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는, 마을 잔치를 열겠다는 부친 한승원 작가에게 “지금 세계 두 곳에서 전쟁을 하고 있는데, 축하 잔치를 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런 취지에서 기자회견도 따로 갖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다. 한강 작가가 이야기한 “세계 두 곳”에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과 함께,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침공이 포함된다.
우크라이나와 팔레스타인의 고난을 환기시키는 한강 작가의 메시지는 뜻깊다. 이 메시지를 통해 우리는 「소년이 온다」와 「작별하지 않는다」의 이야기들이 지금도 곳곳에서 이어지고 있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하지만 그간 한국 사회가 이런 현실에 기울인 주의와 관심의 정도를 돌아보면, 착잡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한강 작품들의 배경이 된 우리 사회는 정작 그런 이야기들에, 특히 팔레스타인에서 들려오는 이야기에 너무 무심했기 때문이다.
10월 현재, 가자지구의 팔레스타인인 사망자는 4만 명을 훌쩍 넘는다. 실종자는 최소 6000명, 최대 2만 명에 이른다. 부상자는 10만 명에 육박하고, 무려 190만 명이 정든 집과 동네를 떠나 난민 신세가 됐다. 4만 명이 넘는 사망자 중 하마스 대원이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신원이 확인된 사망자 3만 4000여 명 중 60%가 여성이거나 아동, 노인이다. 사망자의 압도적 다수가 민간인이라는 의미다. 반면 이스라엘군 사망자는 모두 합해 800명이 조금 넘는다.
어떤 각도에서 보더라도 이 상황은 ‘전쟁’이라는 말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이라는 공식 표현은 사태의 핵심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다. 이것은 일방적인 학살이다. 가자지구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한 인종 청소다. 이런 일이 지구 한 쪽에서 벌어지고 있지만, 지금 우리는 너무나 태평하다. 그해 5월 광주 바깥의 대한민국 곳곳처럼 말이다.
이스라엘 주도 전쟁에 끌려 다니는 미국, 독일
한국 말고 다른 나라들은 사정이 어떨까? 다들 그래도 우리보다는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것 같지만, 나라마다 그 강도나 방향, 이에 따른 여론의 향배가 다르다. 물론 한 가지 공통점은 있다. 작년 10월 하마스가 이스라엘 민간인들을 기습 공격하고 납치했을 때에 비하면 이스라엘을 두둔하는 목소리가 많이 수그러들었다는 점이다.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하마스의 공격은 비전투원에 대한 무차별 테러였다. 따라서 인질 구출을 명분으로 한 이스라엘의 군사작전이 정당성을 내세울 수 있었다.
그러나 1년이 지난 지금, 가자지구에서 펼쳐지는 이스라엘군의 활동은 인질 구출과는 거리가 멀다. 네타냐후 정부는 납치된 자국 시민 구출이 아니라 이참에 팔레스타인 자치구역을 지도에서 없애버리는 것이 작전 목표임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최근에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눈엣가시 같던 레바논 남부의 헤즈볼라도 척결하고 중동 내 유일한 도전국인 이란에 대해서도 군사적 우위를 확인받으려 한다. 즉, 지금 벌어지는 일은 이스라엘이 일방적으로 주도하며 가자지구(어쩌면 서안지구로까지 확대될?) 팔레스타인 민간인 학살을 수반하는 제5차 중동전쟁이다.
이스라엘이 기획하고 주도하며 홀로 승리를 구가하는 전쟁이기에 전쟁을 끝낼 수 있는 세력도 이스라엘뿐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정부는 전쟁을 끝낼 의사가 없다. 지금 이 순간도 레바논 내부로 더 깊숙이 진격할 생각만 하고 있다. 9월 18일 UN 총회에서, 반세기 넘는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영토(지금의 가자지구와 서안지구를 합친 것보다 더 넓은, UN이 정한 영토가 있다!) 불법 점령을 1년 안에 중단하라는 결의가 181개 회원국 중 2/3가 넘는 124개 국의 찬성(대한민국은 기권)으로 통과돼도 아랑곳없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국내 정치를 좌우하는 주류 정치세력, 언론, 학계가 모조리 이스라엘만 편드는 나라들이 있다. 미국과 영국 같은 나라들이 그렇고, 이보다 더 극단적인 사례로 독일이 있다. 이 나라들에서는 극우 포퓰리스트부터 신념에 찬 리버럴에 이르기까지, 심지어 독일의 경우는 온건좌파를 넘어 상당수 급진좌파에 이르기까지 정계와 언론계의 모든 엘리트가 무조건 이스라엘을 지지하고, 이스라엘을 조금이라도 비판하면 ‘반유대주의’라 몰아세운다.
