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글에서 히틀러가 독일 총통에 오른 지 딱 6년째를 맞은 1939년 1월30일 제국의회 연설에서 “유대인을 절멸(Vernichtung)시켜야 한다”고 외쳤다는 점을 살펴봤다. 이미 오래 전부터 히틀러와 그의 충성스런 지지자들 사이에선 “독일을 유대인이 제거된(judenrein) 곳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말을 공공연히 주고받았다. 히틀러는 자신의 ‘나팔수'(선전장관) 요제프 괴벨스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유대인은 독일에서, 실제로는 전 유럽에서 나가야 한다.”
1939년 9월1일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전쟁이란 비상사태가 벌어지자, 독일 유대인에 대한 나치의 탄압이 더욱 노골적으로 벌어졌다. 그해 10월부터 모든 유대인은 저녁 8시부터 집 바깥으로 나다니는 것이 금지됐다. 출퇴근 시간대에, 때로는 하루 종일 버스나 트램(전철)을 비롯한 대중교통 수단을 이용하는 것도 막았다. 집 전화기는 모두 압수됐고, 공중전화를 쓸 수도 없었다. 백화점 같은 곳에서 유대인과 마주치지 않도록 시간을 제한했다. 돈이 많다고 마냥 물건을 사들일 수 없도록 했다.
전쟁이 벌어지면서 시작된 식량 배급도 차별을 받았다. 배급표에 유대인을 뜻하는 ‘J’라는 도장 표시를 했고, 그 배급표를 내미는 사람에겐 독일의 보통사람들보다 식량을 적게 주었다. 히틀러는 지난 제1차 세계대전에서 유대인 상인들이 매점매석을 했기에 식량부족 사태를 겪었다고 믿었다. 따라서 “유대인의 먹거리를 옥죄는 것은 당연하다”고 여겼다. 히틀러의 지침을 받은 독일 정부의 식품부 관리들은 그야말로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식량’만 건네줄 작정으로 유대인에 대한 가혹한 배급정책을 펴나갔다.
히틀러, 힘러에게 “독일 유대인 추방하라” 지시
[독일의 유대인 수는 히틀러가 집권했던 1933년 1월에 약 52만 명이었다. 그 수는 5년 뒤 1938년까지 그동안 발생했던 이주와 죽음으로 35만 명으로 감소했다. 그러나 1938년 3월에 오스트리아가 병합됨에 따라 오스트리아 유대인 19만 명이 추가되어, 독일 지배령의 유대인은 약 54만 명으로 늘어났다. 이는 집권 당시보다 2만 명이 많은 수였다. (히틀러가 보기에) 그것은 진보가 아니었다. 따라서 이례적인 조치가 필요했다](라울 힐베르크, 「홀로코스트 유럽유대인의 파괴Ⅰ」, 개마고원, 2008, 565쪽).
윗글에서 ‘이례적인 조치’란 곧 독일 영토 바깥으로의 강제 이송을 뜻했다. 독일은 폴란드 침공으로 영토의 절반과 200만 유대인을 손아귀에 넣었다(나머지 영토의 절반은 소련이 차지했지만, 1941년 6월22일 독일의 침공으로 토해냈다). 폴란드 서쪽은 독일의 직할령이 됐다. 바르샤바를 비롯한 폴란드 중부, 크라쿠프(아우슈비츠에 가까운 폴란드 제2도시)를 비롯한 폴란드 남부, 그리고 (독일의 소련 침공 뒤) 폴란드 동부와 우크라이나 서부지역을 아우르는 넓은 지역은 폴란드 총독(Generalgouveneur)의 관할 아래 들어갔다.
바르샤바와 크라쿠프 등 주요 도시들을 중심으로 유대인 게토가 빠르게 들어섰다. 바로 그 무렵 히틀러는 비밀경찰 총수이자 친위대(SS) 사령관 하인리히 힘러에게 “독일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을 폴란드로 추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1939년 10월7일, 히틀러는 하인리히 힘러에게 대독일(독일, 오스트리아를 포함해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기 직전의 독일 영토)의 모든 유대인을 동부로 추방할 권한을 주는 명령을 발표했다. 유대인은 이제 독일의 지배를 받는 200만 명에 가까운 폴란드 유대인과 함께 그곳에 재정착할 터였다](리처드 오버리, 「독재자들」, 교양인, 2008, 811쪽).
