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은 1960~1970년대 산업화를 통해 경제 성장과 민주화를 동시에 이룬 성공적인 국가 모델로 평가받아 왔다. 그러나 현재, 경제와 안보 위기가 중첩된 복합적인 위기에 직면해 있다. 국민의 기대를 충족시킬 국가 리더십은 부재하며, 시대 흐름에 역행하는 갈등과 분열이 심화하고 있다. 특히 불확실성과 위험을 감수하며 경제를 이끄는 벤처기업인들은 현재 상황에 큰 좌절감을 느끼고 있다.
고 이민화 벤처기업협회 초대 회장은 예전부터 이런 위기를 국가 시스템 한계로 규정하며, 그 원인을 기득권에 안주한 혁신 부족에서 찾았다. 그는 이익집단이 자신들만의 규제와 정치적 영향력을 통해 국가 혁신 역량을 약화하고, 시대 변화를 막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런 문제는 오늘날 벤처기업 현장에서 여전히 확인되고 있다. 신산업과 기득권 간 갈등은 해소되지 않았고, 규제 완화도 더디게 진행되고 있다. 근로시간 개편과 국가 연구개발(R&D) 정책 미흡함은 기업인들에게 큰 실망을 안기고 있다.
올해 8월 국내 모 기관이 발표한 ‘정부·국회에 대한 인식 조사’에서도 드러난다. 조사에 따르면 국내 벤처·스타트업 10곳 중 6곳(58.8%)이 지난 4년간 정부와 국회의 벤처·스타트업 관련 입법·정책에 대해 아쉬움을 느낀다고 답했다. 반면 만족한다는 응답은 6.7%에 불과했다. 벤처기업인들이 정책의 실효성을 체감하지 못하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최근 국제통화기금(IMF)은 올해 대한민국 경제성장률이 2.2%에 그치고, 내년에는 2.0%로 예상했다. 반면 2024년과 2025년 세계 경제 성장률을 각각 3.2%로 전망했다. 미국의 경우 올해 성장률 전망치는 종전(7월)보다 0.2%포인트(P) 높은 2.8%였다.
글로벌 경제는 완만한 성장세를 보이는 반면 대한민국은 제자리걸음을 할 거란 전망이다. 대외변수에 취약한 개방경제 체계인 대한민국은 보호무역주의 강화, 중동전쟁 등 국제 정세가 불안할수록 더 큰 타격을 입게 된다. 달러당 1400원대를 위협하는 환율은 우리 경제 기반이 흔들리고 있다는 신호다.
세계 각국은 경제 성장을 위해 선제적인 정책을 시행하며 미래 산업 경쟁력을 강화하고 있다. 미국은 미국 역사상 가장 큰 규모 기후변화 대응 투자와 인플레이션 억제를 목표로 에너지 전환과 경제성장을 추구하는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을 시행했다. 또 미국 내 반도체 제조 역량을 강화하고 기술 촉진을 위해 총 527억 달러를 지원하는 반도체 보조금 정책까지 선제적인 조치를 취하고 있다.
특히 미국은 인공지능(AI) 분야에서도 압도적인 투자를 단행하고 있다. 모 기관에 의하면 전 세계 AI 투자 규모는 총 196조원인데, 미국 비중이 62%에 달한다. 반면 대한민국 투자 비율은 중국(7%)과 일본(2.4%)에 비해서도 한참 부족한 1% 미만이다. 곧 AI 기술력이 국가 경쟁력인 시대가 올 텐데, 전 세계가 AI 기술에 막대한 투자를 아끼지 않고 있는 데 반해 우리 정부와 국회에서는 이를 좌시하고 있다.
벤처·스타트업 정책을 보더라도 일본은 2022년 ‘스타트업 육성 5개년 계획’을 발표해 기본 틀을 마련했다. 연간 투자액을 2022년 8000억엔에서 2027년 10조엔 규모로 10배 이상 확대하며 10만개 벤처·스타트업을 창출하고, 아시아 ‘스타트업 허브’로 도약하겠다는 목표를 내세웠다. 일본은 현재 전 세계에서도 가장 적극적으로 창업을 장려하고 기업하기 좋은 국가로 변모하고 있다.
반면 대한민국 현실은 어떠한가? 현재 경제 활력을 찾아보기 힘들다. 주요 수출품목인 반도체 등 수요 하락과 글로벌 공급망 불안정으로 인해 수출이 감소하고 있다. 고물가와 고금리로 인해 소비심리가 위축돼 내수 경기가 활력을 잃고 있다. 또 저출산과 고령화로 인해 생산가능인구 감소가 경제 성장 제약요인으로 작용하는 등 긍정적인 요소는 찾아보기 힘들다.
