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세계대전에서 상등병이었던 히틀러는 (겉으론 다소곳하면서도 속으로 그를 낮춰보는) 장군들에게 단호하게 말하곤 했다. “(전쟁에서) 폭력은 가장 잔인하게 사용돼야 한다.” 전쟁에서 잔인한 폭력을 마다하지 말아야 한다는 히틀러의 말은 논리적으로 따져 보면 틀린 것은 아니다. ‘온건한 폭력’이란 (‘정직한 사기꾼’이란 말처럼) 모순어법이다. 문제는 나치 독일은 장병들의 민간인 학살을 사실상 눈 감아 주었다는 점이다. 영국 역사학자 리처드 오버리(엑서터대 명예교수, 유럽현대사)의 글을 보자.
[1941년 5월13일에 공포된 전시 군사법권에 관한 법령은 민간인에 대한 범죄를 군사법원의 영역에서 제외했다. 병사들이 ‘적대적 민간인’에게 저지른 범죄를 군사법원이 처벌할 의무도 중지했다. 법령은 이렇게 규정했다. ‘전투중이거나 도주하는 비정규군은 무자비하게 처형해야 한다.’ 그밖에 민간인이 보인 적대적 행위는 ‘현장에서 가장 극단적인 방법으로 억눌러야 한다.’ 공격을 받는 지역에서 피의자를 잡을 수 없는 경우에는 ‘집단적인 보복 조치’를 허용했다](리처드 오버리, 「독재자들」, 교양인, 2008, 716쪽).
민간인 학살에 사실상 면죄부
독일국방부 최고사령부가 명령문 형태로 내려 보낸 위 결정은 기본적으로 ‘적국 민간인을 망설임 없이 냉정하고 철저하게 처리하라’는 지침이나 다름없었다. 사실상 적국의 모든 민간인에 대해 온갖 종류의 폭력을 승인하는 것이었다. 이와 관련, 독일 역사가 볼프람 베테(프라이부르크대, 전쟁사)의 글을 보자.
[(독일군 지휘부는) 독일군 장병의 규율이 해이해질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위 명령의 내용을 사병들에게 천천히 알렸지만, 결국 모든 장병은 명령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이해하게 되었다. 즉 점령지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독일군 사법 체제가 이를 이유로 자신을 재판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이다](볼프람 베테, 「독일국방군」, 미지북스, 2011, 134쪽).
폴란드에서 유대인들을 죽인 101예비경찰대대를 포함한 치안경찰, 그리고 친위대 병력 일부가 포함된 특수기동대(Einsatzgruppen, 이동학살부대)는 나치 독일의 정규군인 독일국방군(Wehrmacht) 소속은 아니었다. 하지만 독일군 작전지역에서의 모든 재판 관할권은 국방군에 있었다. 따라서 국방군 검찰이 경찰 또는 친위대가 저지른 전쟁범죄를 처벌할 수도 있었지만, 그런 일은 한 번도 없었다(독일군도 민간인 학살 범죄를 저질렀다. 독일군은 손을 더럽히지 않았다는 이른바 ‘독일국방군 신화’에 대해선 곧 따로 살펴볼 참이다).
이렇듯 나치의 전시 형법은 민간인 학살을 저지르는 자들에게 너그럽게도 면죄부를 주었다. (지금 이스라엘 병사들이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 해온 짓처럼) 비무장 민간인들을 죽이는 것은 누가 뭐래도 전쟁범죄다. 바로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101예비경찰대원들은 1942년 7월13일 첫 학살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뒤 커다란 심리적 갈등을 겪었다.
“만에 하나 학살 임무를 다시 맡게 된다면 미쳐버릴 거야.” 대원들 사이에선 이런 거친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대원들의 심기는 몹시 불편했다. 상부에서도 그런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알아챘다. 이에 따라 첫 학살 현장인 유제푸프에서 루블린 쪽으로 이동한 뒤 주요 임무가 바뀌었다. 총살보다는 유대인 게토나 수용소 경비 쪽으로 돌려졌다. 학살 현장에 투입되더라도 직접 총을 쏘지는 않고 유대인들을 붙잡아 오거나 처형되길 기다리는 유대인들을 감시하는 일을 맡았다.