하인리히 힘러, “유대인에 자비심 갖지 말라”
하인리히 힘러는 부하들에게 유대인과의 전쟁을 ‘종족 전쟁’이라 규정하면서 “유대인에 대한 자비심을 갖지 말라”고 강조했다. 이에 따라 1940년 초 처음으로 독일 유대인이 특별 열차에 올랐다. 유대인 체포는 게슈타포, 수송은 친위대(SS)가 맡았다. 홀로코스트 연구자 볼프강 벤츠(베를린종합기술대, 반유대주의연구소장)의 글을 보자.
[전쟁이 시작된 지 거의 반년이 지난 다음, 포메른(독일 북동부 지역)에서 처음으로 독일 유대인이 강제 이송됐다. 1940년 2월12일 슈테틴(독일 북동부 오데르 강변의 항구도시로 지금은 폴란드령)과 그 주변에 살고 있던 1,000명의 유대인이 밤중에 붙잡혀 폴란드 루블린 옆의 마을 세 곳으로 이송되었다. 슈나이데뮐(지금은 폴란드령, 이름은 ‘피와’) 지역의 유대인들도 똑같은 운명을 겪었다](볼프강 벤츠, 「홀로코스트」, 지식의풍경, 2002, 99쪽).
그때 강제이송된 유대인들 가운데 1945년 전쟁이 끝날 때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극소수였다. 대부분은 1942년 초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대량학살 광풍에 휩쓸려 죽음을 맞이했다. 폴란드로의 독일 유대인 강제이송은 1941년 들어 더욱 규모가 커졌다. 한꺼번에 1,000~5,000명을 태운 ‘특별 열차’가 날마다 독일을 떠났다. 폴란드는 거대한 유대인 수용소로 바뀌어갔다.
[(독일 유대인은) 1941년 11월 초까지 거의 20만 명이 (폴란드) 게토로 보내졌다. 그곳에서 독일 국적이 아닌 유대인들은 새로 들어오는 자들에게 자리를 내주기 위해 살해되었다. 처음으로 이송된 5,000명의 독일 유대인은 1941년 11월에 코브노에서 살해되었다. 그 단계에 이르면 노예노동을 시킬 수 없는 수많은 유대인이 동유럽 점령지 전역에서 ‘쓸모없는 밥버러지’로서 체계적인 죽임을 당하고 있었다](리처드 오버리, 814쪽).
독일 유대인들은 대부분 폴란드로 갔지만 일부는 다른 독일군 점령지역으로도 이송됐다. 발트해에 맞닿은 북유럽의 라트비아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뮌헨 외곽의 밀버츠호펜은 라트비아로 떠나는 수송열차가 지나는 곳이었다. 1941년 봄 나치는 유대인을 강제노동으로 동원해 그곳에 거대한 막사를 지었다. 유대인 이송을 위한 통제소로 쓰기 위해서였다. 1941년 11월20일 알트바이에른과 슈바벤에서 밀버츠호펜으로 실려온 유대인들이 뮌헨 유대인들과 함께 리가(라트비아 수도)로 떠났다. 그 규모는 3000~4000명. 호송열차가 멈춘 곳에서 이들을 기다리는 것은 죽음이었다.
열차 요금까지 떠넘긴 강제 이송
독일에서 쫓겨나 강제 이송될 무렵 독일 유대인들의 재산은 사실상 나치 정부에 몰수된 상태였다. 유대인을 ‘2등 시민’으로 떨어트린 ‘제국시민법'(일명 뉘른베르크법, 1935)의 11차 법규(1941년 11월25일, 실제로는 10월15일로 소급)에 따라 ‘주거를 외국으로 옮기면 국적을 잃고, 유대인의 재산은 국적 상실과 더불어 독일제국에 귀속된다고 했다. 이 조항을 10월15일로 소급한 것은 유대인이 해외 추방 전에 재산을 남에게 넘기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11차 법규의 실행을 위한 비밀규정에는 강제 이송의 경우 (독일이 점령중인 폴란드라 하더라도) ‘외국’으로 규정했다(볼프강 벤츠, 98-99쪽 참조).
