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작년에도 올해도 이 자리에 있다는 것은 2년이 지났지만 생존 피해자 파악이 전혀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 압박을 경험한 사람은 수천 수백이었습니다. 부상자로만 분류된 323명이 다가 아님을 여러분들도 아시겠지요? 당장 그 상황에 같이 있었던 제 친구들도 부상자로 분류되지 못한 채 여태껏 방치되고 있습니다. (중략)
가까스로 초기 현장에서 구조된 친구들이 생존자일까요? 목격자일까요? 생존자의 범위는 어디까지인가요? (중략)
어떤 이들은 스스로를 피해자라고 자각조차 못하고 있습니다. 자각조차 하지 못한 채 피해자의 경험을 안고 일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파악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현실 속에서 160번째 희생자가 없다고 감히 단언할 수 있을까요?”
10.29 이태원 참사 생존 피해자 이주현 씨가 참사 발생 2년이 되도록 제대로 된 조사가 이뤄지지 않고 있는 현실을 비판하며 어렵게 입을 뗐다. 이 씨는 출범 한 달여가 된 ‘10.29 이태원 참사 진상규명과 재발 방지를 위한 특별조사위원회(특조위)’를 향해 “특조위가 피해자 조사를 최대한으로 해야 한다”며 “수동적으로 피해 구제 신청인들만을 조사하는 게 아니라 숨겨진 피해자들을 찾아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그 사람들은 그날 현장에 있었고 이 참사를 가장 잘 아는 사람들이다. 생존 피해자 없는 진상조사로는 진실을 알 수 없을 것”이라며 “그 무엇보다 이들 모두가 각각 기억하고 경험했던 일을 맞추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참사 2주기를 사흘 앞둔 26일 시청 앞 서울광장에서 ‘이태원 참사 2주시 시민 추모대회’가 열렸다. 10.29 이태원 참사 시민대책회의가 주최한 추모대회에는 세월호 참사와 오송 참사 유가족을 비롯해 여야 정치인과 시민사회단체 등 시민 5000여 명이 함께했다.
송기춘 “‘무죄’ 박희영·김광한 재판서 드러난 사실관계 여부 다시 철저하게 살필 것”
이정민 10.29 이태원 참사 유가족협의회 운영위원장은 “지난 2년의 삶은 지금껏 겪은 그 어떤 고통보다 훨씬 더 크고 아프게 다가왔다”며 “10월이 되면 언제라도 불쑥 문을 열고 들어올 것만 같은 착각 속에 그리움만 더 깊게 가슴을 파고든다”고 했다.
이 위원장은 참사 2주기를 맞아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에서 두 번 다시 재난참사로 고통받는 이들이 없도록 한 걸음 나아가는 주춧돌이 되고자 한다”며 정치권과 사회 각계에 “안전한 나라, 생명이 존중되는 따뜻한 사회를 함께 만들어 나가자”고 호소했다.
이 위원장은 정치권에는 “이태원 참사를 정쟁의 도구로 소모하지 말 것”을, 종교계에는 “재난참사 피해자들 곁에서 의지의 등불이 되어 줄 것”을, 시민사회단체에는 “진상조사 과정에서도 계속해 감시자이자 길잡이 역할을 해줄 것”을, 시민들에게는 “이태원 참사를 계속해서 이야기하고 기억할 수 있도록 함께해 달라”고 당부했다.
송기춘 특조위 위원장은 ‘무죄’가 선고된 박희영 용산구청장과 김광한 전 서울경찰청장에 대한 1심 판결에 대해 “설사 무죄 판결을 받았다고 해도 이들이 다른 모든 책임으로부터 면제되는 것은 아니”라며 “여전히 정치인으로서 정치적 책임을 져야 하고 직무상 의무를 위반한 책임도 져야 한다”고 말했다.
송 위원장은 “위원회(특조위)는 아직 (참사) 조사에도 착수하지 못했으므로 최근 선고된 판결의 옳고 그름에 대해 공식적인 논평을 할 처지는 아니”라면서도 “재판 과정에서 드러난 사실관계를 바탕으로 그것이 진정 사실인지 여부까지도 다시 철저하게 살필 것”이라고 약속했다.
송 위원장은 “위원회(특조위)가 가진 권한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많은 분들이 진상규명 작업에 함께 할 것으로 믿고 있다”며 “진실은 침몰하지 않고 거짓이 드러나지 않을 리 없다. 앞으로 1년 여의 시간 동안 위원회에 부여된 임무를 충실하게 수행하겠다”고 밝혔다.
“‘엄마, 안녕!’ 하며 환하게 웃음 짓던 딸이 너무 그립다”
호주인 희생자 그레이스 래치드(Grace Rached·23) 씨의 어머니 조앤 래치드(Joan Rached)씨가 딸에게 보내는 편지를 낭독하기도 했다.
