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본부의 일방적인 남녀공학 전환 논의에 반발해 집단행동에 나선 동덕여대 학생들이 총장실이 위치한 학교 본관에 대한 무기한 점거에 돌입했다. 학생들은 남녀공학 전환 시도로 갈등이 표면화됐지만, 사태의 본질은 학교 측의 소통 부재에 있다는 입장이다.
13일 동덕여대 학생들은 서울 성북구 동덕여대 본관을 점거하고 학교 측에 남녀공학 전환 논의 전면 철폐 및 학생들과의 소통체계 구성을 요구하고 있다. 집단행동을 주도하고 있는 총력대응위원회의 설명에 따르면, 학생들은 김명애 총장이 대화에 나서고 학교와 학생 간 소통협의체를 구성할 때까지 본관 점거와 수업 거부를 지속할 예정이다.
학생들의 집단행동은 학교본부가 남녀공학 전환을 논의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시작됐다. 학교는 지난 9월 학사제도 개편을 위해 설립한 대학비전혁신추진단 회의에서 학교 발전방안 중 하나로 디자인대학과 공연예술대학에 대한 남녀공학 전환 안건을 검토했으며, 지난 5일 각 단과대 교수들의 논의를 거쳐 해당 사안을 포함한 발전 방안을 발표했다.
해당 소식을 접한 학생들은 “학교가 학생들을 배제한 채 여성인재 양성이라는 학교이념을 무시한 학사제도 개편을 추진한다”며 거세게 반발했다. 11일 학생들이 총장실 점거와 학내시위 등 집단행동에 나서면서 학내 강의와 각종 일정이 모두 중단됐으며, 12일 밤에는 수백 명의 학생들이 학교 운동장에 모여 밤 11시까지 학교본부를 규탄했다. 학생들이 항의의 의미로 바닥에 던진 학과 점퍼(과잠)은 매일 늘어나고 있다.
학생들은 여대가 여전히 여성들에게 고유한 경험을 제공하는 공간인 만큼 남녀 공학 전환을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동덕여대 재학생 나현지 씨는 “남녀공학인 대학에서 학생과 교수들의 성차별적 언행을 보다 못해 동덕여대에 재입학했고, 이곳에 와서는 리더로 설 수 있었던 자리가 많아 자아를 찾는 데 큰 도움을 얻었다. 여대였기 때문에 이런 기회들을 얻을 수 있었다고 생각해 학교에 대한 자부심이 크다”면서도 “그런 와중에 여대가 공학으로 바뀐다고 해 뒤통수가 얼얼하고, 그 이유가 취업률 상승 등 근거 없는 이야기라 더욱 허무맹랑하게 느껴진다. 학교가 하루빨리 학생들과 만나 공학 논의를 철회하겠다고 확답을 주면 좋겠다”고 했다.
재학생뿐만 아니라 졸업생 등 여대의 가치를 지지하는 사람들도 함께 남녀공학 전환 반대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동덕여대 졸업생들은 “언니들 이러려고 돈 벌었다. 기죽지마 후배들아”라는 문구와 함께 학교 규탄하는 트럭시위를 진행했으며, 수백 장의 졸업장을 교내에 부착하기도 했다.
X(옛 트위터), 인스타그램 등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는 수많은 시민들이 동덕여대 학생들을 지지한다는 의미로 ‘소멸할지언정_개방하지않는다’는 해시태그를 달아 여대의 필요성을 게시하고 있다. 추후 발생할 수 있는 법적 분쟁을 위해 모금운동을 시작한 학생회 측 계좌에는 공지 8시간만에 2300여만 원이 모이기도 했다.
학생들 “소통은 거절하면서 ‘폭력시위’ 규정하는 학교. 너무 뻔뻔한 것 아닌가”
학교는 추후 교무위원회 보고 및 논의를 거쳐 모든 구성원들과의 의견수렴 절차를 계획 중이었다는 입장이다. 학교본부는 12일 총장 명의의 입장문을 내고 “아직 정식 안건으로조차 상정되지 않은 상태임에도 학생들의 폭력사태가 발생했다”며 “지성인으로서 대화와 토론의 장이 마련돼야 하는 대학에서 이 같은 폭력사태가 발생 중인 것을 매우 비통하게 생각한다”고 했다.
그러나 학생들은 학교 측의 논의 과정을 전혀 파악할 수 없었으며, 학교 측에 소통을 요구해도 전혀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고 반박했다. 총학생회는 13일 입장문을 내고 “학생대표자는 추진단의 구성원조차 아니며, 심지어 총학생회는 추진단을 비롯한 모든 정보를 총장의 입장문을 통해 할 수 있었다”며 “의견 수렴은 무엇을 위한 의견 수렴인가. 불과 이틀 전인 11일 예정됐던 처장단 면담은 처장단의 불참으로 인해 불발됐다”고 밝혔다.
