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 독일은 1939년 9월 폴란드를 침공하고 1940년 4월 서유럽(벨기에, 네델란드, 프랑스)으로 전선을 넓혔다. 이어 1941년 6월 소련을 침공함으로써 유럽 전역을 전쟁의 불길 속에 빠트렸다. 히틀러는 2개의 전선(서유럽과 동유럽)에서 동시에 전쟁을 벌이는 전시지도자가 됐다. 7,000만 독일 국민의 단결을 이끌 겸 히틀러는 대규모 정치집회를 자주 열었다.
집회 때마다 히틀러는 “유대인의 씨를 말려야 한다”며 했던 말을 되풀이하는 장광설을 늘어놓았다. “전쟁은 유럽에서 아리안 족(독일민족)이 없어지든가 유대인이 없어져야 끝난다”고 목청을 높였다. 히틀러의 나팔수(선전장관) 요제프 괴벨스도 히틀러의 독설을 거들었다. 유대인들을 가리켜 ‘더러운 족속이며 벼룩’이라며 증오심을 부추겼다.
“유대인은 문명의 벼룩이다. 유대인은 어떻게든 뿌리를 뽑아야지 안 그러면 언제라도 사람을 들들 볶고 거추장스럽게 군다. 유대인은 지독하게 밟아버리는 것이 상책이다. 가만 두면 나중에 당하기 마련이다”(이안 커쇼, 「히틀러Ⅱ 몰락 1936~1945」, 교양인, 2010, 571쪽).
여기서 짚고 넘어갈 점 하나. 오늘날 이스라엘의 유대인들은 (특히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를 비롯한 정치인들은) 히틀러나 괴벨스와 다를 바 없는 어투로 그곳 원주민인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비하해왔다. ‘창녀의 자식’이라는 말은 그나마 점잖은 편이다. 차마 글로 쓰지 못할 인종차별적 쌍욕이 많다. 이스라엘 병사들이 인명 살상을 쉽게 여기는 것도 (히틀러를 따르는 골수 나치 병사들처럼) ‘나와 다른 타자’를 멸시하는 비뚤어진 우월감에서 비롯된다. 지난 1년 넘게 중동에서 벌어져온 학살은 ’21세기판 홀로코스트’다. 그렇기에 중동에선 ‘역사는 발전하지 못하고 뒷걸음질 친다’는 얘기마저 나온다.
지난주 글을 보고 한 독자분이 이메일로 질문을 보내왔다. “요즘 중동에서 유대인이 깡패짓을 하는데, 유대인의 고난을 다루는 기사를 쓰는 의도가 뭐냐”는 것이었다. “홀로코스트 기사가 지금의 유대인을 옹호해주는 것으로 비쳐질 수도 있다”고도 했다. 여기서 답장을 드린다. 한마디로 오해다. 그동안 몇 차례 밝혔듯이, 역사의 교훈을 찾아 되새김으로써 과거사를 거울삼아 평화를 일궈내자는 뜻이다(연재 73이 독자분 질문에 답이 될 만하니 참조 바람).
‘에덴 동산’ 만들기 위한 기동학살대
독일의 보통사람들 가운데 상당수는 (유럽의 뿌리 깊은 반유대 정서에 따라) 유대인을 ‘비호감’으로 바라보았다. 그렇다고 독일인 모두가 유대인을 ‘벼룩’이니 ‘세균 덩어리’로 여기면서 학살에 기꺼이 함께 하려 했던 것은 아니다. 나치 열성 지지자들처럼 마구잡이 폭력을 휘두르는 것은 ‘문명국가 독일’의 본모습은 아니라 여겼다. 더구나 그 자신이 유대인 학살에 나선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려웠다. 그렇지만 현실에서는 자신의 의지와는 달리 사살조로 편성돼 손에 피를 묻혔다. 그러면서 차츰 학살 환경에 익숙해져갔다.