유대인들은 막연히 ‘동부로 이주한다’는 사실만 통고받았을 뿐 종착역이 어디인지도 모르고 기차를 탔다. 이송에 앞서 유대인들은 ‘대피’를 위한 사전 안내를 받았다. 이송 열차의 요금은 쫓겨나는 유대인이 내야 했다. 독일 바이에른주 비어츠부르크의 한 유대인이 받아든 ‘이주 설명서’에 따르면, 수송비용으로 60마르크를 내야 한다고 돼 있었다.
비어츠부르크는 독일 바이에른주의 마인강변의 오랜 역사를 지닌 아름다운 도시다. 1941년 11월23일 그곳에 살던 한 유대인은 ‘동부로 가야한다’는 통보를 받았다. 그가 받아든 ‘이주 설명서’에 따르면, △1인당 무게 50kg을 넘지 않도록 챙긴 짐 가방은 화물역에 미리 갖다 놓고(밀봉 금지), △전기․수도․가스 공과금은 시 당국에 반드시 납부하고 △살던 집을 깨끗이 치운 다음 △집과 방의 모든 열쇠는 주소가 적힌 꼬리표를 달아 시청으로 가서 그곳 게슈타포 지국에 넘겨주어야 했다.
수송열차 0순위는 유대인
열차 운행에서 유대인 수송은 군 병력 수송보다 우선순위였다. 군사작전 말고는 철도 이용이 쉽지 않아진 상황에서도 친위대는 유럽 전역의 독일 점령지역(프랑스, 발칸반도 등)에서 유대인들을 열차로 날랐다. 심지어 스탈린그라드 공방전(1942년 8월21일-1943년 2월2일)에서 패배한 뒤 독일군이 후퇴를 거듭하는 상황에서도 친위대 사령관 힘러는 교통부장관에게 ‘수송열차가 더 필요하니 보내달라’고 요구했다. 그 요구는 당연히 받아들여졌다.
이 문제로 독일 국방군(Wehrmacht)의 고위 장성들은 친위대에 불만을 품었다. 하지만 ‘유대인 문제 해결’을 최대 관심사항으로 꼽아온 히틀러의 뜻이 담긴 수송 작전을 막아설 자는 없었다. 이렇듯 나치 독일의 주요 정책의 우선순위에서 유대인 처리가 가장 으뜸이었다.
여기서 생각해볼 점 하나. 만에 하나 열차가 없었다면 유대인 추방이 그렇게 대규모로 이뤄질 수 있었을까.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이는 일제 식민통치 말기에 일본이 ‘대동아전쟁’을 벌인다며 한반도에서 헐값에 강제 수탈한 식량과 놋그릇 등 전쟁물자들을 열차로 실어 날랐던 것과 마찬가지다. 철로가 깔리고 교통이 편해진 것을 두고 근대화라 일컫는 ‘신친일파’들은 철도의 순기능만 강조할 뿐이다(연재 16 참조).
독일에서 마지막 유대인 이송 열차가 폴란드로 떠난 날은 1943년 6월16일로 기록된다. 그날 저녁 몸이 성치 않은 300명의 노약자를 포함해 모두 500명쯤의 유대인을 태운 열차가 베를린 푸틀리츠 역을 출발했다. 이로써 나치 독일은 히틀러의 오랜 소원대로 ‘유대인이 없는 나라’가 됐다(비밀경찰의 눈을 피해 숨은 유대인들이 극소수 남아 있었다).
길거리의 추모판 ‘걸림돌’
유럽동부로 옮겨진독일 유대인들은 처음엔 임시 수용소에 머물며 강제 노동에 시달리다가 얼마 뒤 ‘절멸 수용소'(아우슈비츠, 헤움노, 소비부르, 루블린, 베우제츠, 트렐블링카 등)로 옮겨져 가스실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물론 극히 일부는 살아남아 노예노동을 하거나 시신 처리(금이빨을 뽑고 매립 또는 소각)하는 궂은일이 맡겨졌다.