물론 이런 나라들에서도 바닥 민심은 다르다. 미국은 오랫동안 친이스라엘 정서가 깊이 뿌리 내린 나라였지만, 작년 말부터는 이스라엘군의 가자지구 작전을 ‘반대’하는 의견이 ‘찬성’보다 높아져 지금껏 이 기조가 이어지고 있다(갤럽 정례 조사). 그리고 이런 여론 흐름이 올해 4월부터 급기야 대학가의 팔레스타인 지지 점거시위로 표출되기 시작했다.
한편 독일에서도 최근 여러 여론조사를 통해, 다수 시민이 이스라엘군의 가자지구 내 활동에 반대하고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고 있다. 대표적인 여론조사기관 가운데 하나인 포르사(Forsa)의 조사에서는, 작년 말에 이스라엘의 군사행동을 지지하는 입장이 60% 이상으로 나온 데 반해 올해 6월부터는 이를 반대하는 입장이 60% 이상으로 나온다.
그럼에도 엘리트층은 요지부동이다. 네타냐후 정부의 가장 신실한 우군인 미국 민주당 주류야 말할 것도 없다. 바이든 정부의 부통령인 캐멀라 해리스 민주당 대통령후보는 현 정부의 친이스라엘 정책에 어떤 변화도 없을 것이라고 거듭 못 박았다. 민주당의 중요한 동맹세력인 노동조합 쪽에서 ‘반전’ 목소리가 나오고 대학가에서 시위가 이어져도 이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미동도 하지 않으려 한다. 민주당 지지 블록 내의 이런 심각한 분열은 11월 대선에서 트럼프 재선-민주당 패배의 결정적 요인이 될 가능성이 크다. 이스라엘 극우파 네타냐후가 미국 정치 극우화의 키를 쥐고 흔드는 격이다.
하지만 이보다 더 당황스러운 것은 독일 정치권 풍경이다. 극우파와 리버럴이 제도권 정치를 양분하는 미국과 달리, 독일은 겉만 보면 이념 스펙트럼이 왼쪽으로 크게 확장된 다당 구도다. 하지만 이스라엘 문제에 관한 한, 이 다당 구도는 일당 통치에 가까운 단일 색채로 뭉개져 버린다. 극우파 ‘독일을 위한 대안’부터 기독교민주연합/사회연합을 거쳐 사회민주당, 녹색당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이스라엘이 무슨 짓을 벌여도 박수치고 응원할 태세다.
상식대로라면, 원내에서 그래도 이에 유일하게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야 할 세력은 좌파당이다. 사회민주당의 신자유주의화를 비판하고 사회주의의 이상과 원칙을 계승, 발전시키겠다며 출범한 좌파당이라면, 제국주의 반대와 반전평화의 원칙에 따라 다른 모든 정당과 선명히 구별되는 의견을 내야 마땅했다. 그러나 좌파당은 무색무취한 양비론에서 더 나아간 입장을 내놓지 못했다. 조금이라도 팔레스타인을 옹호하는 것처럼 들리는 주장을 하면 ‘반유대주의’라며 달려드는 대다수 언론의 분위기가 그렇게 두려웠던 것일까.
현재 독일 정계에서 간헐적이나마 이스라엘을 비판하는 목소리를 내는 정치세력은 좌파당에서 탈당한 자라 바겐크네히트 등이 창당한 ‘자라 바겐크네히트 연합’뿐이다. 이민 확대 반대 등의 주장을 내놓아 ‘좌파’에서 이탈했다는 비판을 받는 ‘자라 바겐크네히트 연합’이지만,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만 놓고 보면 이들 말고는 독일에 ‘좌파’가 없는 셈이다.
‘반유대주의’ 딱지에도 굴하지 않은 ‘굴복하지 않는 프랑스’
이들보다는 좀 더 숨통이 트여 있는 나라들도 있다. 대표적으로, 프랑스를 들 수 있다. 프랑스도 주류 엘리트 내 분위기는 영국, 독일과 비슷하다. 대다수 언론이 ‘반-이스라엘’과 ‘반-유대인’을 동일시하는 것도 마찬가지고, 극우파 ‘국민결집’과 리버럴 정치인들이 서로 다투다가도 중동 문제만 불거지면 아랍-이슬람에 맞서 이스라엘을 옹호하는 것 역시 낯익은 광경이다.