크리스토퍼 브라우닝(노스캐롤라니아대, 독일현대사)은 독일의 보통사람들이 어떻게 냉혹한 살인기계로 바뀌어 히틀러의 전쟁범죄 공범자(하수인)이 됐는가를 추적했고, 1992년 큰 화제를 모은 역작(Ordinary Men: Reserve Police Battalion 101 and the Final Solution in Poland)을 냈다. 홀로코스트 연구 분야에서 그의 책은 (폴란드 출신의 유대인으로 나치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건너갔던) 라울 힐베르크(전 버몬트대 교수, 1926-2007)가 1966년에 낸 선구적인 역작(The Destruction of European Jews)를 잇는 기념비적 연구서라는 평가를 받았다. 오늘은 브라우닝의 책을 바탕으로 글을 이어나가려 한다.
1939년 폴란드 침공 뒤 나치 독일은 점령지역의 치안 유지와 더불어 유대인 문제를 처리해야할 필요를 느꼈다. 그 임무는 하인리히 힘러가 장악한 비밀경찰(게슈타포)과 치안경찰이 떠맡았다. 1939년 전쟁이 터졌을 때 치안경찰은 13만 명 규모였다. 그 가운데 1만 6,000명은 경찰사단으로 편성돼 레닌그라드 침공 작전에 동원되기도 했다. 폴란드 침공 바로 뒤 경찰대대 13개가 폴란드로 보내졌다. 그들의 임무는 △독일군 후방에 낙오돼 뿔뿔이 흩어져 있는 폴란드 군인들을 붙잡고, △폴란드 군이 도망칠 때 버리고 간 무기들을 수거하고, △전선 후방의 치안을 안정화시키고 △유대인들을 ‘처리’하는 것이었다.
소련 침공(1941년 6월22일) 초기의 잇단 승전 소식에 들뜬 히틀러는 1941년 7월16일 헤르만 괴링을 비롯한 측근들에게 이렇게 큰소리쳤다. “독일은 새로 점령한 유럽 동부지역에서 결코 물러나지 않을 것이다. 그곳에 ‘에덴동산’을 만들기 위해 모든 필요한 조치를 할 것이다.” 여기서 ‘필요한 조치’란 점령지 곳곳의 반독 게릴라와 유대인을 비롯해 ‘우리를(독일을)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보는 자들’의 제거를 뜻했다(크리스토퍼 브라우닝, 「아주 평범한 사람들: 101예비경찰대와 유대인 학살」, 책과함께, 2010, 36쪽).
전선 후방의 안정화 목표를 이루기 위해 치안경찰에 더해 더 무시무시한 조직이 꾸려졌다. 1941년 봄 모습을 드러낸 4개의 특수기동대(Einsatzgruppen, 이동학살부대)다. 주요 구성원은 친위대(SS) 사령관 하인리히 힘러의 최측근인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이끌었던 국가보안본부(Reichssicherheitshauptamt, RSHA) 소속의 비밀경찰(Gestapo)과 보안경찰(Sipo 또는 Kripo), 그리고 보안대(SD) 출신들이었다. 힘러의 친위대(SS) 군사조직인 무장친위대((Waffen-SS)의 소규모 병력도 이들과 함께 특수기동대를 구성했다.
여기에다 제9치안경찰대대의 3개 중대(500명)가 4개 특수기동대 속에 추가로 들어갔다. 처음 특수기동대의 총 인원은 3,000명쯤(치안경찰 500명 포함)이었으나, 폴란드 각지에서 유대인 학살이 본격화되면서 작전에 동원된 병력은 1만 1,000명을 웃돌았다(그 절반인 5,500명이 치안경찰로 채워졌다). 이들은 유대인들이 절멸수용소(아우슈비츠, 헤움노, 소비부르, 루블린, 베우제츠, 트레블링카)로 보내기 앞서, 게토를 둘러싸고 유대인들을 붙잡아 집단학살을 벌였다. 홀로코스트 연구자들은 ‘유대인 문제의 최종해결’의 1단계 작업이 이들에 의해 이뤄졌다고 본다.
