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이 발표된 뒤에 온라인-오프라인 서점에서 그 작품들이 며칠 새 수십만 부씩 팔리고 있다. 동네 서점에서도 책을 구하기 어렵고, 대형 서점을 가도 ‘매진’ 표시판만 마주하곤 한다. 한강의 작품은 물론이고 평소 다른 소설도 별로 읽지 않는 이들까지 느닷없는 이 ‘책 읽기’ 열풍에 기꺼이 뛰어든다. 더불어 한강 작가 자신이 작은 서점을 운영한다는 사실이 뉴스거리가 된다.
이런 열기는 현재 우리 사회의 또 다른 모습과 극명하게 대비된다. 요즘 한국 대학들은 도서관 장서를 내다 버리느라 바쁘다. 책을 쌓아두기에는 공간이 아깝다면서 애써 모아놓은 책들을 희귀도서들까지 모두 폐기 처분하고 있다. 보다 못한 대학 구성원들이 나서서 1인 시위도 하고 서명운동도 벌이고 나서야 겨우 선별 작업이라도 허락받는 형편이다. 한국 도서관 문화의 현실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이 나라에서 대학제도가 도달한 슬픈 종착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더 슬픈 것은 이게 대학 도서관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지금도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예산 삭감으로 점점 더 제 구실을 못하게 되거나 아니면 아예 폐쇄되는 공립 도서관들이 많다. 도서관뿐만 아니라 서점도, 굿즈샵에 더 가깝게 변해가는 대형서점을 제외하면, 줄지어 폐점하는 처지다.
이 모두가 다 그만큼 책을 찾는 이들이 적은 탓이다. 이것은 정말 엄청난 간극이다. 세계인의 인정을 받은 동네 서점 주인의 저작을 읽으려고 오프라인과 온라인에서 수십 만 명이 줄 지어 선 광경과, 평소 도서관과 서점에, 그러니까 책 읽기에 쏟는 관심과 열정이 너무도 부족한 현실은 전혀 다른 두 나라의 모습만 같다. 그리고 바로 이 심대한 간극 속에 지금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의식적인 집단적 노력의 무대가 있다.
‘책 읽기’를 둘러싼 우리 시대의 정세
‘책 읽기’의 위기는 한국만의 현상은 아니다. 유독 새로운 물결에 대한 적응이 빠른 한국 사회가 좀 더 심각한 양상을 보이기는 하지만, 엄연히 전 지구적인 현상이다. 정보화 혁명을 통해 사람들이 시각 매체와 온라인 네트워크에 의존하는 정도가 심해질수록 책을 읽는 데 들이는 시간과 노력은 줄어든다. 논리적으로만 보면, 정보화와 독서 문화가 반드시 제로섬 관계일 이유는 없다. 전자책이 등장하고 온라인 아카이브가 늘어나며 휴대용 단말기가 널리 보급됨으로써 책을 읽는 행위가 오히려 새로운 단계로 발전해갈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그러나 현실은 전혀 다르게 전개됐다. 마침 21세기 초는 대중의 교육 수준이 비약적으로 상승한 시기이기도 했다. 전 세계 청소년 문해율이 90% 이상으로 높아졌고, 한국을 비롯한 자본주의 중심부 국가들에서는 대학 등 고등교육 이수자가 해당 연령의 2/3에 육박한다. 그렇다면 이 시기에 독서 문화가 인류 역사상 최고 수준으로 꽃 피웠어야 맞았다. 하지만 교육 수준이 상승하는 만큼 책 읽는 문화가 그에 비례해 성장하지는 않았다. 여기에는 분명 정보화 혁명의 예기치 않은 결과가 개입돼 있다.
그리고 또 다른 분명한 사실은 이런 사태 전개가 최근 극우 포퓰리즘의 창궐과 포스트 파시즘의 부상 등 민주주의 정치의 전반적 쇠퇴, 부패와 직결된다는 점이다. 전에 없이 높은 지적 역량을 갖춘 시민들이 전에 없던 기술적 수단을 활용해 민주주의를 놀랍도록 발전시킬 것이라던 많은 선의의 전망은 여지없이 깨졌다. 스마트폰을 손에 쥔 시민들은 소셜 네트워크가 허용하는 것보다 더 길고 무거운 글은 기피하기 시작했고, 온라인 네트워크에서는 가짜 뉴스와 음모론, 혐오와 적의로 무장한 지나치게 깔끔한 서사들이 창궐했다. 극우 선동이 위력을 발휘하고 사회운동이 워키즘(wokism)과 캔슬 컬처(cancel culture)로 왜소화되는 세상이 열린 것이다.