그러나 프랑스는 한 가지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팔레스타인인의 생존권과 자결권을 적극적으로 지지해온 주요 정치세력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장-뤽 멜랑숑이 이끄는 급진좌파 ‘굴복하지 않는 프랑스’가 그들이다.
프랑스 좌파 안에서도 사회당은 이스라엘에 더 기울어 있다는 점에서 독일 좌파정당들과 그리 다르지 않다. 특히 멜랑숑 무리와 제휴하느니 마크롱 정부와 협력하는 게 낫다는 입장인 사회당 우파는 팔레스타인 민간인 학살이 전개되는 지금도 주류 언론의 이스라엘 지지 기조에 맞장구친다.
그러나 ‘굴복하지 않는 프랑스’는 확연히 다른 길을 걸어왔다. 무슬림 시민의 권리를 옹호하는 데 앞장선 탓에 마크롱에게 ‘이슬람 좌파주의’라는 기괴한 비난(윤석열의 ‘공산전체주의’의 프랑스판?)까지 받은 ‘굴복하지 않는 프랑스’는 작년 10월 이후 일관되게 이스라엘의 군사행동에 반대했다. 한때 주된 연대 대상이었던 독일 좌파당과는 크게 엇갈리는 행보였고, ‘굴복하지 않는 프랑스’만큼 조직적으로 팔레스타인 연대 활동을 벌이지는 않는 ‘자라 바겐크네히트 연합’과도 구별되는 태도였다.
덕분에 멜랑숑과 그 동지들은 지금도 주류 언론으로부터 ‘반유대주의자들’이라 공격 받는다. 그러나 이들은 이런 고집스러운 행보를 통해 프랑스 사회 전체의 일정한 반향을 이끌어냈다. 가령 이번 선거에서 반좌파 진영은 ‘신인민전선’ 내부의 ‘이슬람 좌파주의’ 요소, 즉 ‘굴복하지 않는 프랑스’를 집중 공격했고, 사회당, 녹색당 등이 이런 공격을 견뎌내지 못해 결국 신인민전선을 박차고 나가길 바랐다. 그러나 ‘굴복하지 않는 프랑스’의 일정한 헤게모니를 통해 신인민전선은 계속 유지됐고, 덕분에 ‘반유대주의’ 따위 공세의 추악한 진상만 드러나 버렸다.
그 결과, 미국, 독일과 달리 프랑스에서는 이스라엘 비판 흐름이 제도정치 안에서 일정한 위상과 지분을 확보하게 되었다. 이스라엘에 대해 점점 더 환멸을 느끼는 대중의 여론이 정치 무대에 표출될 수 있는 통로가 그나마 열린 것이다. 9월 18일 UN 총회의 팔레스타인 문제 결의안 표결에서 프랑스가 과감히 ‘찬성’에 투표하고 최근 마크롱 대통령이 강대국 지도자 중에서는 처음으로 대이스라엘 무기 수출 중단을 촉구하고 나선 것은 어느 정도는 이런 국내 세력균형 덕분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서유럽 국가들 가운데에는 이런 프랑스의 ‘중도’적 입장을 뛰어넘어, 오래 전부터 선명하게 이스라엘을 비판하며 팔레스타인인들의 자결권을 지지해온 나라들이 있다. 대표적인 사례는 스페인과 아일랜드다.
스페인은 우파는 몰라도 좌파 사이에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한 합의가 존재한다. 이 합의는 “우크라이나에 대해 국제법 존중을 요구해야 한다면, 가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이를 요구해야 한다”는 사회노동당 소속 페드로 산체스 총리의 발언으로 요약된다. 이런 입장을 바탕으로 산체스 총리는 작년 말부터 줄곧 이스라엘의 확전을 비판했고, 올해 5월에는 1967년 국경선(6일전쟁 이전 국경선)을 전제로 팔레스타인의 국가 지위를 공식 승인했다. 더 나아가 6월에는 이스라엘을 인종학살 혐의로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행보에 동참했다.
온건좌파를 대표하는 산체스 총리가 이토록 과감한 모습을 보인 것은 어느 정도는 급진좌파의 압박 덕분이었다. 현재 사회노동당 주도 연립정부에 참여하고 있는 좌파연합 ‘수마르(Sumar)’의 지도자 욜란다 디아스는 연정 협상 중에 정책협약의 핵심 내용 가운데 하나로 팔레스타인의 국가 지위 인정을 요구했다. 더불어 수마르는 대이스라엘 무기 수출 중단과 국교 단절도 내세웠다. 연정 바깥에 있는 또 다른 좌파 정치세력 ‘포데모스(Podemos)’는 지금도 산체스 정부에게 이스라엘과 즉각 국교를 단절하라고 압력을 넣고 있다.