평균연령 39세의 101예비경찰대대
전선이 확대되면서 치안 인력이 부족해지자, 치안경찰은 1901년에 태어난, 당시로선 징집대상이 아닌 중장년 예비군(총 인원은 91만 5000명)까지 경찰로 소집한 권한을 지니게 됐다. 그러면서 1940년 무렵 치안경찰은 24만 명으로 불어났다. 경찰대대는 모두 101개였는데, 그 가운데 중․장년 예비역들로만 구성한 대대를 ‘예비경찰대대’로 불렀다(크리스토퍼 브라우닝, 31-32쪽).
독일군의 소련 침공 1년 뒤인 1942년 6월 101예비경찰대대는 함부르크 역에서 열차를 타고 폴란드로 갔다. 500명 대원들 가운데 대부분이 함부르크와 그 인근 지역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들이었다. 독일 북부 항구도시 함부르크는 독일의 다른 지역에 견주어 ‘가장 덜 나치화된 지역’으로 꼽혔다. 그 지역 주민 다수의 정치문화적 정서는 ‘친나치’와는 거리가 있었다. ‘유대인 없는 독일’이라는, 히틀러가 꿈꾸는 ‘우월한 민족인 아리아인의 유토피아’를 세우자는 골수 나치 이미지와는 맞지 않았다. 대원들 가운데는 지난날 독일공산당원이나 (1920년대 바이마르공화국의 집권당이었던) 사회민주당원도 있었다.
대대의 구성원은 장교 11명과 행정병 5명, 그리고 하사관과 일반 대원으로 이뤄졌다. 전쟁이 터져 징집된 일반 대원(예비경찰)들은 함부르크의 직업적 분포를 그대로 반영했다. 부두 노동자와 트럭 운전기사가 가장 많았고, 보세창고 노동자, 선원, 건설노동자, 영업사원(판매원) 등 대부분이 하류 중산층 출신이었다. 소수이지만 중산층 전문직(교사와 약사 등) 출신도 있었다. 대원들의 나이는 절반 이상이 37~42세 사이로 평균 연령은 39세였다. 독일 정규군 병사들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셈이었다(크리스토퍼 브라우닝, 83쪽).
대대장 빌헬름 트라프 소령은 53세(1942년 기준)의 직업 경찰 출신이었다. 중대장은 3명으로, 그 가운데 2명은 히틀러 유겐트에서 활동했던 20대 후반 나이의 친위대(SS) 소속 대위였고, 나머지 1명은 40대 후반 나이로 징집된 운송업자 출신의 소위였다. 중대장 3명은 모두 반유대 정서가 매우 강한 골수 나치였다. 이 셋은 ‘유대인은 제거돼야 마땅하다’는 신념을 지녔고, ‘나치당원이지만 심성이 연약하고 군인답지 못하다’며 대대장 트라프 소령을 경멸했다.
학살 지시한 대대장의 눈물과 한탄
1942년 7월13일 이른 새벽 부대원들을 태운 트럭 행렬은 숙소인 비우고라이(바르샤바 동남쪽 소도시인 루블린 남쪽 마을)를 떠나 동쪽으로 20km쯤 떨어진 유제푸프 마을로 떠났다. 동틀 무렵 유제푸프에 닿자, 대대장 빌헬름 트라프 소령은 그 자신을 중심으로 부대원들을 반원형으로 모아 세우곤 그날의 임무를 설명했다. △마을에 사는 유대인들을 붙잡아 모은 다음, △노동 능력이 있는 남자 유대인을 골라 루블린의 수용소로 보내고, △나머지 유대인들(병약한 성인 남자, 여자, 어린이 등)은 숲으로 끌고가 죽여야 한다고 했다.
대대원들은 말없이 듣고 있었지만 다들 속으로 놀랐다. 분위기를 짐작한 트라프 소령은 한 가지 조건을 내놓았다. “대원 가운데 이 임무를 감당할 자신이 없다면, 앞으로 나오라”고 했다. 3중대 대원 한 사람이 대열 앞으로 나섰다. 그 모습을 본 3중대장(친위대 장교) 볼프강 호프만 대위가 몹시 화를 내며 비난을 쏟아냈다. 트라프 소령이 그런 호프만에게 ‘조용하라’며 말렸다. 그러자 10명(일설에는 12명)이 더 앞으로 나왔다. 트라프 소령은 그들에게 “소총을 반납하고 대기하라”고 했을 뿐 질책을 하진 않았다.