유럽의 도시들을 가보면 보행자들이 오가는 길거리 바닥에 특이한 표식판들이 눈길을 끈다. 위대한 예술가의 탄생지나 기념비적 방문지 같은 곳을 가리키는 표식판도 있고, 전쟁 영웅을 기리는 표식판들도 있다. 홀로코스트 희생자를 기리는 추모판들도 제법 많다. 크기는 일정하진 않지만 대체로 가로-세로 10cm쯤이고 황동 또는 대리석으로 만들었다. 희생자 개인의 이름, 출생연도, 강제수용소 이송연도(대개는 1940-1943년 사이), 이송지(숨진 곳)가 짧게 적혀있다. 이를테면, ‘여기에 볼프강 호르스트 칸닌카가 살았다. 1926년생, 1942년 민스크로 강제 이주’ 등이다.
이런 추모판이 유럽에는 독일을 중심으로 18개국에서 10만 개가 설치됐고(2023년 통계) 그 숫자는 지금도 조금씩 늘어나는 중이다. 독일 사람들은 이 추모판을 ‘걸림돌'(Stoplerstein)이라 부른다. 나치 학살에 희생된 이들을 잊지 말고 기리자는 뜻에서다. 유대인들은 “홀로코스트 희생자가 600만이므로 산술적으론 길거리의 걸림돌도 600만개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유대인 희생자가 살았던 집 근처 보도블록을 들어내고 황동 추모판 하나를 깔려면, 시 당국과 씨름을 해야 한다. 황동 추모판 하나에 75유로, 우리 돈으로 10만원쯤 든다. 거리를 걷다보면 걸림돌에 발이 걸려 넘어지는 수도 있다. 반유대 감정을 지닌 이들은 이래저래 불만이지만, 불편한 속내를 드러내기는 쉽지 않다. 자칫 ‘나치 신봉자’로 몰려 유대인들에게 삿대질을 받거나 불매운동(보이콧) 등의 표적이 돼 곤욕을 치르기 때문이다.
쾰른 유대인 장로가 겪은 가혹한 운명
덴마크 태생의 영국 저널리스트 키르스텐 세룹-빌펠트는 추모판(걸림돌)에 관한 책(Stoplersteine, 2003)을 냈다. 그가 특히 초점을 맞춘 것은 나치 시절 쾰른의 유대인들이 겪은 수난사다. 이 책에서 쾰른의 유대교 랍비(성직자)이자 유대인 공동체 지도자였던 이지도르 카로와 그의 부인이 어떤 과정을 거쳐 폴란드로 강제 이송됐는지를 살펴보자.
이지도르 카로(1876-1943)는 유대교 신학교를 거쳐 기센대학에서 역사학과 철학박사를 받았다. 1908년 랍비가 됐고 오랫동안 쾰른에서 유대종교 교사로 활동해왔다. 1938년 쾰른 유대인 공동체 랍비가 숨지자, 카로가 그 직을 이어받았다. 1938년 ‘수정의 밤’ 폭동을 겪으면서 쾰른의 유대인들은 그동안 바래왔던 ‘독일-유대인 공동사회’는 허망한 꿈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카로는 외국으로 떠날 수도 있었지만, 쾰른에 남았다. 유대인 공동체에 대한 의무감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고난이 곧 닥쳐왔다. 세룹-빌펠트의 글을 보자.
[1941년이 되기 전에 카로 부부는 넓은 집을 (나치에게) 비워줘야 했다. 시나고그(유대교회당) 뒤편에서 다른 유대인 13명과 비좁게 살았다. 1942년 6월 쾰른 유대인 1,000명을 테레지엔슈타트로 이주시키라는 1차 명령이 떨어졌다. 카로 부부는 자진하여 이 열차에 타기로 결심했다. 50파운드의 짐을 꾸릴 단 3시간만이 허락됐다. 마지막으로 갖고 있던 시계와 만년필을 빼앗긴 뒤 카로 부부는 가축운반 열차칸으로 밀려들어갔다](키르스텐 세룹-빌펠트, 「걸림돌」, 살림터, 2016, 60-61쪽).
[열차에서 사흘 밤낮을 보낸 뒤 테레지엔슈타트에 닿았다. 그곳에서 6주 동안 지푸라기가 깔린 숙소에 갇혀 지냈다. 그 뒤 남녀가 분리돼 나치가 ‘주택’이라 부르는 ‘주택 아닌 주택’으로 옮겨졌다. 50명이 좁은 흙바닥에서 함께 지내야 했다. 이주 첫해에 굶주림과 질병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1943년 한여름 카로는 끝내 굶어죽었다](키르스텐 세룹-빌펠트, 62쪽).
