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례강, 고려대학교 미디어학부 4학년]
한때 동두천 동광극장은 사람으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관객들은 최신 영화를 보기 위해 긴 줄을 서며 극장으로 들어섰고 웃음소리가 그 안을 가득 채웠다. 「보디가드」와 같은 인기 영화를 상영하는 날이면 자리가 없어 좌석과 좌석 사이 계단에 쪼그리고 앉아 영화를 보는 이들도 많았다. 영사실, 매표원, 미술부장, 매점 등 매일 10명이 넘는 직원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이곳은 단순한 극장이 아니라, 지역 주민들이 문화를 공유하던 곳이었다. 물론 수십 년 전의 모습이다.
오늘날 이곳은 과거의 화려함을 잃고, 적막한 공간으로 변했다. 북적거리던 사람들 대신 곳곳에 놓인 어항 속 물고기들이 극장을 지키고 있다. 지난 9월 27일 상영 영화는 「베테랑2」이었지만 오후 2시까지 관객은 한 명도 없었다.
이로부터 3일 뒤인 9월 30일, 한국 극장의 상징과도 같던 충무로 대한극장이 문을 닫았다. 1958년에 개관한지 66년 만의 일이다.
동광극장은 1959년 개관했다. 극장 산업 구조의 변화로 독립 극장들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동광극장은 여전히 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전국 유일의 단관극장이다.
기자가 찾은 동광극장은 한국 영화의 역사를 그대로 간직하는 듯했다. ‘1959 동광극장’이라고 적힌 노란 간판 아래 「실미도」, 「극한 직업」 등 천만 관객을 돌파한 한국 영화들의 포스터가 한 줄로 늘어서 있다. 그 아래 놓인 상영작 「베테랑2」의 포스터 옆에는 1967년 「학사며느리」를 상영할 당시의 동광극장 전경 사진이 있어서 현재와 과거가 교차하는 묘한 인상을 주었다. 붉은색 벽돌 벽 사이에는 손글씨로 삐뚤빼뚤 적은 상영시간표가 걸려있었다. 극장 건물 내부로 들어서자, 벽면에 걸린 흑백사진들이 눈에 띄었다. 동광극장을 운영하는 고재서 대표는 사진을 한 점 한 점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약 70년에 걸친 동광극장의 변천사를 설명했다. 동광극장은 2023년 경기관광공사에서 발표한 ‘경기 노포’에 선정됐다.
동광극장에 대한 고 대표의 첫 기억은 197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고 대표의 아버지가 친척의 조언으로 동두천의 한 극장을 인수한 것이 그의 영화 인생의 시작이었다. 장남인 그는 돌아가신 아버지를 이어 극장업에 뛰어들었고 이후 1986년에 동광극장을 인수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지금은 시스템을 자동화하여 고 대표 혼자 극장을 운영하지만, 과거에는 영사실 직원, 청소부, 매표원 등 15명이 넘는 직원이 함께 일했다. 신작 영화가 개봉하면 그에 맞춰 간판을 그리는 미술부장은 그때만 해도 고급 인력으로 취급되었다. 반면 극장 소속 직원들의 임금은 그다지 높지 않았다. 공짜로 영화를 실컷 보니 봉급은 조금 받더라도 이해하던 시절이었다.
고 대표는 극장 내부 한쪽에 자리한 은회색 필름 영사기를 소개했다. 곳곳에 손때 묻은 흔적이 가득했으나 관리를 잘한 듯 멀쩡해 보였다. 지금의 디지털 영사기를 들이기 전에는 이 영사기가 극장의 모든 영화를 책임졌다. 고 대표는 동광극장을 찾는 관객들이 극장의 옛 모습을 볼 수 있도록 이따금 필름 영사기를 시연한다.