한국에서는 이 시기에 젠더-탈핵-비정규직 정규직화 등에 대한 백래시에 바탕을 둔 극우 선동이 대두했고, 진영 대결과 팬덤 정치가 득세했다. 비록 외양은 유럽이나 남북미 국가들과 다른 점이 있지만, 이 역시 온라인 소통이 활발해질수록 기존 정보 유통 경로가 쇠퇴하는 보편적 양상의 한 표현이다. 그리하여, ‘읽기'(책이든 신문이든 비합법 유인물이든)에서 출발했던 1980년대의 저항운동과는 달리 오늘날의 집단행동에서는 온라인 방송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한국 역사상 가장 두터운 독서인 층을 이뤘던 40여 년 전의 20대 역시 지금은 철저히 이 시대의 논리를 따른다. 그러니 책 읽는 행위 자체가 희귀해질 수밖에 없다.
바로 여기에 이 시대의 지극한 어려움이 있다. 지금 한꺼번에 닥쳐오는 기후위기, 돌봄위기, 미-중 충돌, 인공지능 개발 광풍 등등은 하나같이 다 낯설고 복잡한 난제들이다. 소셜 서비스 네트워크를 떠다니는 짧은 글과 이미지로는 제대로 파악하고 이해하기 힘들며, 이런 단편적 정보와 견해에 의존하는 선동 정치나 진영 대결로는 해결의 어렴풋한 방향조차 잡을 수 없다. 현재 인류가 직면한 모순들, 위기들은 새롭게 읽고 학습하고 토론하는 대중이 출현함으로써만 어찌어찌 대응이라도 해볼 수 있는 문제들이다.
한데 이러한 때에 세계 곳곳에서 책 읽는 문화 자체가 위기에 빠져 있다. 기후위기로 인한 문명의 종말은 피할 수 없다거나 초인공지능이 등장하면 인간의 노력 따위는 쓸모없다는 막연한 생각에 따라 다들 더욱더 많은 시간을 온라인 공간에 권태와 분노의 언어를 쏟아내는 데 열중한다. 그리고 그럴수록 기후위기에 맞서거나 인공지능 시대를 준비할 시간은 줄어들고, 크나큰 위험에 맞설 인간들의 잠재력 또한 소모되어간다.
역사의 반전은 ‘읽기’ 운동에서 시작된다
그런데 돌이켜 보면, 책을 읽는다는 행위나 습관, 문화가 늘 자연스럽고 당연한 현실이었던 것은 아니다. 물론 엘리트층이야 문자문화가 자리 잡은 이후 줄곧 책을 읽어왔다. 그러나 대중은 사정이 달랐다. 이른바 계몽의 시대가 시작되고 근대의 여명이 밝아온 뒤에도 대중이 책을 찾아 읽기 위해서는 엄청난 노력이 필요했다. 책을 읽을 수 있는 토대나 자원, 여력이 어느 정도 갖춰진 다음에도 대중이, 과거보다 더 많은 대중이 책 읽기에 몰두하려면 상당한 의식적 기획과 집단적 시도가 개입되어야 했다.
말하자면 ‘읽기’ 운동이 있어야 했다. 한국사만 놓고 봐도 그렇다. 19세기 말, 한반도가 언제 열강의 식민지가 될지 알 수 없던 무렵, 왕조는 더 이상 민중의 삶을 책임지지 못하고 그럴 의지 역시 없었던 때에 ‘읽기’ 운동이 벌어졌다. 「독립신문」이니 애국계몽운동이니 하는 것들이 결국은 다 ‘읽기’ 운동이었다. 처음으로 한문이 아닌 한글로 신문과 책자를 내기 시작했고, 근대 문어로 막 체계가 잡히기 시작한 한글을 처음 학습한 대중이 이런 텍스트들의 독자가 되었다. 이런 일이 국내에서 10년 넘게 지속되고 난 뒤에 국권이 넘어갔다는 사실을 간과하고서는 3.1운동이 그토록 일찍, 거대하게 터져 나온 까닭을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일제 치하에서도 치열한 ‘읽기’ 운동이 있었다. 3.1운동의 세례를 받은 젊은 세대들은 다시 신문을 만들고 잡지를 냈다. 소설을 쓰고 번역에 나섰다. 한 세대 전에 지역마다 ‘학회’를 결성하고 개신교 교회나 천도교 교당을 활용했듯이, 이번에는 학교마다 독서회를 조직하고 이를 공장 노동자 모임이나 농촌 청년 모임으로 넓히려 했다. 이때 책 읽던 이들의 눈길이 주로 ‘좌파’ 성향(사회주의든 아나키즘이든)의 민족해방운동에 쏠려 있었기에 역사책에서 이런 움직임은 대개 이 표제 아래 소개된다. 하지만 그 또 다른 이름은 ‘읽기’ 운동이었다. 이러한 대중적 읽기의 성과만큼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새 나라가 만들어질 수 있었고, 그 한계만큼 하나의, 제대로 된 나라를 세우는 데 실패하게 된다.
