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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대선 직후인 11월 7일 뉴욕타임스는 ‘트럼프 스톰이 돌아왔다(Trump Storms Back)’며 강력해질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를 전망했다. 기성 정치권의 아웃사이더였던 트럼프 당선인은 상·하원은 물론 대법원까지 우군으로 확보한 노회한 대통령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요즘 뉴스를 장식하는 낯선 장면들은 곧 닥칠 ‘트럼프 스톰’의 예고편이다.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는 11월 29일 예정에 없던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트럼프의 25% 관세 엄포에 플로리다의 마러라고리조트로 달려간 것이다. 트뤼도 총리는 다음 날 X(옛 트위터)에 트럼프와 나란히 앉은 사진을 올리고 “트럼프 대통령(당선인), 지난밤 저녁 식사에 감사한다. 함께할 수 있는 일을 고대한다”고 썼다. 클라우디아 셰인바움 멕시코 대통령도 관세 부과 계획이 발표되자마자 트럼프와 전화 통화를 가진 뒤 “중국 자동차 회사로부터 공장을 설치하겠다는 제안을 받은 바 없다”며 중국과 거리 두기에 나섰다.
아직 출범도 하지 않은 트럼프 2기가 전 세계를 뒤흔들고 있다. 미중 의존도가 높은 한국 경제는 타격이 더 크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은 트럼프 2기에서 20%의 보편 관세를 부과할 경우 대미 수출액은 304억 달러, 총수출액은 448억 달러 감소할 것으로 추산한다.
한국으로서는 트럼프의 방위비 분담금 발언에도 비상이 걸렸다. 트럼프는 대선 유세 기간 한국을 ‘머니 머신(money machine)’이라면서 “내가 대통령이었다면 한국은 (방위비로) 연간 100억 달러를 냈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2026년 방위비 분담금으로 정해진 액수(1조 5192억 원)의 9배다.
이런 가운데 고인이 된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가 새삼 소환되고 있다. 2016년 11월 당시 트럼프의 당선이 확정되자마자 아베 총리가 금으로 도금한 골프채를 들고 트럼프를 만나 친목을 다진 사례는 전설처럼 회자된다. 당시 아베의 골프 외교는 대대적으로 보도됐지만 정작 미국의 대일 정책에 영향을 미친 ‘아베의 지도’는 덜 알려져 있다. 아베 총리를 십수 번 인터뷰한 후나바시 요이치 전 아사히신문 주필에 따르면 아베는 트럼프를 만날 때마다 미국 지도를 보여주며 “지난번 만났을 때보다 일본 기업이 미국에 이만큼 투자했다”고 설명했다. 트럼프는 “매우 이해하기 쉽다”며 만족했고 재임 기간 미일 동맹은 끈끈했다.
트럼프 1기 ‘아베의 지도’는 트럼프 2기에는 ‘윤석열의 지도’로 대체할 수 있다. 현대차그룹이 미국 조지아주에 지은 전기차 전용 공장(HMGMA)이 대표적이다. LG에너지솔루션은 조지아주 현대차 합작 공장, SK온은 켄터키주 공장의 가동을 앞두고 있다. 조 바이든 정부 출범 이후 한국 기업의 대미 투자액은 공개된 규모만 104조 원에 달한다. 미국 리쇼어링(제조업의 본국 회귀) 열풍 속에서 한국 기업이 미국 현지에 일자리 2만 개를 창출해 최대 공헌국으로 꼽히는 점도 ‘윤석열의 지도’에 담아야 한다.
트럼프 맞춤형 대화도 필수다. 트럼프가 한 가지 주제에 집중하는 시간이 짧은 만큼 상세한 정보도, 배경 설명도 불필요하다. 그래서 팀 쿡 애플 최고경영자(CEO)의 대화법이 주목받는다. 쿡은 식사를 하면서 친분을 쌓았고 대화를 나눌 때도 한 가지 문제만 다뤘다고 한다. 더 중요한 것은 ‘매드맨(madman) 전략’을 펴는 트럼프가 어떤 황당한 제안을 해도 ‘노(no)’가 아닌 ‘딜(deal)’로 대응해야 한다는 점이다. 트럼프의 행동을 예측할 수는 없지만 트럼프가 ‘이익을 좇는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런 면에서 트럼프는 미국 제26대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와 겹친다. 헨리 키신저는 루스벨트를 “국익이라는 개념에서 미국을 세계와 연계시키는 것이 미국의 의무라고 주창한 최초의 대통령”이라고 했다. 한국과는 악연이다. 루스벨트 집권기 가쓰라·태프트 밀약으로 미국의 필리핀 지배권과 일제의 대한제국 지배권이 사실상 교차 승인됐다.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 루스벨트가 유진 초이에게 “상냥한 말과 커다란 채찍을 들고 조선으로 가라”고 했던 장면이 쓰라린 이유다. 트럼프는 ‘상냥한 말’과 ‘커다란 채찍’ 대신 ‘거친 협박’과 ‘관세 폭탄’을 전 세계에 투하하고 있다. ‘트럼프 스톰’에 갇혀 길을 잃지 않으려면 지도와 나침반을 갖고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 ‘트럼프의 귀환’이 어떤 국가에는 재앙일 수 있지만 모든 국가에 위기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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