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면서 쭉 둘러봤는데 단풍이 없더라고요. 집 앞에 있는 단풍나무도 아직 초록빛이에요. 원래 가을은 울긋불긋 물든 나무들을 보는 계절인데…”
산림청 등은 이번 주부터 11월 초를 ‘단풍 절정 시기’로 예고했지만 21일 서울 단풍 명소로 유명한 경복궁 일대의 나무들은 여전히 푸른 모습이었다. 이날 수학여행으로 경복궁을 찾은 심예린(14)양의 얼굴엔 단풍을 보지 못한 아쉬움이 묻어났다. 경복궁 향원정을 둘러싼 연못은 특히 가을에 주변이 붉게 물들어 ‘포토 스폿’으로 꼽히지만, 1400여평 크기의 연못을 둘러싼 나무 중 붉은 단풍나무는 1그루 뿐이었고 그마저도 절반이 초록 잎이었다. 때문에 가을을 느낄 수 있는 ‘유일한 나무’ 앞에선 사진을 찍으려는 관광객들의 긴 줄이 이어지기도 했다. 구아무개(57)씨도 “단풍 볼 수 있는 날이 매년 줄어드는 것 같다”면서 “어렸을 때 단풍놀이하려고 내장산에 많이 놀러 갔는데, 앞으로 이런 추억들이 사라질까 봐 서운하기도 하다”고 말했다.
23일이면 ‘서리가 내리고 나뭇잎이 물든다’는 가을의 마지막 절기 ‘상강’이지만, 산에서도 길가에서도 단풍을 찾아보기 어렵다. 한겨레가 22일 기상청과 산림청 자료를 확인한 결과, 실제로 단풍 개화 시기는 해마다 늦어지고 있다. 설악산의 단풍은 평년(30년 평균) 기준 9월28일에 시작되지만, 올해 설악산 첫 단풍은 지난해보다 4일, 평년보다 6일 늦은 지난 4일 시작됐다. 22일 기상청 ‘유명산 단풍현황’ 자료를 보면, 전국 유명산 21곳 중 아직 단풍이 개화하지 않은 산이 12곳에 이른다.
전문가들은 9월까지 지속됐던 이례적 폭염을 그 원인으로 꼽고 있다. 단풍은 곰의 겨울잠처럼 나무가 겨울을 준비하는 과정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나무는 일조량이 줄어드는 겨울에 쓸 양분을 축적하기 위해 기온이 떨어지는 가을이면 광합성을 멈추는데, 이때 초록 잎을 만드는 엽록소가 파괴되고 나머지 색소들이 발현돼 잎이 단풍으로 물든다.
산림청 국립수목원 관계자는 “9월에도 기온이 떨어지지 않아 나무들은 계속 엽록소를 생산했다”며 “나무에겐 정해진 생육일수가 있는데, 이러다 기온이 급격히 떨어지면 물들지 않은 잎들이 떨어져 바로 낙엽이 된다. 거리에서 ‘초록 낙엽’이 많이 보이는 이유는 이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문제는 이러한 ‘지각 단풍’이 생태계까지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다. 정수종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는 “휴지기(휴식기)가 강제로 늦춰지면서 충분히 쉬지 못한 나무는 다음 해 제대로 성장할 수 없고, 본래 나무가 해야 할 탄소 흡수, 공기 정화, 물 순환 등의 기본 생태적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기 어려워진다”고 말했다. 정 교수는 “기후위기 속도를 늦추지 않는 이상 이러한 현상을 달리 막을 방법은 없다”며 “10년∼20년 후에는 우리나라에서 단풍을 보지 못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고 덧붙였다.
한겨레 고나린 기자 / m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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