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줄거리」
동인천을 간다며 집을 나섰던 지혜는 가족들의 연락을 받지 않았다. 1999년 10월 마지막 주말, 인현동 상가 건물에서 발생한 화재로 57명이 숨졌다. 그중 56명은 청소년이었다. ‘정민하’라는 가명을 쓴 업주는 그 일대에서 ‘회장님’으로 불리며 불법 영업을 일삼았다. 아르바이트를 알아보러 갔던 지혜도 불이 난 그곳에 있었다. 병원을 헤맨 영순은 사망자 명단에서 딸 지혜 이름을 발견했다. 그리고 화재 참사가 일어난 지 25년에 가까운 세월이 흐른 2024년 4월2일 인천지방법원으로 향했다.
영순은 유가족들과 법정으로 들어섰다. 시계는 오전 1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길쭉하게 의자들이 놓인 방청석에서 사람들은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겼다. 사건 번호가 불리기 무섭게 심리는 다음 재판으로 넘어갔다. 길어야 5분을 넘기지 않았다. 사건들은 줄지어 대기하고 있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원고 김영순, 피고 인천 중구·인천시·대한민국.”
방청석에서 몸을 일으킨 영순은 홀로 원고석에 앉았다. 책상 하나만큼 거리를 두고 떨어진 피고석에는 공무원과 변호사들이 나란히 자리했다. 2023년 12월 ‘재해 사망 보상금 청구’ 소장을 접수한 지 넉 달 만에 잡힌 변론 기일이었다.
“이지혜가 인현동 화재 사건으로 사망하고, 주변 사람들의 잘못된 증언으로 인해 화재 건물의 종사자로 등재돼 재해 사망 보상금을 받지 못했으나…명백한 증거가 없는 이상, 이에 관해 다시 다툴 수 있는 것은 명확합니다.”
법무사는 질문이 거의 없을 거라며 귀띔했지만, 영순은 소장과 준비 서면을 혼자 읽고 또 읽었다. 청구 이유는 간단했다. 지혜는 인현동 화재 참사가 수습되는 과정에서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했다. 그건 ‘희생자’가 아니라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참사 없는 나라에서 편히 쉬기를”
해를 넘기도록 장례는 치러지지 않았다. 인현동을 향한 관심은 정민하와 뇌물수수 공무원 등 피고인이 33명에 달한 재판에만 쏠려 있었다. 합동 분향소가 차려진 인천실내체육관 바깥에서도 어느덧 새천년, 21세기, 밀레니엄과 같은 말들로 떠들썩했다. 수능도 포기한 채 정환은 동생 지혜의 영정 사진이 놓인 체육관에 머물렀다.
“아르바이트생은 보상도 못 받아요.”
누군가 지나가며 말했다. ‘법이 원래 그런 건가’라고 정환은 생각했다. 참사가 벌어지자 장례식장과 합동 분향소에는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취재 과정에서 지혜가 ‘라이브Ⅱ’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는 말도 떠돌았다. 기사에 쓰인 몇 줄이 지난한 싸움의 시작일 거라고 그땐 미처 알지 못했다.
“보상금 지급 대상은 방화자·종업원 2명을 제외한 54명에게 지급하도록 하며 사망자에 대한 장례비 지급액을 350만원으로 의결하고자 하는 데 이의 없으십니까?”⑴
중구 보상심의위원회 제1차 회의는 2000년 1월17일 중구청에서 열렸다. 회의는 일사천리였다. 안건을 놓고 아무런 이의도 나오지 않았다. 8명 전원 동의로 보상금·장제비 지급액 결정 안건이 통과됐다.
54명. 희생의 경계는 갈렸다. 그때까지만 해도 인현동 화재 참사로 56명이 숨을 거뒀다. 그로부터 이틀 전 제정된 ‘인천시 중구 인현동 화재사고 관련 보상 조례’는 “실화자와 가해자이거나 그 종업원과 건물주 및 공무수행 중인 자”를 보상 대상에서 제외했다. 사망자 명단에서 유일하게 성인이었던 20대 남성은 참사 당시 ‘라이브Ⅱ’ 주방에서 일했다. ‘라이브Ⅱ’가 아닌 곳에서 유일하게 숨진 청소년 1명은 화재 현장인 지하 ‘히트노래방’에 있었다. 두 사람만 빠진 54명이 애초 보상 대상자였다.
“참사가 없는 나라, 안전한 나라, 원칙이 통용되는 나라, 그래서 더 이상 죽음을 권유하지 않는 나라에서 편히 쉬기를 바랍니다.”⑵
학생 대표는 조사를 읽어 내려갔다. 침묵에 잠긴 체육관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이어졌다. 인천시가 제시한 보상 절차를 유가족 대책위원회가 조건 없이 동의하면서 합동 장례식이 열렸다. 참사가 일어난 지 석 달이 지난 때였다. 바로 전날 검찰은 ‘라이브Ⅱ’ 업주 정민하와 하나뿐인 대피로였던 출입문을 잠근 관리사장에게 각각 징역 7년, 징역 5년을 구형했다.