곧 유대인 체포와 학살 작전이 벌어졌다. 대원들은 유제푸프 마을을 둘러쌌다. 주민 가운데 1,800명의 유대인을 마을 한 가운데 있는 광장으로 데려갔다. 병약해 집에서 나올 수 없거나 도망치려는 유대인은 현장에서 사살됐다. 총소리와 외마디 비명이 마을 곳곳에서 울려 퍼졌다. 유대인들이 모두 끌려오자, 광장에서 분류 작업이 이뤄졌다. 수용소에서 노동(사실상 노예노동)을 시킬만한 유대인 남자 300명쯤이 루블린으로 떠나고, 나머지 1,500명 가까운 유대인들은 숲으로 가는 다른 트럭들에 실렸다.
트라프 소령은 학살 현장에 가지 않았다. 마을 광장에서 서성대거나 임시 본부로 쓰던 마을 학교 교실에 남았다. 훗날 남겨진 여러 목격담으로 트라프의 그날 심리상태를 짐작할 수 있다. 한 대원의 증언에 따르면, 트라프는 가슴에 손을 얹고 “오 하느님, 왜 제가 이런 명령을 받아야 했습니까?”라고 한탄했다. 다른 대원은 트라프가 교실 의자에 앉아 ‘눈물이 얼굴에서 줄줄 흐를 정도로 어린아이처럼 몹시 울었다’고 했다. 대대장 운전병은 트라프가 이렇게 기도했다고 전한다. “언젠가 세상에서 유대인 학살에 대한 보복이 이루어진다면, 신께서 우리 독일인들과 함께 하시길…”(크리스토퍼 브라우닝, 97쪽).
친위대 장교. “너희도 희생자 옆에 누울 수 있다”
대대장 트라프 소령이 자신의 운명을 탓하며 슬픔에 잠겨 있을 때, 마을 인근 숲에서는 학살이 벌어졌다. 유대인 35~40명을 태운 첫 번째 트럭이 숲 가장자리 비포장도로에 멈추었다. 대원들은 각자 1명의 유대인을 맡아 함께 숲길을 따라 걸었다. 학살 장소에 이르자 얼굴을 바닥으로 향하도록 하고 일렬로 엎드리게 했다. 대원들은 그들을 뒤에서 내려다보며 총을 쐈다. 총성이 숲에서 들려오자, 마을 광장에서 다음 트럭을 타고 가길 기다리던 유대인들 사이에선 비명과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2개의 사살조가 교대로 유대인들을 죽였다. 1개조가 사살을 하는 동안 다른 1개조는 같은 길을 따라 유대인들을 끌고갔다. 2개 사살조는 하루 종일 시계추처럼 같은 과정을 되풀이했다. 오후가 되자 대원들은 자신이 몇 명을 죽였는지도 모를 정도가 됐다. 한 대원의 기억으론 “어쨌든 엄청나게 많은 숫자였다”고 했다. 누군가 학살 현장에 술병을 들고 오자, 너도나도 들이켰다.
‘원 샷 원 킬'(one shot, one kill)이란 말처럼 희생자를 겨냥한 사살이 정확히 이뤄진 것은 아니었다. 총알이 빗나가 희생자에게 엄청난 고통을 안기거나, 희생자의 뇌수와 피가 튀기도 했다. 대원들은 ‘유대인의 머리 아래 목등뼈(경추)를 겨냥하라’고 지시 받았지만, 몹시 흥분해 있었던 만큼 사격이 제대로 이뤄지질 못했다. 사살조 대원의 옷은 희생자의 몸에서 튀어나와 묻은 피․뇌수․뼛조각으로 범벅이 되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또는 학살을 저지른 뒤, 일부 대원들은 속이 역겨워 구토를 했다.