래치드 씨는 “네가 최선을 다해 살아온 23년, 그 이후의 네 모습을 더는 상상할 수 없다”고 애통해 하면서도 “네가 우리를 떠날 때의 모습, 행복과 삶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했던 그 모습을 영원히 기억할 것”이라고 했다.
이어 “네가 항상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며 어떤 일이 있든 ‘엄마, 안녕!(Hi, ma!)’을 외치며 환하게 웃음 짓던 게 너무 그립다”며 “나는 지금도 가끔 현관문을 바라볼 때면 네가 문을 열고 들어오던 그 모습이 그려진다”고 했다.
래치드 씨는 영화 감독이 꿈이었던 딸의 이름을 딴 장학금 ‘그레이스 래치드 인턴쉽’을 만들어 딸과 같은 꿈을 가진 젊은 여성들의 꿈을 응원하고 있다며 “네가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라고 아쉬워했다.
래치드 씨 가족은 전날 특조위를 찾아 “그레이스가 언제 어떻게 세상을 떠났는지 알고 싶다”며 진상규명 조사신청서를 접수했다. 이는 특조위에 접수된 ‘2호 진정’이며, 개별 진정으로는 국내외를 합친 첫 진정이다.
래치드 씨는 참사 2주기 구술집 「참사는 골목에 머물지 않는다」에서 “그동안 단 한 명도 우리가 어떤지 확인하지 않았다”며 “(한국에서 희생된 딸을 확인하고) 호주로 돌아온 이후엔 한국대사관에서만 절차적으로 마무리할 게 있다며 연락 온 것이 다였다”고 했다.
“그날의 진실 되짚어 책임자 처벌해야 진정한 추모 시작돼”
시민들의 추모 열기도 높았다. 가을을 만끽하다 광장의 추모 분위기에 발길을 멈춘 이들이 많았다.
취업 준비생인 김 모 씨(충북 청주·20대)는 “최근 가족 중 한 명을 잃으면서 유가족의 심정을 이해하게 됐다”며 “그래도 전 가족 곁에서 마지막을 함께할 수 있었지만 ‘잘 다녀와’라는 인사가 마지막이 된 유가족들은 얼마나 참담하겠느냐”고 공감을 표했다.
김 씨는 “사회적 재난으로 누군가가 희생되면 그 희생자의 마지막은 영영 알 수 없는 상태가 된다”며 “그렇기 때문에 그날의 실체적 진실을 되짚어 책임자를 가려내는 일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그래야지만, 진정한 애도와 추모가 시작될 수 있다”고 했다.
다섯 살 딸과 함께 외출했다 추모대회에 참석한 정 모 씨(서울 용산구·40대)는 이태원 참사에 대해 “사람들이 거리를 걸어가다가 특정 공간에 갇혀 벌어진 참사”라며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고 애도했다.
정 씨는 2년 전 자신도 딸아이를 데리고 이태원에 가려고 했었다며 아이에게 다양한 복장으로 축제를 즐기는 사람들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그러나 참사 이후에는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은 피하게 되고 거리를 걷다가도 “아이에게 ‘주변을 잘 살피라’며 혼내게만 된다”며 “슬픈 일”이라고 토로했다.
친구와 시청 근처에서 약속을 잡고 만나 추모대회에 참석했다는 현 모 씨(서울 도봉구·30대)는 “2년 전 그날 사촌 여동생도 핼러윈 축제를 즐기려고 이태원에 갔었다”며 “가족 중 누구에게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에 관심을 갖게 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현 씨는 “이태원 참사는 당연히 국가의 책임”이라며 “국민의 가장 큰 역할은 국민의 안전을 지키는 것”이라고 했다. 또 “세월호 참사 때처럼 극단으로 나뉘어 진실도 밝히지 못한 채 흐지부지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면서 “이태원 참사만큼은 진상도 규명되고 책임자 처벌도 제대로 이뤄져서 참사로 인한 사회적 아픔을 어떻게 수습해야 하는지 하나의 선례가 됐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한편, 이날 추모대회에는 여야 정치권 인사들이 대거 참여해 눈길을 끌었다. 정부여당 측에서는 추경호 국민의힘 원내대표와 오세훈 서울시장이 참석했으며, 한동훈 대표 명의의 조화도 눈에 띄었다.
추 원내대표는 무대에 올라 직접 추모사를 낭독했다. 그는 “위원회(특조위)가 독립적으로 주어진 역할을 차질 없이 수행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지원하겠다”며 “무고한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안전한 대한민국을 만들어 가겠다”고 했다.
추 원내대표가 추모사를 낭독하는 내내 “내려와”, “책임져”와 같은 야유와 항의가 이어졌다. 추 원내대표와 오 시장은 추모대회가 끝난 뒤 각각 경찰과 시 관계자들의 경호를 받으며 퇴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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