동유럽 극우 학살부대 트라브니키
유대인 학살은 ‘트라브니키 부대’가 맡았다. 포로수용소에서 끌어모아 학살 전문으로 훈련시킨 무장 집단이었다. 101예비경찰대가 머물던 루블린 지역은 전쟁 전 소련 영토였던 우크라이나 소비에트공화국과 경계를 맞닿은 폴란드총독 관구의 동쪽 끝이다. 소련에서 붙잡은 포로들과 유대인들로 말미암아 루블린 지역은 감옥과 수용소로 가득한 소름끼치는 곳으로 바뀌었다.
그 무렵 루블린 지역의 치안을 책임진 자가 친위대 간부 오딜로 클로보츠닉이었다. 그는 친위대 사령관 하인리히 힘러의 지시를 받고 루블린의 감옥과 포로수용소를 돌아다니며 굶주린 포로들 가운데 반공․반유대 정서가 짙어 보이는 자들을 뽑았다(힘러와 클로보츠닉는 1945년 패전 뒤 둘 다 독극물 캡슐을 깨물고 자살). 홀로코스트 연구자 티머시 스나이더(미 예일대, 동유럽사)는 그의 역작(The Holocaust as History and Warning, 2015)에서 유대인 학살 과정에서 포로들이 손에 피를 묻히는 궂은일을 대신해준 사정을 이렇게 전한다.
[힘러와 클로보츠닉은 폴란드 유대인을 학살하여 지도자(Führer, 히틀러)의 욕망을 실현할 방법을 발견했다. 굶주리고 사기가 꺾인 전쟁포로들이었다. 이들이 기아 수용소를 떠날 기회를 제안 받았을 때 거부한 사례는 알려진 것이 없다. 풀려난 포로들(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 벨라루스인, 리투아니아인, 라트비아인, 에스토니아인, 루마니아인, 타타르족, 피가 최소한 절반은 유대인인 자들도 포함)은 트라브니키 수용소에서 훈련을 받았다] (티머시 스나이더, 「블랙 어스: 홀로코스트, 역사이자 경고」, 열린책들, 281-282쪽).
포로들이 학살 훈련과 나치 이념의 세뇌 교육을 받은 곳이 트라브니키였기에 ‘트라브니키 부대’란 이름이 붙었다. 이들 전향 포로들은 곧바로 유대인 학살을 떠맡았다. 트라브니키 대원들은 다들 술에 취한 상태에서 유대인들을 죽였다. 그 지옥 같은 현장에서 견디려면 술의 힘을 빌려야 했을 것이다. 그들은 학살을 잊으려고 술을 마신 게 아니라 처음부터 만취상태였다. 집단학살 현장에서 한 손엔 총, 다른 한 손엔 술병을 들고 줄곧 술을 들이켰다.
학살 거듭하며 알콜 중독자가 된 중대장
트라브니키 부대에 학살 임무를 떠맡기고 101예비경찰대원이 팔짱만 끼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유대인들을 마을에서 잡아 모으는 과정에서 대원들은 이동이 어려운 노인과 환자, 어린이들을 죽였다. 트라브니키의 도움 없이 처음부터 단독으로 사살 임무를 맡아 나서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 무렵 대부분의 대원들은 트라브니키와 마찬가지로, 술을 많이 마셨다. 술을 멀리 했던 한 대원은 “대원들은 단지 유대인들을 많이 사살했다는 이유로 폭음을 했다. 학살자의 삶은 정말 맨 정신으로는 견디기 어려웠기 때문”이라 증언했다.
