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줄거리」
이재원 유족회장은 ‘8·22 부천 화재 참사’ 시민 추모제에서 아들 현민을 떠올렸다. 명예 훼손, 책임 회피와의 싸움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다. 25년 전에는 보상금을 둘러싼 유언비어도 유가족들을 옭아맸다. 개별 설득, 합의 종용이 인천시의 수습 대책이었다. 인현동 화재 참사로 공직자 40명을 포함해 총 61명이 입건됐지만, 실형은 업소 관리자들에게만 집중됐다. ‘지혜 엄마’ 영순은 다시 법정에 섰다. 영순이 제기한 재해 사망 보상금 청구 소송에서 1심 판결은 ‘기각’이었다.
“뭔 소린지 알아듣지도 못하겠어. 너무 빨리 읽어가지고.”
법정 문을 열고 나오며 유족회 총무를 맡고 있는 김폰삼이 말했다. 그의 귀에 들어온 건 ‘기각’ 두 글자뿐이었다. 복도를 지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인천지방법원을 나설 때까지 영순은 아무 말도 없었다.
“정부에서 한 일인데 한꺼번에 뒤바뀌기는 어렵겠지. 판결문이 나오면 기각 사유를 봐야 돼.”
폰삼이 짐작한 대로 결정은 쉽게 번복되지 않았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인현동 화재 참사 이듬해 보상심의위원회의 ‘보류’ 판단이 시작이었다. 2003년 손해배상 소송 결과는 방점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지혜는 1999년 10월30일…시간제로 수당을 받는 단시간 근로자로 처음 고용되어 근무하던 고등학생이다.”
판결문에 기초 사실로 적시된 문장 한 줄은 20년 넘게 지혜를 ‘라이브Ⅱ 종업원’으로 낙인찍었다. 유족회가 보상 제외 근거를 질의한 2022년 7월 국민신문고 민원 답변에서도, 2024년 7월 재해 사망 보상금 청구 소송 1심 판결에서도 이 문장은 그대로 인용됐다.
종업원이었음을 증빙하는 서류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입증되지 않는 과거는 자료로 반증해야 하는 유가족의 오늘을 더욱 난처하게 만들었다.
▲애도의 시간은 존재하지 않았다
“항소를 했으니까 시간이 걸리더라도 지혜 문제는 어떻게든 결론을 지어봐야죠. 그냥은 못 넘어가요.”
25주기 추모제를 20여일 앞둔 금요일 저녁 인천학생교육문화회관에서 재원이 말했다. 유가족 8명이 앉은 공간 입구에는 ‘1999 인현동 기억저장소’라는 문패가 달렸다. 기억저장소는 24주기 때 학생교육문화회관에 추모 공간으로 만들어졌다.
학생교육문화회관 맞은편에선 학용품을 가득 쌓아놓고 ‘학생백화점’이 60년 동안 자리를 지켰다. 학생백화점 위로 이어지는 ‘자유공원로’ 한 편에선 떡볶이집이 마주보고 손님을 맞았다. 그리고 떡볶이집에서 시작되는 골목 중간쯤 ‘라이브Ⅱ’가 있었다. 기억저장소에서 직선거리로는 고작 100m에 불과했다.
학생교육문화회관 건립 계획은 인현동 화재 참사 이듬해 세워졌다. 청소년들에게 문화·여가 공간을 제공한다는 취지로 2004년 문을 열었다. 참사 희생자 넋을 달래는 위령비도 들어섰다. 건립 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생각해보십시오. 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걸고 국토 방위하다가 죽었는데도 추모비 하나 제대로 안 세워주는 판에 인현동 참사는 가서 먹고 마시고 놀다가 죽은 것이지. 사실 따지고 보면.”⑴
학생교육문화회관 건설 공사가 한창이던 2002년 7월 인천시의회에선 때 아닌 설전이 벌어졌다. “막말로 먹고 마시고 놀다가”를 외치는 의원 질의에 인천시교육청 간부 공무원은 “이유야 어떻든지 간에 불행한 일”이라고 해명하는 데 급급했다. 사실 애도의 시간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언제까지나 저희 학생들과 청소년들을 무시하는 행정을 하신다면 제2의 인현동 참사는 일어나고 말 것입니다.”⑵
친구들을 향한 곱지 않은 시선을 견디다 못해 인천 15개 고등학교 학생회장들은 성명을 썼다. 참사가 벌어지고 보름이 지난 무렵이었다. 인천시교육청과 학교들은 긴급회의를 가졌다. 기성세대 잘못을 지적한 성명은 끝내 어른들의 압력으로 빛을 보지 못했다. 학교의 명예 앞에서 희생자의 명예는 온데간데없었다.
“힘없는 사람들만 당하는 거지. 25년을 이런 식으로 보내고 있는데.”