오후가 되면서 학살의 진행 속도가 너무 느려 그날 하루에 끝낼 수 없어 보였다. 그러자 그때껏 마을을 둘러싸고 있거나 광장에 있던 대원들도 사살조로 나섰다. 일부 대원들은 아침에 트라프 소령이 “못 하겠다면 앞으로 나오라” 했을 때 망설였던 것을 뒤늦게 후회했다. 그러면서 중대장 율리우스 볼라우프 대위에게 임무에서 빼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나치 당원이자 친위대원인 그로부터 살벌한 대꾸를 들었을 뿐이다. “그러면 너희도 바로 희생자 옆에 누울 수 있다.”
일부 대원들은 다른 방식으로 탈출구를 찾으려 했다. 일부러 옆으로 빗나가게 총알을 쐈다. 그런 일들이 자꾸 벌어지자, 현장 지휘관은 자동소총을 지닌 부사관들에게 확인사살을 하도록 했다. 다른 일부 대원들은 슬며시 숲을 빠져나와 가톨릭 신부의 사택에 숨었다가 한참 지난 뒤에 모습을 드러냈다. 숨어있는 유대인 수색을 구실로 마을을 돌아다니거나 마을 광장에서 서성거리기도 했다. 한 대원의 증언.
[동료들이 내가 함께 사살조에 들어가지 않는 것을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들은 나에게 혐오감을 표시하며 ‘나쁜 자식’ ‘겁쟁이’ 등의 말로 비난을 퍼부었다. 그러나 나는 내 행동 때문에 어떤 처벌도 받지 않았다. 나는 사살조 가담을 피하려 했던 유일한 대원은 아니었다](크리스토퍼 브라우닝, 107쪽).
집단학살 첫날밤, 말없이 술만 마셨다
하루 내내 이어졌던 학살이 끝나자 마을 숲 곳곳은 시신으로 피범벅이 됐다. 땅에 묻을 계획을 아예 세우지 않았기에 시신들은 그냥 바닥에 버려졌다. 학살 임무를 마치고 저녁 늦게 숙소로 돌아왔을 때 대대의 분위기는 너무나 무거웠다. 브라우닝의 글을 보자.
[대원들은 침통했고, 화가 났고, 괴로워했고, 동요하고 있었다. 그들은 식사는 별로 하지 않고 술만 많이 마셨다. 술은 충분히 지급되었고 많은 대원들은 만취했다. 트라프 소령은 부대를 돌아다니며 ‘책임은 고위층에 있다’는 점을 거듭 강조하면서 대원들을 위로하려 애썼다. 그러나 술도, 트라프의 위로도, 막사를 지배했던 수치심과 공포를 씻을 수는 없었다](크리스토퍼 브라우닝, 111쪽).
대대장 트라프는 대원들의 불편한 심기를 짐작하고도 남았다. 그는 대원들을 달래는 한편으로 그날 숲에서 있었던 일들을 놓고 애기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사실 그런 말을 할 필요조차 없었다. 그 누구도 낮에 있었던 일을 입에 담고 싶어 하지 않았다. 대원들은 아무런 말 없이 술만 마실 뿐이었다.
그런 불편한 침묵이 잠자리에서의 악몽으로 이어지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학살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첫날 밤, 어떤 대원은 천장을 향해 마구 총을 쏘는 꿈을 꾸다가 잠에서 깼다. 학살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전쟁놀이’가 아니었다. 문제는 학살을 거듭할수록 대원들은 살생을 마치 일상적 업무처럼 여기게 됐다는 점이다. 사살조로 배치된 병사는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는 식으로 스스로를 거듭 다독이다가 차츰 ‘숙달된 살인기계’로 바뀌어갔다.
왜 학살을 거부하지 못했나
유제푸프 마을에서의 첫 학살 명령을 받는 순간 대원들은 다들 충격을 받았다. 미리 귀띔을 받지 않았기에 당혹감을 느꼈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기밀 유지 때문에 대대 간부들은 대원들에게 아무런 사전 통고를 하지 않았다. 그날의 작전 설명을 대대장으로부터 듣고 당황한 나머지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그렇기에 대대장이 “내키지 않는 사람은 앞으로 나오라”고 할 때 순간적으로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또 다른 큰 이유가 있다. 브라우닝의 설명을 들어보자.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결단을 내리지 못하도록)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었다. 제복을 입은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자신을 동료들과 동일시하며, 대열에서 성급히 빠져나오는 행동으로 집단으로부터 분리되지 않으려는 욕구가 크다. 대대장 트라프의 제안에 따라 앞으로 나선다면 ‘너무 약하고 겁쟁이’임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했다. 한 대원이 나중에 강조했듯이, 그 누가 감히 집결한 부대원 앞에서 체면을 잃고자 하겠는가?] (크리스토퍼 브라우닝, 114쪽).
