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국과 비상국민회의 의장
홍진은 1945년 일제의 항복과 함께 환국하였다. 해방을 맞이한 조국이건만 홍진의 마음은 기쁘지 않았다. 이념 간 갈등은 첨예하였고, 미군정은 어떤 정부도 인정하지 않았다. 게다가 모스크바3상회의에서는 신탁통치를 결정하였다. 홍진이 생각한 ‘한국인에 의한, 한국인을 위한, 한국인의 총의를 통한’ 정권수립은 난항을 겪고 말았다. 27년간 풍찬노숙하며 지켜온 독립운동은 조국에 돌아와서도 계속되어야만 하였다. 그리하여 1946년 2월, 홍진은 임시의정원을 이은 비상국민회의를 창립하여 의장에 올랐다.
홍진은 의장이 되자 ‘조선의 무조건 독립과 정치, 경제, 문화, 교통 등의 필요로 하루바삐 38선을 철폐하라'(조선일보,46.2.5.)고 외쳤다. 우리 민족의 요구는 오직 ‘자유’뿐이라고도 하였다. 미군정이 자문기관인 민주위원을 만들자, 비상국민회의는 자주적 주권을 가진 전국적인 민의기관임을 천명하였다, 그리고 그가 늘 진력해왔던 좌우합작과 민족단결을 위해 매진하였다. 내부적으로 정치적 화평 통일이 되어야만 외세의 간섭을 이겨낼 수 있다고 확신한 것이다.
홍진의 생각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국내 세력들의 대립과 갈등은 더욱 첨예하게 벌어졌다. 70세의 홍진은 더할 수 없이 가슴이 아팠다. 국가와 민족의 미래를 위해 노심초사하던 몸은 급기야 심장천식으로 입원하게 되었고, 1946년 9월9일 독립에의 한 많은 염원을 가슴에 담은 채 별세하였다.
▲홍진의 장례식
홍진의 장례식은 5일장으로 치러졌다. 장의위원장은 김구가 맡았다. 홍진의 독립을 향한 단심(丹心)이 하늘에 닿았는가. 발인 전 날, 온 땅을 적시는 비가 내렸다. 발인일인 9월 13일은 비도 그쳤다. 아침 7시 자택을 떠난 운구는 8시 명동 천주교당에서 연미사를 마쳤다. 9시15분부터는 김구, 이승만 등 천여 명의 인사가 참석한 가운데 장례미사가 집전되었다. 12시에 인천으로 운구가 출발하여 오후 3시에 홍진의 연경산 선영에서 눈물의 하관식이 진행되었다. 많은 언론이 홍진의 장례식을 보도하며 온 국민과 함께 그의 명복을 빌었다. 홍진의 서거 두 달 뒤, 비상국민회의는 그가 늘 강조하던 문구를 넣어 묘비석을 세우고 우리 독립운동사의 큰 별을 잃음을 애달파하였다.
홍진은 좌우대립의 격화, 반탁과 찬탁, 6·25동족상잔을 거치며 잊혀져갔다. 그의 묘는 1984년 12월에 동작동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으로 옮겨졌다. 이와 함께 전국적인 국토개발로 그의 묏자리도 사라졌다. 홍진의 묘비석은 그의 묘를 국립묘지로 이장할 때 인천시립박물관에 보관하였던 까닭에 오늘도 박물관에서 살펴볼 수 있다. 인천에서 홍진의 유물로 접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 홍진 선생의 묘는 1994년 10월, 현재의 국립묘지 임정요인 묘소로 다시 이장되어 현재에 이르렀다.
▲홍진의 묘는 어디에 있었나
홍진의 묏자리는 1984년 이후 모두에게서 잊혀졌다. 탐사팀은 홍진의 묏자리를 찾기 위해 백방으로 관련 자료를 찾았으나 그의 묏자리를 찍은 사진 한 장 구할 수 없었다. 홍진의 선산이 ‘학익동 68의2 일대’였다는 것만을 알 수 있었다. 탐사팀은 이와 함께 홍진의 증조부인 판의금부사 홍우순(洪祐順)의 신도비가 발견된 지역이 선산과 합치되는 지역임을 확인하고 이 부근을 집중적으로 살펴보았다.
홍우순 신도비는 현재의 학익동 백학초등학교에서 연경산 북쪽 산기슭으로 올라가다 보면 제운정이라는 정자가 있었는데, 이 정자에서 조금 위에 있었다고 한다. 그의 묘는 신도비에서 서남쪽 능선을 타고 90m 지점에 있었다고 전한다.
홍우순의 신도비는 1990년 초반까지 존재하였다. 하지만 1994년 서해안고속도로 건설과 연경산 공원화사업을 추진하면서 경기도 고양시로 옮겨졌다. 현재 인천시립박물관에 신도비문을 필사한 것이 있고, 신도비의 탁본 1점도 함께 보관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 홍우순의 무덤이 제운리(霽雲里)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제운리가 바로 현재의 백학초등학교 앞 연경산 북쪽 산기슭 일대이기 때문이다.
탐사팀 허우범 교수는 70년대 초반부터 90년대 초반까지 문학동에 살았다. 그래서 이 지역의 지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허교수는 당시를 회상하길, “길 양쪽으로는 논과 밭이 이어졌고 현 백학초등학교 앞 주차장은 모두 연못이었다”고 말했다. 또한, “연못 위쪽으로 조금 높은 지대에는 몇 개의 무덤이 있었다”고 기억했다. 탐사팀이 허교수의 증언을 따라 현장을 방문한 결과, 연경산 주차장은 지대가 낮았고, 주차장 위쪽은 평지보다 2-3미터 정도 높았다. 이곳에 몇 기의 무덤이 있었다고 하였는데 현재는 제2경인고속도로를 지탱하는 교각이 세워져있다.
탐사팀은 홍진 선생의 선산(先山) 지번(地番)과 증조부 홍우순의 신도비 내용, 그리고 무엇보다 이 지역의 내용을 자세히 알고 있는 허교수의 증언 등을 종합하여 홍진의 묏자리를 추적하였다. 그 결과, 홍진의 묏자리는 현 백학초등학교 앞 연경산 공원주차장과 제2경인고속도로 교각이 들어선 자리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곳에 인천을 대표하는 독립운동가 만오 홍진 선생의 묘가 있었음을 알리는 표지석을 세워 그를 기억하는 장소로 거듭나기를 희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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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일보 만오홍진특별취재팀
남창섭 기자 csnam@incheonilbo.com
이호윤 기자 256@incheonilbo.com
신춘호 박사(영상아카이브연구중심) docu8888@daum.net
허우범 교수(인하대 융합고고학과) appolo21@hanmail.net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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