상영관의 문을 열자, 현대적인 시설과 과거의 감성이 어우러진 공간이 펼쳐졌다. 283석 규모의 상영관은 넓고 깔끔했다. 1층 좌석은 대부분 리클라이너이며 좌석 사이에 테이블과 휴대전화 충전기를 두어 관객들이 편안하게 영화를 감상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2층 좌석 앞에는 발을 편히 올릴 수 있는 받침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오후 늦게 동광극장을 찾은 4명의 관객은 저마다 원하는 자리에 앉아 자기 몸에 맞게 좌석을 조정했다. 동광극장은 예매할 때 좌석을 지정하지 않는다. 누구나 선착순으로 원하는 자리에 앉아 영화를 감상할 수 있다. 관객들은 리클라이너에 양반다리로 앉거나 소파에 누워 턱을 괴기도 하는 등 저마다 편한 자세로 영화를 감상했다.
영화를 관람한 대학생 임장섭 씨는 집 근처에 멀티플렉스가 있지만 15,000원 가까이하는 티켓값이 부담스러워 동광극장을 찾았다고 했다. 동광극장의 성인 티켓값은 9,000원으로 멀티플렉스보다 저렴하다. 그는 동광극장에서 1980년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 「피 끓는 청춘」을 관람했던 경험을 예로 들며 이런 영화는 극장에서 봐야 맛이 난다고 했다. 과거를 배경으로 한 영화는 동광극장의 레트로 풍 분위기 덕분에 더 몰입하여 볼 수 있다는 뜻이었다.
오늘날 동광극장에서 전성기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인터뷰를 진행하며 문가에서 인기척이 날 때마다 고 대표는 몇 번이고 고개를 돌렸지만, 극장에 들어오는 사람은 없었다. 인근에 복합영화관이 개관하여 사람들의 발길은 더 뜸해졌다. 명절 연휴에는 그래도 관객이 조금 있었지만, 지난 추석 때는 그러지도 않았다. 군부대 단체관람 등의 경우 외에는 대체로 상황이 녹록지 않다.
“전기료도 안 나오니까 손님 두 명이 오면 죄송하다고 돌려보냅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저는 피눈물이 나지요.”
고 대표는 적자를 보면서 극장을 계속 운영하기가 버겁다고 전했다.
고맙게도 동광극장을 지원하려는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 동광극장이 그저 낡은 영화관이 아니라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담은 중요한 공간이라는 인식이 퍼지면서, 동광극장을 소개하는 프로그램들이 생겨났다. 올해 동두천시의 용역을 받아 시티투어를 진행한 운영사 ‘러닝메이트’는 레트로 투어 프로그램에 동광극장을 포함했다. 러닝메이트 유승상 대리는 동광극장을 방문한 관광객들의 피드백이 매우 긍정적이었다고 밝혔다. ‘다올문화협동조합’의 김호경 대표 역시 동광극장을 코스에 포함한 공정관광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그는 최근 고 대표와 협업하여 옛 영화 포스터 전시전을 기획하는 등 동광극장과 관련한 문화콘텐츠를 모색하고 있다. 그는 “동광극장이 영화만 보는 곳이 아니라 다양한 문화를 함께 공유하는 공간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극장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관객들의 지속적인 관심과 방문이 필수적이다. 현재 동광극장을 위한 시 차원의 지원은 없다. 시티투어 업무를 담당하는 동두천시 관광휴양과 천광호 주무관은 “지금 상황에서 동광극장이 노포라고 지원하게 되면 형평성 문제가 제기될 수 있어서 섣불리 나서기가 어렵다”고 밝혔다. ‘경기북부평화시민행동’의 최희신 활동가는 시 차원의 지원보다는 많은 관객의 방문을 유도할 방안을 찾는 것이 급선무라고 말했다. 그는 원주 아카데미 극장과 같이 공공 영역에서 지원하다 결국에는 사라지거나 다른 장소로 바뀐 극장들을 언급하며 지자체 지원의 위험성을 경고했다.
오늘도 동광극장은 관객들을 기다리고 있다. 고재서 대표는 어려운 상황에도 극장을 포기할 생각이 없다. 오히려 끝까지 개봉관으로 남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극장 운영을 언덕 오르기에 비유했다. “저는 끝까지 이걸 끌고 나갈 겁니다. 그런데 내가 갈 수 있게끔 시민들이 뒤에서 지게를 밀어주면 같이 갈 수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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