유가족 모임에서 지혜 재판 소식을 전해들은 김동한이 씁쓸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그러고는 기억저장소 한쪽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흰머리칼 갈대처럼 넘실거려 하얀 물결 숲을 이루고…까칠한 손등엔 굳은살이 자라났다.”
그의 시선이 닿은 벽에는 시화가 걸려 있었다. 지은이는 김태연, 제목은 ‘아버지’였다.
▲참사에 ‘만약’은 성립하지 않았다
“엄마, 나 동인천 갔다 올게.”
퇴근하고 돌아온 태연은 바바리코트를 걸치고 집을 나섰다. 인천여상 졸업반으로 그해 여름부터 계양구 효성동 아남반도체에서 현장 실습을 하고 있던 때였다.
검단에 살았던 태연은 동인천역 너머 인천여상까지 왕복 2시간 거리를 통학했다. “그렇게 3년을 고생해서 다니고” 취업하더니 정직원이 된다고 가족들에게 자랑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틀만 지나면 정직원으로 발령받는 11월이었다.
친구들을 석 달 만에 만나는 장소가 하필이면 그곳이었다. 사회생활에 들뜬 인천여상 3학년 학생 10명이 생일 파티를 겸해 모이기로 약속한 자리였다. 지혜와 현민이가 있었던 ‘라이브Ⅱ’ 어딘가에 태연도 친구들과 함께 앉았다.
“문 잠가.”⑶
시끌벅적한 소음을 뚫고 고함이 터졌다. 연기가 새어 들어오는 출입문은 닫혔다. 끝내 살아남은 관리사장은 “돈 내고 가라”며 유일한 탈출구를 가로막았다. 석고보드 장식에 가려진 대형 통유리로는 한줄기 빛도 들어오지 않았다. 화재로 정전이 되면서 120명 가까이 들어차 있던 ‘라이브Ⅱ’는 순식간에 어둠에 휩싸였다.
단속을 피하려고 업주 ‘정민하’가 내민 돈 봉투를 경찰과 공무원들이 받지 않았다면 폐쇄 명령을 받은 ‘라이브Ⅱ’는 존재할 수 없었다. 애초에 ‘일반음식점’으로 분류된 그곳은 청소년 출입이 허용된 공간이었다. 출입문이 잠기지 않았다면, 유리창만 가려져 있지 않았다면 2층에서 대피가 불가능한 상황도 아니었다. 3층 당구장에선 사망자가 1명도 나오지 않았다.
“문만 열려 있었어도 살았을 텐데. 다 키웠잖아. 다 컸는데.”
그날 깜깜해진 밤에야 동한은 인천의료원에서 태연을 찾았다. 까칠한 굳은살이 자라난 손으로 바바리코트를 입은 딸을 어루만졌다.
‘만약에’로 시작하는 질문은 25년간 계속됐다. 흐르는 시간 속에서도 질문은 지워지지 않았다. 돌아오는 답은 아무것도 없었다. 참사에 ‘만약’은 성립하지 않았다.
▲“여기 나오면 애들 이름을 불러주니까”
“양초하고 향부터 정리 좀 하고. 누가 해주지도 않으니까 내가 해야지 뭐.”
‘춘효 아빠’ 폰삼은 기억저장소에서 추모식에 쓰일 물품을 세어보고 있었다. 엿새 뒤면 25주기 추모제였다.
“그럼 막내가 해야지. 늙은이가 해?”
‘효정 아빠’ 이금우가 돌아보며 미소 지었다. 두 사람 곁으로는 ‘기억하겠습니다’라고 쓰인 팻말이 놓여 있었다. 인현동 화재 참사를 추모하는 하얀 리본도 책상 위에 한가득 놓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기억은 옅어졌다. 1주기 때만 해도 추모제는 동인천역 광장에서 열렸다. 세간의 관심은 차츰 시들어갔다. 홍예문문화연구소를 주축으로 시민사회가 추모 행사를 연 15주기 전까지 유가족들은 직접 음식을 준비하고 위령비에서 조촐하게 상을 차려 제를 지냈다.
기억의 공백은 유가족들 스스로 메웠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매달 서로를 만나 안부를 물었다. 자녀들이 맺어준 인연으로 어디에서도 풀지 못한 한을 덜어냈다.
“누구 엄마, 누구 아빠. 여기 나오면 애들 이름을 불러주잖아. 태연이 이름을 들을 수 있잖아.”
‘태연 아빠’ 동한은 딸의 이름을 듣고 싶어서 아내와 검단에서 동인천을 오갔다. 아들딸 이름을 듣고 부르면 다시 그때의 부모로 돌아갈 수 있었다. 가슴에 묻었던 아이들과 만나는 스물다섯 번째 10월30일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이순민·이나라 기자 smlee@incheonilbo.com
참고자료
(1)인천시의회, 문교사회위원회 회의록, 2002년 7월23일.
(2)홍예門문화연구소, ‘인천미래기억채집: 1999인현동 화재참사 기록’, 2022년 3월14일.
(3)인천일보 1999년 11월12일자.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