테레지엔슈타트 ‘노인 게토’
유대인 랍비 카로가 죽은 테레지엔슈타트는 북보헤미아에 있는 작은 도시다. 지도를 보면 독일 드레스덴과 체코 프라하의 딱 중간지점이다. 지금은 체코 영토로 도시 이름도 ‘테레친’으로 바뀌었다. 에거강이 엘베강과 만나는 지점에서 가까운 이 작은 도시는 나름의 오랜 역사를 지녔다. 1780년 오스트리아 황제 요제프 2세가 세운 요새는 ‘전쟁용 건축술의 걸작’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나치 친위대는 테레지엔슈타트를 이른바 ‘명사'(名士)에 속하는 유대인을 포함해 60대 이상 노인들을 몰아넣는 ‘특별 게토’로 썼다. 이 게토에는 △65세를 넘겼거나 55세를 넘긴 허약한 유대인과 그의 아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무공훈장이나 상이군인 기장을 받은 유대인과 그의 아내가 우선적으로 보내졌다. 1942년 7월엔 그곳 원주민들이 모두 다른 곳으로 내보내고 유럽 각국(독일․오스트리아․덴마크․네델란드 등)의 노인 유대인들을 수용했다. 게토 바깥은 체코 경찰이 경비를 맡았다.
나치는 국제사회의 따가운 눈길을 의식해 일종의 선전용으로 테레지엔슈타트를 활용하려 했다. 국제적십자사가 방문할 때에 맞춰 클래식 음악 연주회를 열기도 했다. 하지만 현실은 참혹했다. 이른바 ‘명사’ 유대인들이 묵는 집도 방 하나에 4~5명이 함께 지냈다. 화장실은 사용하기 불편했을 뿐 아니라 끔찍할 정도로 더러웠다. 식량 사정도 좋질 못해 노인들의 건강 상태는 급격히 나빠져 갔다. 나치의 선전대로 ‘양로원’을 기대했던 노인들은 테레지엔슈타트에 닿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숨을 거두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을 위해 싸웠던 노인 유대인들은 엄청난 배신감을 느꼈을 것이다.
‘유대인 최종해결’ 뜻 모은 반제 회의
테레지엔슈타트에 ‘노인 게토’를 만들자는 얘기가 나온 것은 홀로코스트 연구자들 사이에서 널리 알려진 ‘반제 회의'(Wanssee Konferenz)에서였다. 1942년 1월20일 이른 아침에 베를린 변두리에 있는 반제 호숫가 친위대 별장에서 유대인 처리를 둘러싼 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를 이끈 자는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제국보안본부장)이었고, 참석자 13명은 모두 차관급이었다(그래서 반제회의를 ‘차관회의’라고도 일컫는다). 나치 정권의 내무부, 법무부, 외무부, 교통부, 총리 비서실, 나치당대표 비서실, 4개년 경제기획부, 폴란드 총독령 대표와 친위대 고위간부들이 함께했다.
반제 회의는 원래 1941년 12월 초에 열 예정이었으나, 참석자들의 일정 조율이 쉽지 않아 1개월 반 뒤로 미뤄졌다. 회의 첫머리에 하이드리히는 “유럽 유대인 문제의 최종 해결에서는 지리적 경계를 떠나 어디든 관계없이 그 관할권은 친위대 총사령관 하인리히 힘러와 그의 권한을 위탁 받은 나에게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지난 주 글에서, 헤르만 괴링이 하이드리히에게 유대인 문제 최종해결을 위한 권한을 위임하는 문서를 살펴봤었다). ‘유대인 없는 독일’ 나아가 ‘유대인 없는 유럽’이란 목표를 이뤄가는 과정에서 여러 부처 사이에 일어날 수도 있는 불협화음을 피하자는 뜻이었다.
지휘선의 단일화를 확인한 뒤, 부서간 역할 분담을 조율하는 것으로 회의는 빨리 끝났다. 유대인문제를 최종해결하자는 데 뜻을 모았으니, 다른 긴 얘기는 필요 없었을 것이다. 그 회의에서 서기 역할을 맡아 배석을 했던 자가 (1960년 예루살렘으로 납치돼 재판 끝에 처형됐던) 아돌프 아이히만이었다. 제국보안본부(RSHA)의 유대인 전담부서(제4국 B실 4과) 책임자였던 아이히만 중령이 남긴 회의록 내용을 보자.
