저질렀던 일들을 ‘과거사’로 돌리고, 1955년 독일연방군(Bundeswehr)의 창설에 즈음해 고문역, 자문역 등으로 나름의 힘을 보탰다. 다음 주엔 나치 의사, 법관, 기업인 등을 단죄한 12개 뉘른베르크 후속재판에 대해 살펴보고 문제점을 독자들과 함께 짚어보기로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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