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릭스(BRICS, 브라질·러시아·인도·중국·남아프리카공화국) 국가들이 회원국의 통화로 결제가 가능한 다자간 결제 플랫폼을 만들겠다고 선포했다. 이른바 ‘브릭스 국경 간 결제 이니셔티브’(BCBPI)다. 달러 패권을 벗어나 보겠다는 취지인데, 반년 앞서 미국·영국·일본 등 기축통화국 주도로 출범한 국가 간 지급결제 개선 프로젝트 ‘아고라(Agora)’의 대항마로 주목된다.
◇ 브릭스, 러시아 주도로 ‘달러 패권 우회’ 추진
30일 외신 보도 등에 따르면 브릭스는 지난달 21일(현지 시각) BCBPI를 설명하는 내용을 담은 보고서를 발표했다. 지난 22일부터 24일까지 러시아 카잔에서 열린 브릭스 정상회의에 앞서 공개된 것으로, 브릭스가 이 프로젝트에 큰 관심을 두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브릭스는 BCBPI를 통해 무역결제에 있어 달러 의존도를 낮추는 것뿐만 아니라 미국이 감독하고 서방의 제재를 받는 스위프트(SWIFT·국제은행간통신협회)의 은행 간 통신 시스템을 우회하기 위한 인프라도 구축할 예정이다. 스위프트란 금융기관들이 안전하게 결제 주문을 주고받기 위해 사용하는 전산망으로 1973년 5월 출범했다. 현재 1만1000개가 넘는 기관이 참여하고 있다.
러시아는 지난 2022년 2월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후 미국 등 주요 7개국(G7) 주도로 스위프트의 결제망에서 축출된 바 있다. 이후 러시아 은행이 스위프트 결제망에서 전면 배제됐고, 러시아 중앙은행의 외환보유고 접근도 제한됐다. 이 조치로 인해 러시아는 수출 대금을 받지 못하게 됐으며, 국제 예탁소에 있던 러시아 계좌들은 동결됐다.
BCBPI는 또 블록체인 기술을 사용해 회원국들이 자국의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로 결제할 방법을 모색할 예정이다. 미국 달러를 사용하지 않고도 거래를 가능하게 하겠다는 취지다. 이를 위해 유로클리어(Euroclear)나 클리어스트림(Clearstream) 같은 서방 주도의 증권 예탁결제 시스템을 대체할 수 있는 ‘브릭스 클리어’(BRICS Clear)에 대한 연구를 제안했다.
브릭스 국가들은 정상회의 이후 낸 ‘카잔 선언문’에서 “브릭스 내에서 금융협력을 강화하겠다는 의지를 재확인했다”면서 “무역 장벽을 최소화하고 차별 없는 접근을 원칙으로 하는, 보다 빠르고 저렴하며 보다 효율적이고 투명하고 안전하고 포괄적인 국경 간 지불 수단의 광범위한 이점을 인식했다”고 했다.
◇ 국가간 지급결제 개선 ‘아고라 프로젝트’와 비교
BCBPI는 지난 4월 국제결제은행(BIS) 주도로 5개 기축통화국(미국, 영국, 일본, 프랑스, 스위스)과 멕시코·한국이 참여하는 국제시스템 개선 프로젝트인 ‘아고라 프로젝트’가 공개된 후 반년이 지난 뒤에 추진된 것이어서 눈길을 끈다. 기축통화국에 이어 신흥국도 국가 간 지급결제 개선 경쟁에 뛰어든 것으로 볼 수 있어서다.
BCBPI가 ‘탈(脫)달러’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라면, 아고라 프로젝트는 지급결제시스템을 개선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현행 국가 간 지급결제 시스템은 송금인이 보낸 돈이 수취인에게 도착할 때까지 다수의 중개기관과 여러 번의 환전을 거쳐야 하는 문제가 있다. 또 자금세탁방지(AML) 협약 적용 여부 등도 국가별로 달라 이를 하나씩 확인하며 진행해야 한다. 이로 인해 수수료가 비싸고 처리 속도가 느리다는 비판이 나온다.
아고라 프로젝트에서는 블록체인 기술에 토큰화(부동산이나 금융상품 등 전통적인 자산을 프로그래밍이 가능한 디지털 증표로 변환하는 과정)된 예금과 CBDC를 접목해 복잡한 절차를 간소화할 계획이다. 이 과정에 지급결제 시스템과 회계원장, 데이터 관리 시스템 등을 한데 모아 시스템이 더 효율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 지급결제 플랫폼을 만들 예정이다.
전문가들은 지급결제 개선 시도가 당장은 성과를 내기 어려울 것으로 보고 있다. 한은 관계자는 “토큰화 개념을 가지고 현행 지급결제 제도를 개선할 수 있는 방향을 모색해보자는 취지”라면서 “아고라 프로젝트가 어느정도 깊이까지 진행될지 당장 파악하기는 힘들며 얼마나 걸릴지도 알 수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BCBPI도 제안만 나온 단계인 것으로 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지급결제 시스템을 바꾸려는 시도는 계속될 것으로 전망한다. 홍기훈 홍익대학교 경영학과 교수는 “5년 내로는 현행 체제가 바뀌지 않겠지만 30~50년 뒤까지 유지될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면서 “이런 노력이 모여서 어느 순간에는 가시적인 효과가 나올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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