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미국에서 대선과 관련해 나온 가장 큰 뉴스는 경쟁하는 두 후보에 관한 것이 아니라, 대선을 보도하는 언론에 관한 소식이었다. 현지 시간으로 수요일 유력일간지 LA타임스가, 금요일에는 워싱턴포스트가 이번 대선부터 특정 후보를 지지하지 않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이 결정이 신문사의 기자, 편집진의 합의해서 내려진 게 아닌 건 분명했다.
발표가 나온 즉시 워싱턴포스트의 유명 칼럼니스트 로버트 케이건이 항의의 표시로 사표를 던졌고, 그날 저녁에는 18명의 기자들이 “한 명의 후보가 언론의 자유와 헌법의 가치를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상황에서 나온 이번 결정은 “중대한 실수”라는 짧은 성명을 오피니언 칼럼에 게재했기 때문이다. LA타임스의 에디토리얼(사설) 편집장도 사표를 냈다.
분노한 건 현직 기자들만이 아니다. 1970년대 닉슨 대통령의 워터게이트 사건을 취재해서 워싱턴포스트를 빛낸 언론인 밥 우드워드와 칼 번스틴 기자도 이 신문의 결정이 실망스럽다는 입장을 밝혔고, 경쟁 신문인 뉴욕타임스도 언론학자의 오피니언 칼럼을 통해 이번 결정의 문제를 지적했다. 공정한 보도를 추구하는 신문이 어느 한 후보를 지지하지 않겠다고 한 것이 정말로 그렇게 심각한 문제일까? 신문이 지지 후보를 밝히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한국에서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
우선 미국에서는 많은 신문들이 선거를 앞두고 독자들의 판단을 돕기 위해 자신들이 검증한 후보에 대한 지지(endorsement)를 밝힌다. 뉴욕타임스의 경우 이 전통은 160년 넘게 이어졌다. 하지만 모든 신문사가 그렇게 하는 건 아니다. 문제가 된 워싱턴포스트의 경우 1976년부터 출마 후보에 대한 지지를 밝혔고, 1988년에는 한 차례 건너뛰기도 했다. 뉴욕타임스는 지난달 카멀라 해리스가 “국가를 위하는 유일한 선택”라며 지지 사설을 발표했지만, 8월에는 올해부터 뉴욕시장과 뉴욕주 상하원 의원 등에 대한 지지는 하지 않기로 했다는 발표를 하기도 했다.
워싱턴포스트의 발행인 윌 루이스는 이번 결정이 후보를 지지하지 않던 “우리 신문의 옛 전통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했다. 작은 신문이지만 미네소타스타트리뷴도 이번 선거에서 지지 후보를 밝히지 않겠다고 했고, 시카고트리뷴과 덴버포스트 등 200여 개의 매체를 거느린 헤지펀드 알덴 글로벌 캐피탈은 이미 2022년에 자사에 속한 신문들이 지지 후보를 발표하지 않는다고 발표했다. 언론의 영향력이 갈수록 약해지는 시점에서 정치가 극한 대립으로 치닫고 있으니 피곤한 싸움에 뛰어들지 않겠다는 이런 태도가 하나의 트렌드라는 분석도 있다.
하지만 워싱턴포스트와 LA타임스의 경우, 단순히 트렌드에 따른 결정이 아니다. 우선 두 신문 모두 그동안 해온 대로 대선 지지 후보를 에디토리얼 보드(논설위원실)에서 결정하고 발행할 글의 초안까지 나온 후에 위에서 내려온 지시로 발표하지 못하게 된 것이기 때문이다. 더 중요한 건 둘 다 갑부 개인이 소유한 신문사라는 사실이다. 워싱턴포스트는 2013년에 아마존의 설립자 제프 베이조스가, LA타임스는 의사이자 사업가인 패트릭 순시옹이 2018년에 재정난에 빠진 언론을 구하겠다며 사들인 신문이다. 지난 주에 두 신문이 발표한 결정은 모두 막판에 사주에게서 직접 내려온 결정이었고, 이 사실은 이번 일의 본질을 잘 보여준다.
베이조스는 에디토리얼 보드가 지지 성명을 밝히는 사설을 읽지 않았다고 하지만, 워싱턴포스트가 시종일관 트럼프에 비판적이었기 때문에 누구를 지지할지는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렇다면 어떤 의미에서는 이 신문이 카멀라 해리스를 지지한다고 발표하는 건 선거 결과에 거의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그 신문을 읽는 사람들은 애초에 트럼프를 지지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 사주들은 왜 굳이 그걸 철회하는 결정을 내렸을까? 두 신문의 지지 후보 발표는 선거 결과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지만, 지지 후보를 내지 않겠다는 결정은 아주 큰 금전적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는 유세장에서 자기가 다시 백악관에 들어가게 되면 자기를 비판한 미디어와 언론인들에 보복하겠다는 말을 반복하고 있다. 하지만 기자, 언론인은 이런 트럼프의 위협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걸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재벌 사주들이다. 그들에게는 자기가 소유한 적자투성이 언론사와 달리 큰 이윤을 내는 기업이 있다. 베이조스의 경우 아마존 웹 서비스(AWS), 블루오리진 같은 기업들은 미국 정부가 중요한 고객이고, 대통령은 마음 먹기에 따라 이런 베이조스의 사업에 큰 타격을 줄 수 있다. 프로텍트 디모크라시(Protect Democracy)라는 단체를 이끄는 이언 바신은 베이조스나 순시옹이 하는 행동이 “예측에 따른 굴종(anticipatory obedience)”, 즉 트럼프가 승리할 경우 당할 보복이 두려워 먼저 무릎을 꿇는 행동이라고 설명한다.
막연한 두려움이 아니다. 트럼프가 취임한 해인 2017년, 미국 정부는 대형 통신사 AT&T가 타임워너를 인수하는 것을 막으려고 했는데, 여기에는 타임워너가 CNN의 모기업이라는 배경이 있었다. CNN 방송사는 트럼프가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와 함께 가장 싫어하는 언론사로 유명하다. 워싱턴포스트의 비판적인 보도에 화가 난 트럼프는 미국 정부가 아마존의 웹 서비스를 사용하는 것을 막으려고 했던 일도 있다. LA타임스의 사주인 패트릭 순시옹의 경우, 자기가 소유한 제약회사가 개발한 신약의 허가를 다음 정부에서 받아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두 신문이 거의 동시에 지지 후보를 내지 않겠다고 발표한 것은 트럼프에게 보내는 ‘내 돈벌이 수단은 지켜달라’는 부탁이고, 특혜를 받을 수는 없어도 피해를 보지 않겠다는 ‘헤징(위험 분산)’이다. 하지만 헤징이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다. 트럼프의 재임 기간 중 워싱턴포스트의 편집장을 지낸 마틴 배런은 베이조스의 결정을 “민주주의를 해치는 비겁한 행동”이라고 비판하면서, 트럼프는 이렇게 굴복한 베이조스를 “앞으로 더욱 협박하게 될 것”으로 전망했다.
두 신문의 굴복은 경영난에 빠진 언론사가 기업인에게 경영권을 넘기는 게 어떤 위험을 품고 있는지 잘 보여준다. 기업인들은 언론에 대한 자신의 꿈과 이상을 이야기하지만, 그들에게 돈을 벌어주는 다른 사업이 크면 클수록 언론은 그의 “본업”을 위한 수단일 뿐이고, 자기 이득을 위해 권력과 거래할 수 있는 카드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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