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찾은 독일 수도 베를린에서 약 80㎞ 떨어진 트로이엔브리첸시 펠트하임 마을에는 50기의 풍력발전기 날개가 쉴 새 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약 200m 높이의 웅장함과 함께 기다란 프로펠러가 바람개비처럼 360도 회전하는 그 모습 자체만으로도 장관을 이뤘다.
10년간 풍력발전기 한 개가 작동한 시간만 7만6767시간. 매일 24시간 내내 가동된 셈이다. 단순히 웅장한 자태를 뽐내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펠트하임을 넘어 독일의 에너지 원동력이 돼주는 기기가 바로 이 풍력발전기이기 때문이다.
공동취재팀은 세계가 주목하는 마을 펠트하임을 가이드 보리스 필립 씨와 함께 둘러봤다.
▲최대 수급원 풍력발전기…주민들도 동참
펠트하임을 한 문장으로 소개하자면 ‘에너지를 100% 자급자족하는 세계 유일한 마을’이라는 표현이 딱 어울린다.
펠트하임에 거주하는 인구는 총 130명, 최대 에너지 수급원인 풍력발전기는 50개에 달한다.
여기에서 생산되는 전력은 약 2억※(킬로와트시)로, 4만여 가구에 전력을 공급할 수 있는 양이다.
취재팀이 펠트하임 측의 허가를 받고 들어간 풍력발전기 내부에는 에너지 가동 현황이 잘 드러나 있었다.
취재 당일은 바람이 많이 불지 않는 무더운 날씨였지만 풍속은 5m/s 안팎을 유지했다. 보통 풍속이 2.5m/s 이상 돼야 전기 에너지로 변환될 수 있다.
모니터에 뜬 에너지 생성량은 54㎾(킬로와트)였다. 한 해 발전기 하나로 생성한 전기 에너지는 6733kWhH(메가와트) 정도다. 필립 씨는 “평상시에는 바람이 더 강하게 불어 에너지 생성량이 훨씬 많다”고 했다.
고층 건물 하나 없는 이 조용한 동네에 풍력발전기가 50개나 있다니, 이 동네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시작은 1995년이다. 청년 사업가 미하엘 라쉬만이 시정부에 풍력발전기 설치를 제안해 발전기 4기를 들여왔다. 라쉬만은 4기에 그치지 않았다. 추가 발전기를 설치하고자 끊임없이 주민들을 설득했다.
물론 처음에는 누구도 청년의 말을 쉽게 들어주지 않았다고 한다. 아무리 풍력발전기가 친환경에 좋다고 해도 4기뿐이라면 모를까, 무더기로 설치되면 소음 등 문제로 자신들의 일상이 파괴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다행히 라쉬만의 설득력이 마을 주민들에게 먹혔다. 그 이후로 라쉬만이 설립한 에너지 기업 ‘에너르기크벨레’와 주민들이 함께 현재까지 총 50개의 발전기를 설치했다.
친환경과 경제, 두 마리 토끼를 잡은 이유에서일까. 지금까지도 펠트하임 주민들은 100% 자급자족 시스템에 지지를 보내고 있다.
필립 씨는 “라쉬만이 주민들을 차근차근 잘 설득해 신뢰를 높인 게 성공의 요인”이라며 “주민들에게는 낮은 전기요금이라는 장점이 가장 크게 다가왔다. 처음에는 의문을 품었던 시선이 점차 긍정적으로 바뀌었다”고 설명했다.
▲돼지·소 ‘똥’이 에너지로 재탄생
그러다 2008년 12월에는 ‘바이오가스’라는 새 에너지원으로 범위를 확장하기 시작한다.
바이오가스가 추가된 동기는 친환경 에너지 확보 때문만은 아니었다. 당시 30여명으로 구성된 농업 협동조합의 수익성이 떨어지자 농업만으로는 마을 생계를 유지하기가 어렵다는 판단을 내렸다.
이들이 대안으로 선택한 바이오가스는 돼지와 소의 배설물 절반 비율에 숙성 옥수수와 밀을 추가로 섞어 39도의 열을 가하면 생성되는 열에너지다.
펠트하임에는 마을 전체에 전기와 난방 시스템이 연결돼 있다. 자체 생산한 열에너지는 배관을 타고 모든 가정에 보급된다.
취재팀이 바이오 처리장으로부터 50m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도 된장 섞인 듯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이 처리장은 24시간 가동돼 열에너지를 생산한다. 바이오가스의 원료인 옥수수 또한 펠트하임에서 재배하는 옥수수로 충당하고 있다.
