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뉴스프리존]편완식 미술전문기자=“그림은 늘 작가로부터 도망친다. 이거다 하고 그리고 나서 보면 뭔가 핵심을 비켜난 느낌이다. 가려운 데를 긁긴 긁었는데 영 시원하지가 않고 엉뚱한 곳을 긁은 그런 기분이라고 할까. 그러면 또 다른 데를 긁어보는, 그려보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늘 완성을 향하여, 마치 무지개를 좇듯이 스스로 만족할 만한 완벽한 결과를 향하여 그림을 그렸던 것 같다. 그런데 여기엔 뭔가 변화와 진보라고 할 만한 것은 있을지언정 완성은 없겠다는 사실이 어느 순간 자각되었다.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추구하는 것, 세상을 향해 무언가를 계속 토해낸다는 것이 무의미하고 허탈하게 느껴졌다. 그러한 마음의 상태와 개인적 사정이 맞물려 한동안 그림을 그리지 못했다.”(송명진 작가)
12년만에 송명진 작가가 개인전 ‘쉘 위 댄스(Shall We Dance)’를 28일부터 12월 28일까지 아트사이드갤러리에서 갖는다. 송명진은 자신과 회화의 관계, 자신과 삶의 관계에 대해 고심하며 그 문제를 미학적, 철학적인 고찰의 단계로 끌어올려 자신만의 독창적인 세계를 창조해왔다. 그는 우리의 삶에서 달콤한 꿈은 살아가게 하는 추동력이 되기도 하지만 잡히지 않는 신기루와 같아 현재의 내가 가진 것들에 대해선 눈이 멀게 한다고 말한다. 현재의 가치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맹목적으로 목표를 좇는 삶을 잠시 멈추고, 우리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이 순간으로 눈을 돌릴 필요성을 강조한다.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이 순간에 집중하자는 것이다.
‘Shall We Dance’시리즈에서 등장하는 기묘한 생명체는 송명진의 작품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이들은 인간의 형상이 축약되어진 것으로서 존재의 즉물성, 실존성을 상징한다. 작품 속 이들은 마치 군무를 하듯 일제히 한 방향을 향하고 있으며,화면 속의 희고 둥근 물체에 홀린 듯이 따라가고 있는 모습이다. 작가는 이들이 쫓고 있는 마치 공처럼 보이는 이것에 대해 그것은 규정할 수 없으면서도 비어있는 무엇을 상징하며, 좁은 의미로는 막연한 꿈이나 목표일 수도 있다고 설명한다. 현실을 뒤로한 채 앞만 보고 전진하는 삶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를 그동안 작업에 녹여왔다. 이제는 그러한 삶도 인정하고 통찰하면서 긍정적인 시선을 담은, 이전과 다른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배낭여행을 외국으로 떠난 적이 있다. 공항을 벗어난 나는 스스로 미래에서 온 인간처럼 느껴졌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에 도착한 듯한 풍경과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삶은 영악하고 극악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죽음조차 이들에겐 마치 축제처럼 여겨지는 듯도 했다. 그런데 만약 신의 눈으로 본다면 오히려 이들의 삶이 문명을 첨단으로 발전시키고 그 속에서 세련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보다 더 긍휼해보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신으로부터 주어진 생명력을 가장 활발발하게 쓰면서 삶과 하나 되어 치열하게 살고 있는 듯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도 그들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걸까? 무엇을 향해 가는 걸까? 죽음이란 결말이 스포일러 되었음에도 애써 전력질주하며 살아간다. 나 또한 그렇게 열성적으로 살아왔지만 한편으론 그게 참 허무하고도 이상했다. 그래서 이전의 작품에서 인간을 희화화(戱畵化)한 작은 캐릭터들을 통해 고군분투하며 사는 우리 삶의 모습을 회의적으로 표현했던 것 같다. 사실 그때나 지금이나 삶의 모습은 바뀌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난 여전히 해질녘 붉게 물든 하늘을 바라보면 가슴이 뭉클하고, 익숙한 멜로디의 발라드가 흘러나오면 마음이 애잔해지며, 뻔한 스토리의 드라마 로맨스에도 가슴이 콩닥거린다. 무언가를 꼭 추구하고 성취해야 의미 있는 삶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매 순간 맞닥뜨리는 삶의 경험 자체가 그 의미일 수도 있지 않을까. 마치 매순간 새로운 파도를 만나는 서퍼처럼 말이다. 이제는 그런 삶을 기꺼이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싶어졌다. 우리는 늘 무언가를 좇는다. 그런데 그것은 불안의 표출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춤이기도 하다. 흔들리며 함께 추는 춤, 그러므로 기꺼이 흔들리자. 함께 만만찮은 인생을 살아내고 있다는 애틋함과 동지애를 담아 쑥스러운 손을 세상을 향해 슬그머니 내밀어 본다. 우리 함께 춤….추실래요?”
그의 작품 ‘느슨한 죽음’에서는 아주 얇고 미약한 실 위에 널려서 축 늘어진 내장이 보여진다. 내장과 실의 극적인 대비는 자칫 실이 끊어질 수 있는 상황처럼 삶의 불안정함과 예측할수 없는 긴장감을 드러낸다. 몸 안에 응축되어진 내장은 실 위에 펼쳐져 재배치되었고, 굽이굽이 내걸려 반복되는 리듬은 원초적인 감각을 매개하며 삶의 연속성을 떠올리게 한다. 이러한 상황적 설정은 우리 스스로를 감각적이고도 존재론적으로 직면하는 계기가 되도록 의도하고 있다.