정부는 정부대로, 국회는 국회대로, 민간은 민간대로, 각자가 가장 잘하는 일에 집중해야 한다. 하지만 작금의 상황을 보면 그렇지 못한 여러 상황이 나타나고 있다. 기업은 기본적으로 이윤을 창출하기 위해 존재한다. 이윤을 남기지 못하면 퇴출당한다. 적자생존이 지배하는 기업생태계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혁신을 통해 성장해야 한다. 기업 성장은 기업에 선택이 아닌 필수다. 이런 과정에서 기술이 고도화되고 일자리가 창출되고 경제가 발전하게 된다.
정부와 국회는 민간이 역동적인 혁신성장을 이끌 수 있도록 판을 깔아주고 적극 지원하는 한편 민간이 하지 못하는 부분에 집중돼야 한다. 민간투자 활성화를 위한 규제를 철폐하고 기업육성책을 마련하며, 노동생산성 향상을 위한 노동시장 개혁, 디지털 전환에 따른 산업 구조 전환, 첨단기술(AI, 반도체, 바이오 등) 산업 육성 등을 통해 민간이 이끌어가는 혁신성장을 위한 법·제도·정책 등 기반 등을 마련해야 한다.
벤처기업 초석인 기술기반 창업기업 수가 2021년 23만9000여개에서 지난해 22만1000여개로 7.59% 감소하며 신산업과 딥테크 분야 유망 창업기업 출현이 줄어들고 있다. 물론 그간 고금리 장기화와 벤처투자 둔화 등 그 원인을 찾을 수 있겠지만 그간 정부와 국회는 기업 지원정책을 통해 성장을 촉진하고 기업을 옥죄는 규제를 개선하겠다고 많은 대책과 제도를 내놨지만 실제 기업현장 목소리는 아직도 무엇이 바뀌고 개선됐는지 모르겠다는 반응이다.
특히 신산업 영역에서 기득권 세력과 충돌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것도 잠재적 원인으로 보아도 될 듯하다. 해외에서는 기업의 창업·성장을 저해하는 각종 규제를 과감하게 풀어 신산업을 장려하고 있는데, 대한민국에서는 오히려 시대를 역행하며 온라인 플랫폼 규제 법안(온플법)과 같은 규제를 도입하려고 한다. 기업 현장에서 아무리 발버둥쳐도 이러한 규제 기조가 변하지 않는 한 벤처기업 미래는 밝지 않다.
그럼에도 최근 중소벤처기업부와 벤처기업협회가 발표한 ‘벤처천억기업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벤처천억기업은 908개사로, 전년 대비 39개사 증가했다. 이들 기업은 총 235조원 매출을 기록했으며, 대기업(-4.3%)과 중견기업(-1.6%) 매출이 감소한 것과 달리 벤처천억기업은 매출이 3.5% 증가했다. 또 이들 기업 종사자 수는 전년 대비 3.0% 증가한 33만4000명으로 집계돼 경제성장과 일자리 창출에 있어 벤처기업 중요성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정부와 국회, 기업은 각각 역할을 명확히 수행하면서도 긴밀히 협력해야 한다. 정부는 민간 혁신 활동을 뒷받침할 규제완화와 정책 방향을 제시하고, 국회는 이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하며 실효성을 높여야 한다. 기업은 지속적인 혁신을 통해 경제성장을 이끌고 양질의 일자리를 창출해야 한다.
특히 글로벌 경쟁이 심화하는 지금, 각 주체는 단독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닌 상호보완적 관계를 기반으로 협력해야 한다. 정부와 국회는 민간이 도전과 성장을 이끌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고 민간은 이를 바탕으로 혁신 속도를 높여야 한다. 신뢰와 협력 회복이야말로 국가경쟁력을 강화하고, 경제와 미래를 책임질 유일한 해법이다.
벤처기업은 기존 틀을 깨는 혁신과 기업가정신을 통해 국가 경제를 활성화할 수 있는 막대한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벤처·스타트업을 지원하겠다는 약속이 공허한 메아리로 그치지 않으려면 실질적인 변화를 보여줘야 한다. 아직 늦지 않았다. 대한민국 경제를 일으켜 세울 수 있도록 정부와 국회가 현장의 목소리를 담아 적극 나서주기를 기대한다.
성상엽 벤처기업협회장·인텔리안테크놀로지스 대표 eric.sung@kova.or.kr
〈필자〉 성상엽 벤처기업협회장은 1972년생으로 대구 달성고, 연세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했다. 앤더슨컨설팅을 다니다 2004년 위성통신 안테나·솔루션 전문 기업인 인텔리안테크놀로지스를 창업, 2016년 코스닥에 상장했다. 2018년 전파방송기술대상 대통령 표창, 2020년 무역의날 장관 표창, 지난해엔 한국거래소 코스닥 라이징스타 선정, 광대역 국제위성통신 인증, 1억불 수출 탑을 수상했다. 2016년부터 벤처기업협회 부회장, 2020년 11월부터는 수석부회장을 역임하며 국가 경제 활성화와 벤처생태계 발전에 힘써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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