그럼에도 그날 12명쯤이 학살 임무를 맡지 못 하겠다며 자신의 총기를 반납했다. 동료들의 따가운 눈길을 등 뒤로 받으면서도 그들이 앞으로 걸어 나오기까지는 용기가 따라야 했다. 그 뒤로 이들은 동료 대원들로부터 ‘겁쟁이’라는 따돌림을 받다가 함부르크로 돌아갔다. 전쟁국가인 나치 독일의 군 형법은 가혹했지만, 이들에게 명령불복종죄를 비롯한 어떠한 형사처벌이나 징계도 내려지지 않았다.
친위대 사령관 하인리히 힘러가 이 사실을 알았다면 어떻게 대응했을까. 그는 기회 있을 때마다 친위대 고위 간부들에게 ‘허약한 대원에게 관용을 베풀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의 최고 덕목은 복종이었다. 그는 입버릇처럼 이렇게 말하곤 했다. “어떤 대원이 정신적으로 극한 상태이고 심약하다고 느낀다면 그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좋다 너는 군복을 벗어라”(크리스토퍼 브라우닝, 118쪽).
홀로코스트 연구자 다니엘 골드하겐(하버드대)은 총살을 거부한 대원에게 징계나 처벌이 없었다는 사실을 중요하게 여겼다. 이를 출발점으로 삼은 그의 문제작 「히틀러의 자발적 처형자들」(Hitler’s Willing Executioners, 초판 1996년)은 101예비경찰대원들을 ‘적극적인 반유대주의자’로 못 박았다. 그의 책 제목대로, 유대인에 증오심을 지닌 독일의 보통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학살에 가담했기에 홀로코스트가 벌어졌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비판자들은 골드하겐이 ‘반유대 논리를 너무 일반화시킨 오류를 저질렀다’고 지적한다. 브라우닝만 해도 유대인 학살에 참여한 사람들이 모두 나치의 반유대 선전에 세뇌 당한 것은 아니며, 주어진 상황이 대원들을 학살 참여 쪽으로 몰고 갔다는 입장이다(이 문제를 둘러싼 이른바 ‘골드하겐 논쟁’은 다음 주 글에서 다시 다룬다).
연쇄살인범 정두영
겁쟁이란 소릴 들을 수 있고 불이익을 받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 그리고 동료들을 배신할 수 없다는 집단의식 때문에 학살 명령을 따랐던 대원들 가운데서도 나중에 이탈자들이 생겨났다. 그 뒤로 여러 차례 학살 작전에 참여한 뒤 “나는 더 이상은 못하겠다”고 대대장 트라프에게 전출을 요청할 경우, 다른 임무가 맡겨지거나 전출이 받아들여졌다. 물론 나치 친위대원 중대장은 딱 잘라 거절했다.
대부분의 대원들은 “내가 빠진다 해도 유대인들은 어차피 죽을 운명을 피할 수 없다”고 스스로를 달랬다. 학살에 참여한 대원들은 나름의 방식으로 자신의 죄의식을 덜어내려 했다. 이를테면 “제대로 목덜미 경추를 조준해서 한 방에 죽도록 해 불필요한 고통을 줄여주려 했다”는 따위다. 브레머하펜(함부르크 항구 서쪽의 작은 항구도시)에서 징집돼온 35세의 금속노동자가 남긴 증언은 그야말로 자기중심적인 ‘죄의식 덜어내기’로 보인다.