[담당 부서의 관할 아래, 현재 최종해결 도상에 있는 유대인들을 적절한 방식으로 동부에서의 강제노동에 투입해야만 한다. 이 대단위 작업장에 남녀 따로, 일할 능력이 있는 유대인들을 도로를 건설하는 일에 투입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자연스레 쇠약해져 쓰러질 것이 뻔하다. 만약에 끝까지 버텨내는 사람들이 있을 경우, 그들이야말로 분명 저항력이 가장 큰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에 따른 적절한 조치가 취해져야만 한다](볼프강 벤츠, 20-21쪽).
위 회의록을 요약하자면, (폴란드로 강제 이송한 독일 유대인들을 포함해) 수용소에 가둔 유대인들을 혹사시켜 죽게 만들자는 것이다. 육체적으로 강해 혹독한 강제노동 조건에서도 죽지 않고 견뎌낸다면? 회의록에 나오는 ‘적절한 조치’란 결국 나치의 일상적 용어가 되다시피 ‘최종 해결’로 죽여 없애버리는 것이다. 아이히만은 회의록 끝부분에 ‘저항력이 큰’ 유대인은 훗날 ‘유대인 재건을 위한 맹아(萌芽)’가 될 가능성이 크다고 적었다.
(그 맹아가 자라나 1948년 중동 한복판에 알박기처럼 지도상에 없던 나라를 세웠다. 미국의 묵인 아래 일찍이 핵무장을 하고 군사력을 키웠고 21세기 이즈음 중동에서 아랍의 비무장 민간인들을 겨냥한 마구잡이 학살과 파괴로 전쟁범죄를 저지르는 상황이다).
유럽 차원의 학살극으로 번져
반제 회의 참석자들은 나치가 절멸시켜야 할 유럽 유대인 규모를 1,100만 명으로 추산했다. 홀로코스트 희생자 600만이 사실이라면, 절반 넘게 죽인 셈이다. 반제 회의가 열린다는 사실을 히틀러는 알았을까. 홀로코스트 연구자 이안 커쇼의 글을 보자.
[히틀러는 반제회의가 열리는 것을 알았을 테지만 확실하진 않다. 사실은 관여할 필요가 없었다. 히틀러는 독일이 다시 세계전쟁에 휘말려든 이상 유대인은 각오해야 할 것이라고 명백히 입장을 밝혔다. 그때쯤이면 지역 차원에서는 위에서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유대인 살해에 앞장섰다. 하이드리히는 히틀러의 포괄적인 유대인 동부 추방령을 등에 업고 살인활동을 범유럽 차원의 학살극으로 확대했다](이안 커쇼, 「히틀러Ⅱ 몰락 1936-1945」, 교양인, 2010, 606쪽).
하이드리히와 그의 상관인 하인리히 힘러(친위대 사령관)는 독일 유대인 수송은 물론 동유럽 점령지에서 유대인들의 학살에 적극 나섰다. 친위대 장교들이 지휘하는 특별 부대들을 이용해서였다. 그런 부대 가운데 하나가 101 예비경찰대다. 500명 규모의 예비경찰대원들의 평균연령은 39세로 독일국방군의 일반 병사들보다는 나이가 훨씬 많았다.
대원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독일 북부의 항구도시 함부르크 출신이었다. 전쟁이 터져 징집되지만 않았다면, 이들은 항구의 부두 노동자로, 또는 제빵사나 영업사원으로 평범하게 지냈을 보통사람들이다. 소수지만 교사, 약사 출신도 있었다. 대원들은 유대인 민간인들을 쏴죽이라는 명령을 받고 처음엔 머뭇거렸다. 사람들을 죽인 저녁엔 술을 마구 퍼마셨다. 그러면서 이들은 차츰 무덤덤한 학살자로 바뀌어갔다(따지고 보면, 이즈음 이스라엘의 젊은 병사들도 탈인간화라는 비슷한 과정을 밟았다). 다음 주 글에서 독일의 보통사람들이 대량 학살의 공범자(하수인)로 바뀌어 가는 모습을 독자들과 함께 살펴보려 한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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