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이면 어느덧 신문사에 컬럼을 연재한지 10년을 맞이한다.
사람은 모름지기 한 분야에 10년을 매진하면 전문가(專門家)라는 소릴 듣는다고 한다.
하지만 필자는 글을 쓸 때마다 한없는 부족함 때문에 매 순간 매 순간이 힘겹게 느껴진다.
솔직한 심정이다. 올 한해도 어느덧 서서히 저물어가는 지난 주말 강동구에서 캡틴 복싱체육관을 운영하면서 유원대학 복싱 감독을 겸직한 이동포 감독과 오찬을 함께했다.
필자가 이동포 유원대학 감독에게 애정(愛情)을 느끼는 이유 중 하나가 나의 첫 제자이자 분신과도 같은 최요삼의 트레이너로 활약하면서 그의 최후의 경기를 현장에서 지켜본 지도자이기 때문이다.
그는 대화 중 시종일관 자신이 부상으로 인해 4전 전승(2KO)의 짧은 현역생활을 하는 동안 그에게 사랑과 관심을 보여준 스승인 한국화장품 조민 관장에 대해 감사한 마음을 가슴속 깊이 품고 있었다.
1945년 경기도 연천 출신의 조민 관장은 신도체육관 출신으로 1966년 국가대표 선발전 (라이트급)에 출전 4강에 진입한 촉망받던 유망주였다.
1967년 1월 프로에 대뷔 1977년 4월 현역에서 은퇴할 때까지 11년 동안 현역생활을 하면서 44전 26승(19KO) 8무 10패를 기록한 조민은 초반엔 동양 챔피언 조영철 국내 챔피언 이춘산 김광선등 역대급 복서들과 대결에서 연패를 당하면서 극심한 성장통을 겪었다.
하지만 이후 2연속 KO승을 거두면서 전열을 추스린 조민은 1971년 3월 한국 웰터급 타이틀에 도전 챔피언 조경인과 맞대결 10회 무승부를 기록한다, 조경인은 이안사노 장병오등 명망(名望) 높은 복서들을 꺾은 강자로 후에 남성체육관을 개관 현 용인대 김진표 교수를 배출했다.
그리고 두달후 조민은 6연승을 달리던 특급 유망주 유제두를 KO 시킨 웰터급 지존(至尊) 임병모와 열띤 타격전 끝에 무승부를 기록 비로소 이름 석자를 알린다.
1972년 3월 문재익을 4회 KO로 잡고 5년만에 국내 정상에 오른 조민은 1차방어전에서 5전 전승 (3KO)를 기록한 복병 조현복 (군산체)을 3회 KO로 잡는다.
그해 8월 동양웰터급 타이틀에 도전하기 위해 일본에 원정한다, 챔피언은 1970년 10월 한국의 임병모를 9회 KO로 잡고 동양 챔피언에 오른 류 소리마치였다.
이 대결에서 조민은 6회에 회심의 라이트훅 일발로 다운을 탈취한후 여세를 몰아 7회전과 10회전에서도 각각 다운을 시키면서 12회전을 마친다.
그러나 일본인 심판과 저지들은 53ㅡ53 54ㅡ54 53ㅡ52로 채점 결국 무승부를 기록한다, 일본 현지 언론에서도 엉터리판정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일방적인 경기를 펼쳤지만 흘러간 물은 물레방아를 돌릴수 없었다.
3차방어전 도전자 조민의 육탄공세에 지옥의 문턱까지 갔다온 류. 소리미치는 이후 자국의 WBA 주니어 미들급 챔피언 와지마 고이치의 타이틀에 도전 접전 끝에 2ㅡ0 판정패를 당한 동양권 웰터급의 무적함대였다.
귀국한 조민은 진충문과 진정환을 연속 KO승을 거두면서 건재를 과시했고 신인 시절 그에게 패배를 안겼던 이춘산과 재대결에서도 원사이드한 판정으로 잡고 과거의 채무를 탕감한다.
1973년 12월 일본 나고야에서 프로복싱 한일전이 펼쳐진다. 이 경기에서 미들급의 강흥원이 일본의 시바다 겐지를 1회 KO승을 거두었고 웰터급의 조민 은 일본 챔피언 나카가와을 3회 KO승을 거두고 한국은 2승 2패를 기록한다.
귀국하자 한국화장품에서 톱스타 찰스 브론슨과 신일용이 광고를 한 「맨담」 이란 화장품 모델로 전격 발탁되어 기용되는 행운이 따른다.
사기충천한 조민은 이후 연달아 3차례 펼쳐진 한국웰터급 타이틀전을 전부 KO로 장식하면서 물오른 경기력을 보여준다.
특히 1974년 6월에 벌인 4차방어전 상대는 방콕아시안게임(70년)과 테헤란 아시아선수권(71년)을 연달아 석권한 아마츄어 국가대표 출신 정영근이었다.
이대결에서챔피언 조민은 위력적인 함포사격으로 4연속 KO 행진을 펼치던 정영근을 6회에 침몰시키면서 KO승한 장면은 백미(白眉)였다. 1975년 6월 조민은 또다시 일본 원정을 감행한다,
류. 소리마치가 보유한 동양웰터급 타이틀 7차방어전 도전자로 내정되어 마지막 승부구를 던진 것이다.
그러나 이 대결도 지난번 경기의 재방송을 보듯 3회에 스커드미사일처럼 터진 위력적인 라이트훅으로 한차례 다운을 시키면서 주도권을 잡고 5회와 10회에도 그로키 일보 직전까지 몰고 가는등 우세한 경기를 펼쳤지만 또다시 무승부판정에 타이틀의 꿈은 연기처럼 사라지고 만다, 1977년 4월 의욕을 상실한 32세의 조민은 관광객 모드로 일본에 원정 세계 랭커 라이온 후루야마와 경기를 끝으로 링을 떠난다.
이후 한국화장품 복싱체육관을 운영하면서 IBF 플라이급 챔피언 정비원 WBA 미니멈급 챔피언 김봉준 WBA J.라이트급 챔피언 백종권등 3명의 세계챔피언을 탄생시키면서 지도력을 인정받았다.
그리고 WBC 라이트 플라이급 챔피언을 지낸 최요삼이 마지막 불꽃을 태우기 위해 자신이 운영하는 체육관을 찾아오자 현 유원대 복싱 감독인 이동포 관장과 투톱을 형성 최요삼 마지막 경기까지 보살피면서 동행한 역사의 산증인이기도 하다.
KBC(한국 권투위원회) 사무총장을 끝으로 오래전 복싱계를 떠난 팔순에 접어든 조민 관장은 근검절약하면서 모범적인 사회활동을 하면서 서울 모처에 건물 2채를 보유 풍요로운 인생 3막을 유유자적하게 보내고 있다. 끝으로 조민 관장의 무궁한 건승을 바라면서 이번 주 스포츠 컬 럼을 마친다.
조영섭 복싱전문기자는 1980년 복싱에 입문했고 현재 문성길 복싱클럽 관장을 맡고 있는 정통 복싱인이다. 1963년: 군산출생 1983년: 국가대표 상비군 1984년: 용인대 입학 1991년: 학생선수권 최우수지도자상 1998년: 서울시 복싱협회 최우수 지도자상 2018년 서울시 복싱협회 부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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