▲보상 심의마다 달라진 희생의 경계
“기대는 하지 마세요.”
재해 사망 보상금 청구 소송을 시작한다는 소식을 듣고 정환은 확률이 없는 싸움이라고 생각했다. 어머니가 마주할 상실감부터 떠올렸다. 두 사람은 “인천이 싫어서” 경남 김해로 내려갔다. 지혜 가족이 살았던 인천 집에는 소송비용을 납부하라는 통지서가 계속 날아왔다. 그때마다 영순은 숨이 막혔다. 2003년 서울고등법원이 항소를 기각한 재판 때문이었다.
“피고 대한민국, 인천시, 중구에 대한 청구는 모두 이유 없어 이를 각 기각하기로 하여 주문과 같이 판결한다. 원고들의 항소를 기각한다. 항소비용은 원고들의 부담으로 한다.”
손해배상 소송에 나선 원고는 영순과 정환이었다. 공무원들의 직무상 의무 위반과 불법 행위로 인한 손해를 배상할 책임이 있다는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다 소용없어.”
법정 문을 나서며 다른 유가족이 한숨을 내뱉었다. 1심에서 인천지방법원은 피고인 중구와 인천시, 대한민국의 손을 들어줬다. 항소심도 마찬가지였다. 결론과 관계없이 소송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기나긴 협상 끝에 합동 분향소가 문을 닫고, 유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지는 동안 보상 명단에서 지혜 이름은 빠졌다.
53명. 희생의 경계는 또 한 번 갈렸다. 중구 보상심의위원회는 제1차 회의 이후 한 달 만인 2000년 2월16일 두 번째 회의를 열어 ‘보상금 지급 대상자 결정’ 안건을 다뤘다. 지급 대상자는 54명에서 53명으로 줄어 있었다.
“종업원 및 방화 가담자에 대하여는 보상금 지급을 보류하고, 일반 사망자 53명만 우선 지급하고, 제외자 3명은 추후 방화 가담 및 종업원 여부에 관한 법적 증빙서류 확보 후 보상금 지급을 결정하고자 하는데 의견을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⑶
‘일반 사망자’였던 지혜 이름은 어느새 종업원 명단에 포함돼 있었다. 전원 동의로 안건은 의결됐다. 그리고 ‘보류’가 ‘제외’로 둔갑하기까진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지혜 및 장○○은 종업원이기 때문에, 그리고 인테리어 인부인 김○○은 실화자로서 보상 대상이 될 수가 없었고, 중구 보상심의위원회가 심의 과정에서 제외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⑷
그해 3월11일 인천시의회 본회의에서 최기선 당시 인천시장은 시정질문 답변서를 읽어 내려갔다. 종업원 여부를 가르는 법적 증빙서류가 확보됐는지는 누구도 말해주지 않았다.
▲“사건 종결하고 선고하겠습니다”
“이현민군의 아버지이신 이재원 인현동 화재 참사 유족회장님이 함께해주셨으니 인사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노란 바람개비 사이에서 재원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월호 참사 10주기를 앞둔 2024년 4월13일, 인천시청 애뜰광장에선 추모 문화제가 열렸다. 참사는 인현동 이전에도 있었지만, 인현동 이후로도 끊이질 않았다. 그때마다 재원은 그해 가을을 떠올렸다. 일흔 넘은 나이에 건설 현장 관리직으로 일하는 틈틈이 참사를 기억하는 현장을 찾아 전국을 오갔다.
기억은 잊히기 마련이다. 인현동 화재 참사 20주기를 기점으로 재원은 자료를 모으는 데 몰두했다. 유족회 명의로 인천시에는 재심을 요구하는 호소문을 보냈다. ‘지혜는 왜’,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중구에는 정보공개 청구를 거듭했다. ‘정보 부존재’, 그때마다 돌아온 답은 한결같았다. 증빙되지 않는다면 지혜와 아르바이트의 연결 고리를 끊을 가능성이 있겠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원고가 제출하신 서면 전달됐고요. 이 사건 종결을 하고 판결 선고하겠습니다. 기일은 7월23일.”
판사가 서류를 쳐다보며 말했다. 2024년 6월18일 세 번째로 진행된 변론이었다. 방청석 맨 앞줄에 앉은 재원은 말없이 가방을 메고 일어섰다. 첫날처럼 원고 쪽으로는 아무런 질문도 없었다.
/이순민·이나라 기자 smlee@incheonilbo.com
참고자료
(1)인천시 중구, ‘인현동 화재사고 관련 제1차 보상심의위원회’ 회의록, 2000년 1월17일.
(2)인천일보, 2000년 1월31일자.
(3)인천시 중구, ‘인현동 화재사고 관련 제2차 보상심의위원회’ 회의록, 2000년 2월16일.
(4)인천시의회, 본회의 회의록, 2000년 3월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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