[나는 어린애만 쏘려고 노력했다. 엄마들은 대개 아이들의 손을 잡고 있었다. 내 옆의 동료는 엄마를 쏘았고, 나는 엄마의 아이를 쐈다. 왜냐하면 아이는 엄마 없이 더 이상 살아갈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엄마 없이는 더 이상 생존 불가능한 아이를 죽여 구제(救濟)한다는 것은, 말하자면 나에게 일종의 양심 달래기였다](크리스토퍼 브라우닝, 115쪽).
범죄심리학자나 프로파일러의 글들을 보면, 모든 범죄자는 자신의 범죄를 합리화하거나 죄의식을 더는 나름의 ‘양심 달래기용’ 탈출구를 갖고 있다고 한다. 지난 2000년 연쇄살인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정두영은 “내 안에 악마가 있다”는 말을 남겨 화제를 모았다. 1년 동안 9명을 죽이고 8명에게 중상을 입힌 정두영에게도 죄의식을 더는 탈출구가 하나 있었다.
정두영은 2000년 3월11일 부산의 한 가정집에 들어갔다가 40대와 50대 여성을 야구방망이로 때려 죽였다. 그 소란에 잠을 깬 어린 아기가 우는 가운데 30대 집주인 여성이 집에 들어섰다. 정두영은 그녀마저 죽이려 했으나 그만두었다. “아기가 있어요. 살려주세요”라는 짧지만 간절한 호소 때문이었다. 자신의 불행했던 어린 시절을 떠올린 정두영은 야구방망이를 내려놓았다(표창원, 「한국의 연쇄살인」, 랜덤하우스, 2005, 272-273쪽 참조).
아기와 그 엄마를 살려둔 것은 아주 잘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정두영이 죽인 9명이 되살아나는 것은 아니다. 정두영이 저지른 죄의 무게는 너무나 무겁다. 마찬가지로, 101 예비경찰대원이 “일부러 어린아이를 쐈다”지만, 어린 생명을 죽인 학살자라는 사실이 바뀌는 것도 아니다. 더구나 그 자신을 어린 희생자의 ‘구원자’나 ‘해방자’라 여기면서 민간인 살해라는 전쟁범죄 의식을 덜어내려는 논리는 사람들로부터 동의를 받기 어렵다.
“유대인 빨리 정리하는 게 인도주의적”
또 다른 자기 합리화 논리도 참고할 만하다. 동유럽 곳곳에서 유대인을 게토나 수용소에 몰아넣고 한편으로는 학살을 벌이는 와중에 나치 간부들 입에서는 ‘인도주의’라는 용어가 나왔다. 진정으로 유대인을 걱정해서 내뱉은 말이 아님은 독자분들도 금세 알아차릴 것이다. 1941년 7월16일자 폴란드 포젠 지역의 보안국(RSHA) 책임자이자 그 지역 친위대장이었던 롤프-하인트 회프너는 제국보안본부(RSHA)의 유대인 전담부서(제4국 B실 4과) 책임자였던 아돌프 아이히만 중령을 통해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RSHA 본부장)에게 이런 보고서를 올렸다.
[(지금처럼 유대인들을 수용소에 가두다간 식량부족으로) 유대인을 먹이지 못할 위험성이 있다. 노동 능력이 없는 유대인을 신속한 준비 과정을 통해 정리하는 것이 가장 인도주의적이지 않을지 진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이안 커쇼, 578쪽).
‘신속한 준비로 정리한다’는 것은 굳이 수용소로 데려올 것도 없이 현지에서 처형하거나 수용소에 데려오자 말자 가스실로 보낸다는 뜻이다. 사람이 굶어 죽는다는 것은 시간이 걸리고 그만큼 고통이 따른다. 그렇다면 차라리 독가스로 죽음을 앞당겨 주는 것이 ‘인도주의적’이란 얘기다. 20세기 중반의 유럽은 이런 궤변이 통하던 ‘야만의 시대’였다(21세기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의 240만 민간인들도 이스라엘 군의 마구잡이 폭력으로 지난 1년 넘게 ‘야만의 시간’을 겪도록 강요당했다). 글이 길어졌다. 이어지는 뒷부분은 다음 주로 넘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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