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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일 분담해요’ 말하자 “혹시 페미?”…한국사회 지배한 ‘페미니즘 사상검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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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여성 노동자들이 페미니스트들에 대한 백래시(반발)로 인해 직장 안팎으로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가운데, 한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페미니즘 사상검증 현상이 여성들을 ‘심리적 해고 상태’에 빠트려 일상적으로 괴롭히고 있다는 분석이 나왔다.

한국여성민우회가 7일 서울 마포구 서울살롱에서 개최한 ‘페미니즘 사상검증 토크쇼’에 모인 페미니즘 연구자들은 지난 6월부터 7월까지 민우회가 수집한 페미니즘 사상검증 사례 43건 및 피해자 인터뷰 6건을 분석한 결과에 대해 이같이 진단했다.

이날 민우회가 발표한 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사상검증 피해자 87%는 여성으로, 이 가운데 20대가 34%, 30대가 61%로 젊은 여성 노동자들이 사상검증의 대상이 된 것으로 나타났다.

피해자들은 여대를 나왔다는 이유로, 특정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이용한다는 이유로, 집안일을 분담하자고 했다는 이유로, 성희롱하지 말라고 했다는 이유로 사상검증을 당했다.

사상검증은 업종을 불문하고 이뤄졌다. 일러스트레이터 주원(가명) 씨는 본인이 그린 일러스트에 특정 손가락 모양이 있다며 일부 인터넷 커뮤니티 이용자들의 비난을 받았고, 대학강사인 은정(가명) 씨는 학교에서 페미니즘 관련 수업을 하자 일부 학생들의 적대적 태도 및 외부 민원에 직면해야 했다. 사서로 일하던 한 피해자는 책 구매 시 페미니즘 관련 도서를 제외하라는 지시를 받기도 했다.

▲7일 한국여성민우회가 발표한 페미니즘 사상검증 사례ⓒ프레시안(박상혁)
▲7일 한국여성민우회가 발표한 페미니즘 사상검증 사례ⓒ프레시안(박상혁)

기업들은 사상검증으로부터 직원들을 보호하기보다 공범이 되길 택했다. 피해자들은 채용 과정에서 이력서에 여대 출신 또는 여성운동 관련 내용을 적었다는 이유로 면접관으로부터 지적을 받았으며, 직장에서는 페미니스트 색출 작업을 경험하거나 SNS 활동 통제, 상사 및 동료로부터 직장 내 괴롭힘을 겪었다. 작가 소명(익명) 씨는 SNS에 사상검증 피해자 지지 발언을 올렸다 계약을 맺은 출판사로부터 자제 요구를 받은 뒤 계약이 종료되기도 했다.

온·오프라인, 직장 안팎을 가리지 않고 벌어지는 사상검증에 피해자 83%는 아무런 대응도 못한 것으로 파악됐다. 어떤 대응도 긍정적인 결과를 기대할 수 없으며, 도리어 직장 동료들로부터 미움을 사거나 인사상 불이익을 겪는 것이 우려됐기 때문이다.

실제로 사상검증에 대응한 피해자들은 일상에서 직장 동료들에게 조롱을 당하는 것은 물론 상사로부터 결재문서를 모두 반려당하거나 동료의 일감을 몰아받는 등 업무상 불이익을 겪어야 했다.

피해자들은 이 같은 괴롭힘으로 인해 말과 행동이 필요 이상으로 위축됐고, 언제든 페미니스트라는 이유로 업무 배제나 계약 해지를 당할 수 있다는 불안 속에 근무하게 됐다. 한 피해자는 사상검증으로 인한 불안감과 공황 증세로 약을 복용해야 했다고 답하기도 했다.

▲7일 서울 마포구 서울살롱에서 한국여성민우회가 주최한 페미니즘 사상검증 토크쇼에서 페미니즘 연구자들이 참가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왼쪽부터 순서대로 신혜정 한국여성민우회 여성노동팀 활동가, 김현지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이슬기 프리랜서 기자, 배찬민 한국여성민우회 여성노동팀 활동가ⓒ프레시안(박상혁)
▲7일 서울 마포구 서울살롱에서 한국여성민우회가 주최한 페미니즘 사상검증 토크쇼에서 페미니즘 연구자들이 참가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왼쪽부터 순서대로 신혜정 한국여성민우회 여성노동팀 활동가, 김현지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이슬기 프리랜서 기자, 배찬민 한국여성민우회 여성노동팀 활동가ⓒ프레시안(박상혁)

연구자들은 페미니즘 사상검증이 갈수록 보편적인 현상이 되어 여성 노동자들을 옥죈다고 우려했다. 신혜정 한국여성민우회 활동가는 “2016년엔 페미니즘을 지지하는 티셔츠를 입었다는 이유로 사상검증이 발생했었고, 2020년 전후로 페미니즘과 관련한 단체나 SNS 게시물에 좋아요를 표시했다는 이유로 괴롭히더니 지금은 페미니스트라는 이유로, 혹은 여성 노동자라는 이유만으로 괴롭힘을 가하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고 짚었다.

김현미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도 “남성 중심의 문화를 가진 기업들은 능력 있는 여성들을 원하면서도 그들이 제 권리를 요구할 때에는 언제든지 ‘너 페미야?’라는 물음으로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며 “페미니즘으로 보이는 행위를 계속하면 해고가 올 것이란 경고를 통해 여성들을 ‘심리적 해고 상태’에 빠트리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이러한 현상이 지속·강화되는 이유로 중간관리자의 역할 부재를 짚었다. 그는 “누군가는 페미니즘 사상검증이 문제라고 말해줘야 하는데 상사들이 그러지 않고 있다. 도리어 ‘페미니즘이 우리 조직에 위협을 가한다’고 생각해 20·30대 남성들이 가진 심문의 통치술을 계속 지원하고 있는 게 가장 큰 문제”라고 꼬집었다.

연구자들은 사상검증 문제를 풀어가기 위해 가해자 중심의 언어부터 바로잡자고 제안했다. 젠더 관련 보도를 이어온 이슬기 프리랜서 기자는 “‘사상검증’, ‘논란’, ‘색출’ 등의 표현은 객관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는 가해자 관점의 언어다. 피해자 관점에서는 ‘괴롭힘’, ‘공격’, ‘폭력’이라고 부르는 게 올바른 표현”이라며 “실제로 머리가 짧다는 이유로 양궁 국가대표였던 안산 선수에게 가해진 괴롭힘을 ‘논란’이라고 보도한 한국 언론들과 달리 외신들은 ‘온라인 공격’이라고 명명했다”고 설명했다.

여성 노동자들을 괴롭히는 기업들에 대해 대규모 항의를 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김 교수는 “해외에서는 여성의 능력을 효율적으로 동원하기 위해 ‘비즈니스 페미니즘’을 활용하는 추세”라며 “세계 기업들과 달리 여성 노동자를 괴롭히거나 사과문을 쓰는 기업들에 대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는지 깨달을 수 있도록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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