특히 2중대장 하르트비히 그나데 소위는 술에 절어 지냈다. 폴란드에서 학살을 거듭하면서 그는 알콜 중독자가 됐다. 친위대에서 파견된 다른 두 20대 중대장(대위)과는 달리, 그나데는 1894년 생으로 40대 후반 나이에 징집된 운송업자 출신이었다. 신념에 찬 나치당원이었던 그는 포악하고 잔인한 성격이었다. 술을 마시면 그 본성이 더 뚜렷이 드러났다. 기록을 보자.
[사살이 채 시작되기 전에 그나데 소위는 20~25명의 유대인 노인들을 골라냈다. 모두 긴 턱수염이 있는 남자들이었다. 노인들의 옷을 벗기고 구덩이 앞으로 기어가도록 했다. 그들이 벌거벗은 채 땅을 기는 동안 그나데 소위는 외쳤다. “내 하사관들은 어디 있나? 몽둥이 하나 없어?” 그러자 하사관들이 숲으로 달려가 몽동이를 가져와 기고 있던 유대인들을 세게 때렸다](크리스토퍼 브라우닝, 「아주 평범한 사람들: 101예비경찰대와 유대인 학살」, 책과함께, 2010, 129쪽).
그나데 소위와 그를 따르는 몇몇 경찰대원들은 (마을 광장에) 집결된 유대인들이 시끄럽다며 채찍을 마구 사용하기도 했다. 몇몇 유대인들은 무리가 역으로 떠나기 앞서 이미 거듭된 구타로 죽었다. 그나데 소위가 포악스러웠다면, 친위대에서 파견된 20대 후반 나이의 다른 두 중대장(대위)은 냉혹했다. 그들은 유대인들을 죽이며 표정 하나 흩트리지 않았다. 이들의 명령으로 유대인 학살을 이어가던 101예비경찰대원들은 (처음의 망설이고 괴로워하던 모습에서) 조금씩 그들 자신도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냉혹한 학살기계’로 바뀌어 갔다.
대원 1명 죽자 258명 보복 살해
1942년 8월25-26일 101예비경찰대에게 주어졌던 주요 임무는 미엥지제츠 지역의 유대인 1만 1000명을 바르사뱌 동북쪽 100km 떨어진 트레블링카 수용소(아우슈비츠와 같은 절멸수용소)로 떠나는 열차에 싣는 일이었다. 광장에 모인 유대인들은 8월 여름의 폭염 아래 쪼그리고 앉아 열차에 태워지길 몇 시간씩 기다렸다. 정신을 잃고 쓰러지는 유대인들이 잇달아 나왔다. 역으로 행렬이 움직이는 동안 쓰러진 유대인은 예비경찰대원들에게 사살됐다. 광장에서 역으로 가는 길 곳곳에 시신들이 널렸다.
역에서도 끔찍한 상황이 펼쳐졌다. 화물열차 한 량에 120~140명씩 말 그대로 꾸겨 넣었다. 유대인들은 목이 마르고 더위에 지쳐 초죽음이 됐다. 열차 한 량이 다 채워지면, 도망치지 못하도록 문에 못질을 했다. 트레블링카로 실려간 사람들은 대부분 치클론B 독가스로 죽었다. 그 뒤로도 101 예비경찰대원들은 여러 곳에서 잔혹한 임무를 맡았다. 세로코믈라 지역에서의 학살은 (트라브니키 부대원들의 도움 없이) 오로지 예비경찰대원들 손으로 이뤄졌다. 그곳에서 벌어진 일은 동유럽 유대인 학살의 한 전형을 보여준다.
[유대인들은 대원들에게 등을 돌린 채로 2미터 깊이의 비탈 앞에 나란히 세워졌다. 대원들은 명령에 따라 가까이에서 경부(목덜미) 사격을 실시했고, 총에 맞아 죽은 사람들은 비탈로 굴러 떨어졌다. 얼마 동안 순서에 따라 다음 유대인 무리가 같은 자리에 세워졌고, 그들은 앞서 사살된 가족과 친구들의 시체 더미를 내려다보면서 사살되었다. 이런 방식으로 여러 차례 사살이 반복된 뒤 사격병들은 사살 장소를 바꾸었다] (크리스토퍼 브라우닝, 157-158쪽).