따라서 난방 요금도 저렴하다. 주민들 말로는 다른 지역의 절반 가격이라고 한다. 자급자족 시스템으로 국가적으로 물가가 오르더라도 전기세와 가스비 상승 폭이 그렇게 크지 않다.
바이오가스 가동 여건이 좋지 않을 땐 목재를 태워 에너지를 생성하는 바이오매스를 통해 에너지를 만들어낸다. 펠트하임 마을 주변에 있는 나무들을 이용한다.
▲’1유로’ 부지…’태양광 대박’ 터졌다
2005년쯤 독일 정부는 군부지를 1유로로 에너르기크벨레에 매도했다. 이렇게나 파격적인 가격일 수 있었던 이유는 해당 부지가 황무지인 데다 미래 가치성도 없다는 독일 정부의 판단 때문이었다.
에너르기크벨레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이곳에 새로운 애너지원인 ‘태양열 패널’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2006년 설립이 시작된 태양광 단지는 2008년쯤 돼서야 완공됐다. 현재까지 설치된 패널만 9844개다. 이 태양광 패널은 햇빛이 오는 방향에 맞춰 자동적으로 움직이는 시스템이다.
필립 씨는 “태양광은 전기 저장 기능이 우수한 특성을 가지고 있어 빠져서는 안 될 핵심 에너지원”이라고 평가했다. 이처럼 풍력과 바이오가스, 태양광은 펠트하임의 에너지를 책임진다. 전체 생산 에너지의 1%만 펠트하임이 사용하고 있고, 나머지 99%는 외부에 수출하고 있다. 주로 타 지역 전력회사에 에너지를 판매하고 있다.
▲정부 뒷받침도 한몫… 에너지 자급자족 전세계 관심
세계적인 성공 사례로 남을 수 있었던 요인에는 정부의 뒷받침도 한몫한다.
난방 시스템의 경우 설치 비용만 약 172만유로(한화 약 26억원)이다. 이 중 주민들이 자금으로 보탠 금액은 13만8000유로(약 2억원)이고, 국가 보조금은 83만유로(약 12억원)다.
2000년 독일 정부가 제정한 재생에너지법의 혜택도 받았다. 대표적으로 전기 가격을 보장받았다. 펠트하임에서 친환경 요법으로 생산된 전기를 판매할 때 정부가 판매금을 일부 보장해 주는 것이다.
100% 자급자족 시스템이라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여파도 덜 받는 편이다. 실제로 독일 주민들의 말을 들어보면 한때 밤이 되면 촛불을 켜고 생활해야 할 정도였는데, 펠트하임 주민들은 이같은 돌발상황에 비교적 자유로운 편이었다.
이토록 펠트하임이 주민들의 참여율을 높일 수 있었던 이유는 에너지 운영권에 개입할 수 있는 방법이 까다롭지 않기 때문이다. 펠트하임 특성상 약 3000유로(약 450만원)를 내면 에너지 운영 분야에서 일종의 주주 역할을 맡을 수 있다. 정식 투자자와 함께 에너지 활용 방안에 대한 방향성을 제시하고 문제 제기를 할 수 있어 이른바 ‘프로슈머’가 되는 것이다.
펠트하임은 2010년 ‘바이오 에너지 마을’ 선정을 시작으로 2014년 ‘독일 솔라프라이스상’, 2015년 ‘ELER 이달의 프로젝트상’ 등을 수상하는 등 공로를 인정받고 있다.
기후위기 문제가 이슈화하자 전 세계에서 자급자족 시스템을 배우기 위해 펠트하임을 찾는 발걸음이 끊이질 않는다. 그럼에도 아직 펠트하임의 사례를 100% 구현한 마을은 없다고 한다. 주민들 간의 화합, 정부 지원, 재생 에너지 수급에 유리한 지형 조건 등 3박자를 모두 갖추는 게 여간 쉽지 않은 이유에서다.
펠트하임은 앞으로 수소에너지로 범위를 확장할 준비를 하고 있다. 필립 씨는 “미래지향적으로 봤을 때 친환경 에너지가 필요한 기업들이 앞으로도 펠트하임을 많이 찾아줄 것으로 기대한다”고 했다.
/글·사진 공동취재팀
#공동취재팀 – 인천일보 김혜진 기자, 중부일보 노경민·김유진 기자, 태안신문 김동이 기자, 낭주신문 노경선 기자, 당진시대 이지혜 기자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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