그리고 앞에서도 잠시 언급했듯이, 가까운 과거인 1980년대에도 ‘읽기’ 운동이 있었다. 군부독재가 절정을 구가할 무렵, 체제가 용인하는 범위를 넘어 낯선 텍스트들을 찾아 읽으려는 젊은 세대의 치열한 노력이 펼쳐졌다. 이들은 한글 교육을 제대로 받은 첫 세대 교사, 교수에게 교육을 받은 첫 세대였다. 드디어 온전한 근대적 언어-문자 역량을 갖춘 이 세대는 당대 세계의 보편적 이념과 지식체계 가운데 분단-전쟁 이후 국내에 금지돼온 ‘반쪽’을 빠르게 (재)흡수하기 위해 ‘읽기’에 열중했다. 이로 인해 이들의 읽을거리가 한 쪽(현실사회주의권 저작물)에 너무 쏠리기는 했지만, 이런 집단적인 ‘읽기’ 체험이 이후 한 세대 동안 한국 사회를 떠받치는 중요한 동력 중 하나가 된 것만은 분명하다. 어정쩡한 민주화에도 불구하고 이런 저력이 뒷받침되었기에 한국 시민사회는 적어도 결정적 퇴행만은 허용하지 않을 수 있었다.
이렇듯 근대가 시작된 이후 줄곧, 이 땅에 사는 이들은 가장 절망적인 난국을 다름 아닌 대중적인 ‘읽기’를 통해 돌파해왔다. ‘읽기’ 운동을 시작으로 역사의 반전을 성사시켰고, ‘읽기’ 운동을 발판으로 미지의 다음 시대를 살아낼 힘을 미리 다졌다. 이런 대중적 운동은 대학과 같은 제도가 아직 갖춰지지 않은 상황에서도 활발하게 펼쳐졌고, 심지어는 한국 사회에서 대학제도가 전성기를 향해 나아가던 1980년대에도 공식 고등교육 내용이나 통로와는 상관없이(대학의 공식 개설 강의가 아니라 학생들의 모임을 통해) 자생적으로 전개됐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2024년의 세계를 살고 있다. 우리는 또 다른, 아니 전례 없는 난국의 한 가운데에 있고, 다른 어느 때보다 이런 시기에 제 역할을 해야 할 대학이나 언론, 종교기관이나 출판계조차 그들 자신 위기에 휩쓸리고 있다.
이런 때야말로 필요한 것은 다시 한 번, ‘읽기’ 운동이다. 우리 시대의 대중적인 ‘읽기’ 열풍을 불러일으키려는 기획과 노력이 있어야만 한다.
오늘날 사회운동은 ‘읽기’ 운동이 되어야 한다
지금 난마처럼 얽힌 한국 사회 상황에 어떻게든 돌파구를 내보자고 윤석열 정권 퇴진 투쟁 등의 제안이나 결의가 곳곳에서 올라온다. 민주노총이나 진보정당들도 이런 흐름에 앞장서려 한다. 그러나 2016~2017년 촛불항쟁에서 경험했듯이, 이런 동원은 이제 온라인 네트워크 여론만으로도 충분히 가능하다. 정권 퇴진 투쟁 같은, 제6공화국에서 이미 관성화된 집단행동은 때가 무르익으면 자연스럽게 터져 나올 것이다.
민중운동, 사회운동에 아직 기력이 남아 있다면, 지금 해야 할 일은 이렇게 온라인 여론의 변죽을 울리는 것이 아니다. 차라리, 남은 기력을 ‘읽기’ 운동에 쏟아 부어야 한다. 기후위기든 돌봄위기든 인공지능 열풍이든 우리에게 닥친 모든 위기들, 모순들에 대한 책 읽기에 나서야 한다. 책을 읽고 학습하며 토론하는 모임들을 조직해야 하고, 이런 모임들이 한국 사회의 새로운 유행으로 떠오르게 지원해야 하며, 독서 모임들을 뒷받침할 모든 제도(도서관이든 대학이든)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실존의 위기에 빠져 허우적대던 아우구스티누스가 놀이 하는 아이들 사이에서 들었다고 생각한 신비로운 음성, 그래서 그 삶의 나머지 여정을 송두리째 바꾼 그 음성(고백록)을 지금 우리 역시 들어야 한다.
“Tolle lege”. “[책을] 집어 들고, 읽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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