그 집단학살 사흘 뒤 101예비경찰대원 하나가 혼자 돌아다니다가 세로코믈라에 가까운 탈친 마을에서 폴란드 반독 게릴라들에게 붙잡혀 죽는 일이 벌어졌다. 그러자 대대장 트라프 소령은 탈친 주민들을 학교로 모두 끌어다 놓고는, 그 가운데 78명을 보복 겸 경고 삼아 죽였다. 이들은 유대인이 아니었다. 곧 이어 세로코믈라 가까이에 있는 코츠크 게토에 사는 유대인 180명이 덩달아 보복 살해됐다. 독일인 1명 목숨 값이 폴란드인 257명이었다.
학살에 무감각해져간 대원들
그때쯤이면 대대장 트라프 소령도 예전의 심약했던 기독교인이 아니었다. 학살에 둔감해졌다. 처음 유대인 학살에 나섰을 때엔 눈물을 흘리며 신세 한탄을 했던 트라프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상부로부터 내려지는 학살 임무를 기계적으로 처리했다. 대원들도 마찬가지였다. 학살 명령을 처음 받았을 때 망설이고 뒷걸음질 쳤던 대원들은 잇단 학살 작전에 참여하면서 예전처럼 강한 거부감을 느끼지 않게 됐다. 이들의 심리상태에 관한 분석을 보자.
[대대 내에서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한 집단은 어떤 명령이든 수행했다. 그렇다고 학살을 자원하거나 즐긴 것은 아니다. 사살이 반복되자 대원들은 점점 무감각해지고 잔인해졌다. 자신들에게 주어진 희생자들에게 대해선 어떤 죄의식이나 미안함도 느끼지 않게 되었다. 그들은 전체적으로 자신들이 행한 일들이 잘못이라거나 부도덕한 일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히틀러나 힘러 등) 합법적인 권위자가 학살을 허가했다는 이유에서였다. 사실 그들은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 했으며 임무를 집행하면 그뿐이었다](크리스토퍼 브라우닝, 323쪽).
그런 가운데서도 학살조에 편성되기를 거부하는 대원들은 줄곧 나왔다. 그런 사람들 가운데 하인츠 부흐만 소위(1904년)가 있었다. 그는 함부르크에서 목재상을 운영하다가 징집돼 폴란드로 왔다. 나치당원(1937년 가입)이긴 했지만 부흐만은 유대인 학살엔 강한 거부감을 느꼈다. 대대장인 트라프 소령에게 함부르크로의 전출을 거듭 간청했고, 끝내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런 부흐만조차 함부르크 복귀를 바로 코앞에 둔 시점에서 학살을 지휘한 적이 있다. 부흐만의 마음을 이해해주며 전출 서류에 서명했던 트라프 소령이 다른 지역으로 잠시 가 있는 사이에 상부로부터 출동 명령이 떨어졌다. 내키지 않았지만, 부흐만은 부하들을 데리고 학살작전을 펼쳤다. 유대인 학살이 거듭된 시점에서 부흐만은 ‘내가 하지 않으면 누군가의 손에서든 유대인들은 어차피 죽을 운명’이라며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했을 것이다.
마지막 집단학살, ‘추수감사절 작전’
1943년 11월 101예비경찰대 안에는 유제푸프에서의 첫 집단학살에 참가했던 경찰 가운데 일부만이 남아 있었다. 그동안 학살임무를 거부한 대원들이 함부르크로 돌아가는 등 잦은 이동과 재배치 때문이었다. 많은 대원들이 바뀌고 새로 충원됐다. 바로 그 무렵 대대는 폴란드에서의 마지막 집단학살을 벌였다. 이른바 ‘추수감사절 작전’에서였다. 이와 관련, 크리스토퍼 브라우닝의 글을 보자.
