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의 피고인 최후진술 등 결심공판이 25일 마무리되면서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과 불법 경영권 승계 의혹 사건 항소심이 막바지에 접어든 모양새다. 2025년 1~2월쯤 재판부의 선고만 남았다. 어떤 결론에도 대법원 상고심까지 이어질 가능성이 큰 만큼 이 회장의 사법리스크는 당분간 지속될 전망이다.
초유의 경영 위기를 맞은 삼성전자에 주어진 시간은 많지 않아 보인다. 당장 코너에 몰린 반도체 사업에서 근원적 경쟁력을 회복하는 것이 절실하다. 사법리스크가 해소되지 않았음에도 이 회장으로선 리더십을 증명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외신도 이재용 회장의 행보를 주목한다. 영국 일간 파이낸셜타임스(FT)는 23일(현지시각)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경영 전면에 나선 지 10년이 지난 현재 사업 역량(mettle)과 관련해 가장 혹독한(severe) 시험을 치르고 있다”며 이 회장이 처한 상황을 짚었다.
FT는 이재용 회장이 부친인 고(故) 이건희 선대회장의 그림자 속에서 성장했다며 불량 휴대폰 15만대를 불에 태운 상징적 사건 등 품질 향상을 목표로 했던 이건희 회장의 노력을 소개했다. 또 이재용 회장이 인터넷 사업 확장 책임을 맡은 2000년 ‘e-삼성’ 프로젝트의 실패도 언급했다.
이재용 회장을 두고 “아버지가 더 전문적이고 능력주의적인 삼성을 목표로 했음에도 이재용은 재무적 성과를 통해 자신의 경영 능력을 입증하지 못했다”는 ‘삼성 라이징’의 저자 제프리 케인의 평가도 실었다.
시장의 이목은 이번 주 시행될 것으로 관측되는 삼성전자 사장단·임원 인사와 조직 개편에 쏠린다. FT 역시 AI 반도체 경쟁에서 뒤처져 심각한 문제에 직면한 삼성전자가 대대적 경영진 개편을 준비 중이라고 설명했다.
재계에서는 이 회장이 위기 극복 메시지를 담은 파격 인사가 나올 가능성을 제기한다. 이에 이정배 메모리사업부장(사장), 최시영 파운드리사업부장(사장), 박용인 시스템LSI사업부장(사장) 등 DS부문 각 사업부장을 대거 교체할 것이라는 추측이 나오고 있다.
엔비디아와 SK하이닉스의 밀월 관계가 점차 강화하는 가운데 반도체 업계는 삼성전자가 조직개편을 통해 고대역폭 메모리(HBM) 분야에서 SK하이닉스와 격차를 줄이는 데 역량을 집중할 것으로 본다. 특히 5세대 HBM인 HBM3E를 얼마나 빨리 엔비디아 공급망에 진입시킬지가 관심사다.
삼성전자 HBM3E의 엔비디아 납품이 초읽기에 들어갔다는 기대감 있다.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는 23일(현지시각) 홍콩 과학기술대 명예박사 학위 수여식에서 블룸버그TV와 만나 삼성전자로부터 5세대 HBM인 HBM3E 8단과 12단 모두 납품받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책임 경영을 위한 이재용 회장의 등기임원 복귀와 과거 미래전략실과 같은 그룹 ‘콘트롤타워’ 부활 필요성도 꾸준히 제기된다. 이 회장이 보다 적극적으로 구심점 역할을 하며 위기 극복에 나서야 한다는 주장이다.
전문가들은 삼성이 잔존한 사법리스크를 넘어 위기를 극복하려면 이건희 전 회장이 과거 보여준 행보처럼 과감한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총수의 리더십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항소심과 인사가 맞물린 연말연초 이재용 회장의 행보를 주목하는 이유다.
이경묵 서울대 경영전문대학원 교수는 “구성원들에게 강한 위기감을 조성하고 신경영이라는 혁신 전략을 앞세워 세계 1등을 만든 이건희 전 회장과 같은 모습을 현재의 삼성에선 찾기 어렵다”며 “단순 인력 구조조정을 넘어 총수가 주도적으로 위기를 극복을 하기 위한 리더십을 보여야 할 시기로 판단된다”고 말했다.
이광영 기자 gwang0e@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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