하지만 이런 급진좌파의 압박을 논외로 하더라도 스페인에서는 온건좌파 역시 독일이나 프랑스 사회민주주의 세력들과 구별되는 시각으로 중동 문제에 접근해왔다. 사회노동당은 2004년에 로드리게스 사파테로가 총선에서 승리해 총리로 취임하자마자 곧바로 이라크에서 자국 파병 부대를 철수시킨 전력이 있다. 이때부터 이미 스페인 내 여론은 다른 서유럽 국가들과 확연히 다른 점이 있었다. 올해 산체스 정부가 팔레스타인의 국가 지위 인정을 결정했을 때에도 각종 여론조사에서는 이를 ‘지지’하는 입장이 70% 넘게 나왔다.
민족해방투쟁을 경험한 두 나라, 아일랜드 그리고 대한민국은?
스페인에서 유독 팔레스타인에 동정적인 여론이 강한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설명이 있지만, 그 중 하나는 스페인과 지중해 건너 이슬람 사회들 사이에 인적 교류와 접촉이 일상적으로 활발히 이뤄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정도의 교류가 없는데도 팔레스타인 지지 여론이 스페인보다 더 강한 나라가 있다. 아일랜드다.
사실 스페인은 5월에 다른 두 유럽 국가와 공동으로 팔레스타인의 국가 지위 인정을 공표했다. 한 나라는 노르웨이이고, 아일랜드가 다른 한 나라다. 그리고 이때 아일랜드의 여당은 중도우파인 ‘피네게일’이었다. 즉, 아일랜드는 좌파, 우파 가릴 것 없이 거의 모든 정치세력이 팔레스타인에 우호적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아일랜드 보통사람들의 팔레스타인 지지 여론이 워낙 압도적이다. 아일랜드에서는 올해 2월에 실시된 여론조사(‘Ireland Thinks’)에서 “이스라엘이 가자에서 학살을 자행하고 있다”는 의견이 약 80%의 지지를 받았다. 다른 어떤 나라보다 더 빨리, 더 강하게 이스라엘을 비판하는 여론이 결집한 것이다.
아일랜드 사회의 이런 반응은 오직 아일랜드의 역사를 통해서만 설명된다. 아일랜드가 오랫동안 영국의 식민지였고, 20세기 초에 치열한 항쟁과 내전을 겪으며 독립을 쟁취했다는 사실 말이다. 더구나 아직도 영국의 일부인 북아일랜드의 통일 과제가 남아 있다. 이런 배경을 지닌 아일랜드인들에게 팔레스타인인들의 고투는 자신들이 겪은 것과 같은 ‘민족해방투쟁’으로 다가온다. 팔레스타인인들 역시 영국 식민통치를 경험했고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의 원흉 또한 영국이기에 아일랜드인들로서는 더욱 감정이입이 될 것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시선을 유럽이 아니라 한국 사회를 향해 돌리지 않을 수 없다. 아일랜드인들의 과거가 치열한 민족해방투쟁의 역사라면, 우리의 20세기사 역시 그에 견줄만한 피와 땀, 눈물이 어린 민족해방투쟁사다. 그런데 이런 공통의 경험을 딛고 서 있으면서도 현재의 팔레스타인을 바라보는 아일랜드 사회의 시각과 한국 사회의 시각에는 큰 차이가 있다. 한국 사회는 팔레스타인의 수난에 애써 눈 감으려 할 뿐만 아니라 아예 관심 자체가 적다.
도대체 이유가 뭘까? 하지만 이유를 세세하게 따지기 전에 먼저 긴급한 성찰이 있어야겠다. 윤석열 정부의 무모하고 무도한 한일동맹 추구와 뉴라이트 이데올로기 선양 때문에 요즘 항일독립운동의 기억이 빈번히 다시 소환된다. 그러나 현재 지구의 다른 곳에서 반복되는 억압과 수탈에 맞서 공감과 연대의 손길로 되살아날 수 없는 과거 투쟁사의 기억이라면, 그것이 과연 어떤 보편적 위력을 발휘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그런 위력이 아니라면, 어떻게 이 모든 역류의 시도에 맞서고 이를 제압할 수 있겠는가?
지금이라도 「소년이 온다」와 「작별하지 않는다」가 전하는 이야기들의 연장선에서 가자를 바라봐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서야 할 ‘인간’의 자리가 어느 쪽인지 가려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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