[추수감사절 작전은 전체 전쟁 기간 중 독일인들이 유대인을 대상으로 벌인 최대 규모의 단일 작전이었다. 루블린 구역에서 4만 2,000명의 유대인이 학살됐다. 이 작전은 (우크라이나) 키이우 근처에서 3만 3,000명의 유대인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악명 높은 바비 야르(Babi Yar, 1941년 9월) 집단학살 사건을 훨씬 능가했다. 이 작전보다 희생자가 많이 나온 것은 1941년 10월 5만 명 이상의 오데사 유대인을 집단 학살한 루마니아 사례뿐이었다](크리스토퍼 브라우닝, 205쪽).
101예비경찰대대는 다른 경찰대대들, 그리고 친위대원들이 포함된 특수기동대(Einsatzgruppen, 이동학살부대)와 합동으로 ‘추수감사절’ 집단 학살의 모든 과정에 함께 했다. 1943년 11월13일 대대원들은 루블린 주변의 작은 노동수용소에 있는 유대인들을 끌고 동남쪽에 있는 마이다네크 집단수용소에 닿았다. 대원들은 5m 간격으로 수용소 안쪽까지 늘어서서 유대인들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감시했다.
[유대인들이 길 양편에 서 있는 경찰대원들의 울타리 사이를 지나 수용소로 들어가는 동안, 트럭에 장착된 2개의 커다란 스피커에서 다른 모든 소리를 뒤덮을 만큼 엄청나게 시끄러운 음악이 흘러나왔다. 그럼에도 그 소음을 뚫고 수용소로부터 쉴 새 없이 총성이 들려왔다](크리스토퍼 브라우닝, 209쪽).
시간이 흐르면서 마이다네크 수용소에는 루블린 인근 지역에서 강제 이송돼온 유대인들로 북적였다. 그들은 수용소 맨 끝에 있는 막사로 가 먼저 입고 있던 옷을 다 벗었다. 알몸이 된 유대인들은 두 손으로 목 뒤로 깍지를 낀 자세로 막사를 나왔다. 곧 이어 울타리의 작은 구멍을 빠져 나와 수용소 뒤쪽에 미리 (다른 유대인 수용자들이) 파놓은 대형 구덩이 쪽으로 끌려갔다. 학살은 하루 종일 이어졌다.
원형이 잘 보존된 마이다네크
마이다네크에서 그날 하루 동안 죽은 유대인이 얼마나 되는지는 정확히 알기 어렵다. 브라우닝은 이미 수용소에 있던 3500~4000명 정도의 포로들을 포함하여 희생자들의 규모가 1만 6500~1만 8000명으로 추산한다. 시신을 불태우는 연기가 며칠 동안이나 이어졌다. 불탄 시신이 풍기는 고약한 냄새 때문에 그 지역 주민들도 마이다네크 수용소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알 수 있었다. 독일인 학살자나 폴란드 주민을 가릴 것 없이 비위가 약한 사람들은 구역질로 구토를 했다. 그 뒤 이곳에선 아우슈비츠 수용소처럼 치클론B 독가스로 사람들을 죽였다.
몇 해 전에 마이다네크 수용소에 가봤다. 루블린 중심가에서 자동차로 15분쯤 거리다. 입구의 안내판을 보니, 1941년 7월 친위대 사령관 하인리히 힘러가 소련군 포로를 잡아넣을 요량으로 짓도록 했다고 한다. 최대 수용인원 5만 명 규모라 그런지 제법 넓어 보였다. 다 돌아보려니 서너 시간쯤 걸렸다. 수감자들을 죽인 독가스실, 희생자들이 남긴 신발 창고를 비롯해 학살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 방문객들의 눈길을 끈다.
