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신문 권신영 기자】 지난해부터 급발진을 주장하는 교통사고가 급증한 가운데, 국가에서 급발진을 인정한 사례는 전무하다. 이에 전문가들 사이에서 급발진 판정에 이용되는 EDR 기록에 대한 신뢰 문제가 불거지고 있다.
2일 행정안전위원회 소속 국민의힘 조은희 의원실이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이하 국과수)으로부터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올해 1월부터 10월까지 국과수가 감정한 급발진 주장 사고는 114건이었다.
국과수가 감정한 급발진 주장 사고는 지난 5년 동안 382건에 달했으나, 이 중 급발진이 인정된 사고는 0건이었다. 급발진 주장 사고는 연도별로 ▲2020년 45건 ▲2021년 51건 ▲2022년 67건 ▲지난해 105건 등으로 지난해 들어 대폭 증가했다.
국과수가 급발진 주장 사고를 감정할 때는 사고기록장치(EDR) 데이터 분석, 페달 블랙박스 확인, 페달과 신발에 남은 흔적을 검사하는 감정기법 등을 이용한다.
지난 7월 서울시청역 인근 교차로에서 60대 운전자 A씨가 몰던 제네시스 차량이 일방통행 도로를 역주행하다 인도로 돌진해 9명의 보행자가 사망한 사고가 발생했다. 경찰은 EDR 기록 분석에 따라 제동페달 미작동 사실을 파악했고, 사고 원인이 차량 결함이 아닌 운전자의 조작 미숙인 것으로 결론냈다.
EDR은 완성차 제조사가 차량에 설치하는 일종의 데이터 기록용 블랙박스로, 사고 발생 5초 전부터 사고 직후 0.3초까지의 주행속도, 엔진 회전 수, 가속페달 밟음량, 브레이크 작동 여부 등의 정보를 담고 있다.
현행법상 한국에서는 자동차에 EDR을 장착하는 것이 의무가 아니지만, 2012년부터 자동차관리법 일부 개정법을 통해 사고 시 EDR 기록 공개는 의무화됐다.
미국은 이미 2012년부터 신차와 트럭에 EDR 탑재를 의무화했으며, 2022년에는 데이터 저장 기록을 5초에서 20초로 늘리기도 했다. 미국 고속 도로교통안전국 NHTSA에 따르면 현재 미국에서 판매되는 신차의 99.5%에 EDR이 장착돼 있다.
일본의 경우 지난 2022년부터 승용차에 EDR 장착이 의무화된 상태이며, 2026년부터 10인승 이상 버스와 3.5t 이상 트럭에 대한 EDR 장착을 의무화할 방침이다.
그러나 급발진 사고에 대해 EDR 기록을 결정적인 증거물로 신뢰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은 꾸준히 제기돼 왔다.
앞서 2022년 12월 강릉시 홍제동에서 A씨가 손자 이도현(당시 12세)군을 태우고 승용차를 운전해 주행하던 중 급발진 의심 사고가 발생했다. 이 과정에서 A씨는 크게 다치고 도현군은 숨을 거뒀다. 이 사고로 인해 A씨는 교통사고처리 특례법상 치사 혐의로 형사입건된 바 있다.
다만 경찰은 “기계적 결함은 없고, 페달 오조작 가능성이 있다”는 국과수의 감정 결과에 한계가 있다고 판단해 지난해 10월 A씨의 혐의에 대해 ‘증거 불충분으로 혐의가 인정되지 않는 사안’이라며 불송치했다.
국과수 분석이 실제 엔진을 구동해 검사한 결과가 아니며, 제동장치의 정상작동 여부 및 예기치 못한 오작동을 파악할 수 있는 검사 또한 아니라는 게 경찰 측 설명이다.
실제로 사고 당시 운전자가 가속페달을 최대로 밟았으며 브레이크는 전혀 가동되지 않았다는 것이 EDR에 기록된 수치였다. 차량이 뒤집히고 지하통로에 추락하는 순간에도 운전자가 페달을 100%로 밟았다는 것인데, 전문가들은 이에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이라고 입을 모았다.
대림대학교 자동차학과 김필수 교수는 “국내 자동차 80%에 블랙박스가 장착돼 있는데, 영상 블랙박스와 EDR에 기록된 두 가지의 자료가 맞지 않는 사건들이 많다”면서 “운전자가 사고 당시 충돌로 인해 페달을 밟을 수 없는 상황에도 가속페달이 100%로 눌려 있었다는 기록이 나오기도 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이 같은 사건의 경우 자동차 제작사도 공동 책임을 지고 급발진 원인을 밝히는 데 노력하자는 단서 조항을 둬야 한다”며 “무엇보다도 페달 블랙박스 설치가 중요하다. 사고가 차량 결함으로 일어났는지, 본인의 실수였는지 위변조가 어려운 영상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된다면 급발진 분쟁은 대폭 감소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