학생들은 이번 사태의 본질이 학교 측의 소통 부재에 있다고 입을 모았다. 나현지 씨는 “학교가 남녀공학 전환을 시도하려면 학생들에게 미리 고지했어야 하는데, 학생들은 전혀 인지하지 못한 채 수 년간 논의가 이어져 오고 있었다”며 “그러다 해당 내용을 우연히 알게 돼 학교에 큰 배신감을 느낀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학교는 학생들에게 고지하지 않았을 뿐 수년 전부터 남녀공학 전환을 논의해 온 것으로 파악됐다. 공연예술대학 학장은 지난 11일 학생들과의 임원 간담회에서 “교수나 학교 단위에서는 우리 대학이 처해있는 교육환경과 미래지표들이 좋지 않은 것에 대비하기 위한 고민이 쭉 있어 왔다”며 “우리(공연예대)들은 학문의 특성 때문에 여학생들로만 작업하는데 한계가 있었다는 등의 불편함을 쭉 이야기해왔었고, 교수들은 단과대만이라도 남녀공학 전환을 추진하자는 이야기를 아주 오랫동안 해왔다”고 설명했다.
학생들은 이같은 학교 측의 소통 부재 문제가 어제오늘 일이 아니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동덕여대 재학생 A씨는 “지난해 학내에서 교통사고로 학우가 사망한 사건에 대해 학생들이 학교에 대책을 요구했었으나, 그때도 지금처럼 폭력사태로 규정할 뿐 소통은 없었다”며 “학사구조 개편도 시험 기간이나 방학 직전에 통보해 학생들이 의견을 낼 수 없는 등 비민주적인 소통 문제가 반복됐다. 이번 사태에서 학생들의 분노는 단편적인 일로 생긴 게 아니”라고 강조했다.
또한 학생들은 학교 측의 강경대응이 분노를 더욱 키우고 있다는 입장이다. 교직원들은 지난 11일 소음과 재물손괴 등을 이유로 서울 종암경찰서에 학생들을 신고했다. A씨는 “땅바닥에 앉아 시위하고 있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경찰이 출동했고, 그중엔 사복경찰마저 있었단 사실에 점점 더 분노한 것”이라며 “폭력시위로 규정하는 학교의 모습은 너무 뻔뻔한 것 아닌가”라고 지적했다.
반복되는 여대→공학 전환 논란…전국 여대 학생들 연대의 움직임
동덕여대를 비롯한 많은 여대가 수험생 모집의 어려움, 취업 시장에서의 경쟁력 하락 등을 이유로 공학 전환을 추진했으나 2000년대 이르러 공학 전환에 성공한 사례는 없다. 2010년 성신여대는 성신대로 학교명 변경을 추진했으며, 덕성여대와 성신여대는 각각 2015년과 2018년 공학 전환을 추진했다 학생들의 거센 반대로 모두 실패했다.
특히 성신여대는 최근 국제학부 신입생으로 외국인 남학생이 들어올 예정이라 학생들의 반발을 사고 있다. 광주여대 학생들 또한 외국인 남학생 정원을 확대하겠다는 학교 방침에 반대해 과잠과 전공서적을 교내에 던지는 시위를 진행하고 있다. 다만 성신여대 측은 “이미 국제 교류를 통해 10년 전부터 외국인 남학생이 대학에서 학위를 받아왔다”며 국제학부와 공학 전환은 관계가 없다고 해명했다.
이처럼 비슷한 위기를 겪고 있는 여대 학생들은 가장 큰 갈등을 겪고 있는 동덕여대 학생들에게 연대의 목소리를 보내고 있다. 성신여대 총학생회는 동덕여대와 연대를 선언하고 “여대의 존립 이유를 해치는 남성 재학생 수용을 중단하라”고 했다. 덕성여대 제40대 총학생회 ‘파도’는 “학생의 의견을 적극 수렴하지 않는 동덕여대 대학 본부를 강력히 규탄하다”며 공학 전환 논의를 즉각 전면 철회하라고 촉구했다.
숙명여대 총학생회 비상대책위원회도 12일 “우리는 이 사회의 여성만을 위한 공간인 모든 여자대학과 연대한다”는 내용의 성명문을 냈으며, 광주여대·서울여대·한양여대 등에서도 입장문을 발표하고 연대의 뜻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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