폴란드와 독일의 수용소들은 대부분 전쟁이 끝나기 전에 나치가 (전쟁범죄의 흔적을 없애려고) 불태우거나 무너뜨렸다. 마이다네크 수용소는 원형이 잘 보존돼 있다. 소련군의 진격 속도가 너무 빨라 미처 파괴하질 못했기 때문이었다. 소련군이 1944년 7월 마이다네크를 접수할 때까지 그곳에선 유대인 6만 명을 포함해 적어도 8만~9만 명쯤이 학살당했다고 알려진다. 마이다네크에 딸린 작은 수용소들의 희생자를 더 하면 13만 명쯤이다.
4만 명 가까운 학살에 희미해진 ‘살인 기억’
루블린 일대는 ‘추수감사절 작전’ 뒤 히틀러가 꿈꾸던 ‘유대인 없는 지역’이 됐다. 함부르크의 보통 사람들로 이뤄진 101예비경찰대대의 학살 임무도 그것으로 끝났다. 브라우닝에 따르면, 1942년 7월13일부터 1943년 11월13일까지 1년 4개월 동안 101예비경찰대대는 적어도 3만8000명의 유대인 학살에 직접 가담했다. 강제이송으로 수용소로 보낸 유대인 숫자는 4만5000명쯤이다. 대원들은 “우리가 나서지 않았어도 저들은 어차피 죽은 목숨”이라고 자신들의 죄의식을 덜어내려 했다. 경찰대원들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이들 유대인들은 살아남았을까. 그 야만의 시대에선 누구라도 죽음을 피하기 어려웠다.
함부르크의 독일 보통 사람들이 루블린 일대를 ‘유대인이 없는 지역’으로 만드는 임무를 맡아 잔혹행위(학살과 강제이송)을 해내는 동안 101예비경찰대원들도 변해갔다. 훗날 전쟁범죄 조사과정에서 밝혀진 사실이지만, 이들의 죄의식이 옅어지는 것과 더불어 기억도 희미해져갔다. 1942년 7월 처음으로 유제푸프 마을에서 학살을 벌였을 때는 충격도 컸던 만큼 기억이 뚜렷했다. 그러나 그 뒤는 달랐다.
한 작전이 끝나면 다름 작전으로 곧바로 넘어갔기에, 학살을 거듭 할수록 구체적인 상황에 대한 기억이 흐려졌다. 특정 상황을 단편적으로 기억할 뿐, 전체적인 시간의 흐름 속에 학살사건들을 제대로 짚어내질 못했다. 지난주에 살펴봤던 (아기와 엄마를 살려줬던) 정두영 같은 연쇄살인마들이 수사기관에서 후반기에 저질렀던 자신들의 범죄 상황을 제대로 진술하지 못하는 것과 엇비슷하다.
처벌 받은 자는 극소수
전쟁이 끝나고 대원들은 다시 함부르크로 돌아갔다. 독일 패전 뒤 탈나치화 작업이 흐지부지 되면서 26명은 함부르크 경찰로 정규 채용됐다. 그렇다면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을까. 몇몇이 처벌을 받긴 받았다. 그것도 유대인 학살과는 관련 없는 탈친 사건 때문이었다(글 앞에서 101예비경찰대원 하나가 탈친 마을에서 폴란드 반독 게릴라들에게 죽었고, 그 보복으로 탈친 마을의 비유대인 주민 78명을 보복 겸 경고 삼아 죽였다고 했다).