신작 ‘핑거 플레이(Finger play)1’에서는 줄을 타고 있는 손가락 인간을 발견할 수 있다. 떨어질 듯 아슬아슬한 이 현장의 분위기는 시각적 즐거움과 함께 긴장감을 전해준다. 깜깜한 밤처럼 어두운 배경에 얇은 실 하나에 의지한 손가락은 마치 조심스럽게 삶이라는 행로를 걷다가 강렬한 불빛에 놀라 순간 멈춘 듯한 모습으로 상상력을 자극한다.
‘핑거 플레이 3’에서 특이할 만한 점은 한 손은 원호를 긋고, 또 다른 손은 흰 공을 굴리며 구멍속으로 흰 공을 넣으려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어진 줄은 하나의 트랙이 되어 흰 공들이 원호의 트랙 위를 따라 굴러다니는데 이는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인간과 삶에 대해 탐구한 그는 과거 작품에서 인간을 희화화한 작은 캐릭터들을 통해 고군분투하며 사는 우리 삶의 모습을 회의적으로 표현했지만, 이제는 그런 삶을 기꺼이 받아들이고자 한다. 송명진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자신만의 세상을 결정한다고 말하며, 인간은 정해진 세상에 맞춰 사는 것이 아니고 그 세상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나’라는 주체가 만들어가는 것임을 시각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요컨대 그는 작품을 통해 삶을 바라보는 방식에 대해 조명하는 것이다.
사실 맹목적으로 목표만을 향하는 우리의 삶을 어찌 비판하기만 할 수 있을까. 송명진은 그러한 삶일지라도 기꺼이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삶의 긍정성을 찾아내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누군가는 ‘삶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 말하지만 이 또한 작가가 꾸준히 탐구해온 양가적인 특성을 드러내고 있는 대목이다. 송명진은 이러한 우리의 삶에 대해 조망한다. 그는 자신의 관점에 따라 다르게 펼쳐지는 세상과 그 세상에서의 삶에 대한 독특한 시선을 감각적 표현으로 풀어낸다.
“사실, 예술은 세상에 꼭 필요한 물건을 만들어 내는 일과는 같지 않기 때문에 작가는 늘 자신의 정체성, 역할에 대해서 무의식적으로 불안해하는 것 같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작가로서 내가 하는 일이 세상에 어떤 보탬이 될까, 다만 자족적인 일이기만 한 것은 아닐까 하는 질문이 계속 마음속에 고여 있다. 그림을 그리는 작가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보다 문득 떠오른 생각엔, 보이지 않는 것을 그림으로 가시화해서 그 보이지 않는 것을 다시 보는 이에게 전달하는 일이 아닐까 싶다. 여기서 ‘그림’의 다른 이름은 ‘보이지 않는 것’이고, 그 ‘보는 이’의 본딧말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이’ 일지도 모른다. 이 아이러니한 과정을 통해 무엇이 전달된 것일까? 작가가 내면에 있는 그 무엇을 시각적 장치를 통해 드러내면 관객은 그림을 통해 촉발된 그 무엇을 자신의 내면에서 느끼게 된다. 생각해 보면 참 우습다. 이 막연하고도 뭉툭한, 그림이란 매개를 통해 과연 무언가가 제대로 전달이 될 수 있을까? 사실, 작가의 입장에서부터 그 내면의 무엇이 시각적으로 명확하게 치환되었는지 미지수이기 때문에 그것을 보고 다시 무형의 것으로 내면화하는 관객의 입장은 더욱 모호해진다. 마치 예전의 TV 오락프로그램에서 서로의 말을 듣지 못하도록 헤드폰을 끼고 입 모양만을 보고 옆 사람에게 말을 전달하는 게임처럼 말이다. 하지만 정해진 답이 없는 그 모호함으로 인해 작품의 가능성은 넉넉해질 것이다. 그러므로 ‘유의미한 의미’가 아닌 ‘모호한 경험’이 작품의 존재 의미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작품을 매개로 우연찮게 이심전심으로 통하는 기쁨을 누릴 수도 있고, 보는 이의 가려운 부분을 긁어줬을 수도, 잠재된 미감을 자극해 새로운 즐거움을 안겨줬을 수도 있고, 잊고 살았던 정서를 소환했을 지도 모른다. 이렇게 서로의 내면에 있는 보이지 않는 것을 그림이라는 보여 지는 것으로 매개해 소통하는이 무형의 과정은, 마치 수화(手話)를 모르는 이들은 그 침묵의 대화에서 소외되지만 그들 사이에선 은밀한 대화가 이루어지고 있음에 비유할 수 있지 않을까? 여기서 더 흥미로운 점은, 그 둘 또한 결코 자신들의 대화가 서로 부합(附合)했는지 확인할 길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는 그럼에도 무대로 관객을 청하는 댄서가 되기를 기꺼이 자처한다. 작가는 단순히 그 붙여진 이름과 같이 분명한 의도와 계획, 확신으로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제작자이기만 한 것은 아니며, 내면에 떠오른 무엇을 시각화하고 그것을 다시 스스로 감상할 때까지 다양한 단계를 경험할 것이다. 작가는 자신의 막연한 무형의 영감에 대해 시각적 구체화를 시도해본 탐험가이자 실험가이며, 완성된 작품을 다시 감상하는 소비자이자 비평가이기도 하다. 내면에 얽혀있는 실타래에서 하나의 실마리를 찾아 살살 풀어낸 것이 그림이라면, 작가도 자신의 속내가 그렇게 생겼는지 그려진 그림을 보고서야 알게 된 최초의 목격자일 것이다. 이제 자신의 경험을 타인과 나누려는 작가는 마치 파트너를 무대 위로 청하는 댄서처럼 관객에게 무언(無言)의 말을 건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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