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일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 국회 표결이 무산되자 국회 앞 집회 현장에는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앞자리 노동자들이 행진을 위해 빠져나갔다. 그러자 빨강, 파랑, 노랑, 온갖 빛으로 반짝이는 응원봉들이 앞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바꿔야겠다!’ 김지호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 연대사업국장은 퍼뜩 생각했다. 무대 음향감독 노트북에서 급하게 노래들을 찾아 플레이리스트를 만들었다. 에스파 ‘위플래시’, 투애니원 ‘내가 제일 잘나가’, 부석순 ‘파이팅 해야지’, 샤이니 ‘링딩동’, 방탄소년단 ‘불타오르네’, 로제 ‘아파트’ 등 케이(K)팝부터 무한궤도 ‘그대에게’, 김수철 ‘젊은 그대’, 김연자 ‘아모르 파티’까지 이어지자 침통했던 분위기가 일순간에 달아올랐다.
‘위플래시’ 리듬에 맞춰 “탄핵! 탄핵! 윤석열 탄핵!”을 외치고, 자신이 든 응원봉 가수 노래가 나오면 목이 터져라 따라 불렀다. 아이돌 댄스와 ‘막춤’의 세대통합 댄스 배틀이 어우러졌다. 2024년 겨울, 시민이 경험한 건 암담한 과거로 회귀한 정치 현실만은 아니었다. 분노와 저항의 ‘밝은 미래’가 여기 있었다.
이른바 비운동권 노래, 대중가요가 집회 현장에서 각인된 건 2016년 이화여대생들이 교내 농성 때 부른 소녀시대 ‘다시 만난 세계’가 시작이었다. 당시 센세이션을 일으킨 이 노래는 박근혜 탄핵 촛불 집회에서도 자주 불렸다. 그렇다고 집회 문화가 크게 바뀐 건 아니었다. 김 국장은 최근까지도 “과하게 비장하고 젊은층에게는 낯선” 집회 문화를 고민했다.
논의 끝에 민중가요 대신 대중가요 가사를 바꿔 야구장에서 외치는 구호 방식을 적용하기로 했다. 그래서 떠올린 게 이디엠(EDM) 스타일의 에스파 ‘위플래시’ 전주를 깔고 박자에 맞춰 구호를 외치는 거였다. 계엄령이 발표된 지난 3일 밤 국회 앞으로 모인 시민들 사이에서 틀었던 이 곡이 에스엔에스(SNS)를 통해 입소문이 났고, 7일 대규모 ‘응원봉’ 집회까지 이어진 것이다.
이번 집회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게 케이팝 팬덤 문화다. 서정민갑 대중음악평론가는 이번 사태로 엠제트(MZ)세대가 정치적으로 각성했다는 분석은 틀렸다고 지적한다. 그는 “아이돌 팬클럽은 이미 오래 전부터 소속사의 불합리한 관행 등에 맞서 다양한 방식으로 싸우고 기민하게 대처해왔다. 현실 정치든 무엇이든 불의라고 여기는 것과 싸워온 경험이 이번 집회의 폭발력으로 나타난 듯하다”고 짚었다.
또한 이른바 ‘빠순이·빠돌이’로 조롱받던 취향이 개성으로 존중받게 되면서 ‘전국 집에 누워있기 연합’ ‘강아지발냄새연구회’ 등 재치와 장난기 가득한 깃발들이 등장하는 데도 영향을 미쳤다. 서정민갑 평론가는 “2008년 첫 촛불 집회 때만 해도 튀는 깃발이 있으면 내리라고 강요하는 이들이 있었는데, 이제는 개인과 집단이 공존하는 방식으로 집회 문화도 바뀌었다”고 말했다.
기성 세대도 응원봉을 구매하고, 젊은 세대는 기성 세대를 배려하는 등 세대 통합의 움직임도 보인다. 윤석열정권퇴진운동본부는 9일 ‘탄핵 집회 플레이리스트’ 신청을 받았더니 한나절도 안돼 4천곡(중복 포함) 넘게 쌓였다고 한다. 김 국장은 “‘민중가요나 중장년 음악도 많이 틀어달라, 가사만 알려주면 따라 부르겠다’고 한 10~20대가 많더라”며 “서로에 대한 배려가 세대를 통합하는 집회 문화를 정착시킨 것 같다”고 짚었다.
한겨레 김은형 선임기자 /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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