발단은 엉뚱한 데서 터졌다. 함부르크로 돌아온 대원 하나가 그의 부인과 부부싸움을 벌였고, 그 부인이 “내 남편이 탈친 마을에서 폴란드 주민을 죽인 학살조였다”고 고발하고 나섰다. 취조 과정에서 그 남편은 대대장 트라프 소령과 부흐만 소위, 캄머 병장의 이름을 댔다. 1947년 10월 이들 4명은 폴란드로 압송됐고, 1948년 7월 단 하루 동안의 재판 끝에 트라프 소령과 부인이 고발한 남편 대원은 사형 선고를 받았다. 두 사람은 그해 12월 처형됐다. 부흐만은 8년, 캄머는 3년의 징역형을 받았다(골수 나치로 유대인들을 죽이기 앞서 가학적인 고통을 안겼던 그나데 소위는 독일 패망 직전에 전사했다. 그가 살아 있었다면, 1947년 폴란드 재판으로 처형됐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
독일 패전 20년 뒤 함부르크 검찰이 뒤늦게 101예비경찰대원들의 죄를 물어 기소했다. 1962년부터 1967년 사이에 검찰은 대원 500명 가운데 연락이 닿는 210명을 불러 조사했다. 최종적으로 14명이 기소됐다. 골수 나치 중대장이었던 볼라우프 대위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항소심을 포함해 1972년까지 끌었던 재판에서 볼라우프 대위는 8년, 호프만 대위는 4년, 드루커 소위에게 3년6개월의 징역형을 받았다.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의 이스라엘군의 경우에서 보듯이) 전쟁범죄를 제대로 처벌하기는 쉽지 않다. 101예비경찰대 말고 다른 경찰대대 출신이 전쟁 뒤 ‘전쟁범죄자’로 몰려 사법적 심판을 받은 경우는 거의 없었다.
누구라도 학살자가 될 수 있다
이제 글을 마무리해야겠다. 흉악범이 아닌 다음에야 보통 사람이 ‘나와는 다른 타자’를 죽여 없애야겠다는 살의(殺意)를 지니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미군 소총수들 가운데 15~20%만이 전투 중 맞은편의 적군에게 총을 쐈다는 연구결과는 우리 인간이 다른 인간을 죽이는 데 강한 거부감을 지녔음을 말해준다(데이브 그로스먼, 「살인의 심리학」, 플래닛, 2011, 36-37쪽 참조).
오늘 글에서 우리 모두에게 해당될 수 있는 무서운 사실을 하나 떠올리게 된다. 101예비경찰대의 사례에서 보듯이, 누구라도 학살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심성이 착한 사람이라도 타자를 폭력적인 방식으로 배제하는 정치 상황에 휘둘리면 얼굴 표정이 달라진다. 다른 민족이나 집단을 없애야 이롭다고 거듭 선동하는 정치군사 지도자를 만난다면, 학살집단의 일원으로 들어가 하루아침에 살인자로 손에 피를 묻히게 된다.
1990년대 발칸반도는 전반기엔 보스니아 내전, 후반기엔 코소보 내전으로 몸살을 앓았다. 그 두 곳에 각각 3차례에 걸쳐 현지취재를 가보니, 어제까지 넥타이를 매고 출근하던 이웃집 아저씨가 총을 들고 바로 옆 마을의 인종청소에 나서는 모습들이었다. 베토벤의 음악을 즐기고 괴테의 문학작품을 읽었을 독일 함부르크의 중․장년 보통사람들이 그렇게 학살자로 바뀌었다(먼 남의 나라 얘기할 것 없이, 6.25 한국전쟁 때도 그랬다). 학살 대열에 함께 하길 거부한 사람들은 ‘겁쟁이’가 아니라 참으로 용기가 있는 사람들이었다.
글이 길어졌다. 원래 다루려 했던 ‘골드하겐 논쟁’은 다음 주로 미룬다. 101예비경찰대대보다 훨씬 큰 규모로 학살을 저지른 부대가 친위대원들이 포함된 A,B,C,D 네 개의 특수기동대(Einsatzgruppen, 이동학살부대)다. 하인리히 힘러(친위대SS 사령관)-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제국보안본부RSHA 본부장)의 지시와 감독을 받는 이들 학살부대의 실상이 어떠했는지를 ‘골드하겐 논쟁’과 함께 다음 주에 살펴보려 한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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