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 식 주 의 자’
푸른 바탕 위로 곧 바스러질 듯한 꽃잎의 형상, 그 위에 세로로 정갈하게 적힌 책 제목에 이르기까지. 해 저문 11일 저녁 8시께, 대낮처럼 환한 경기 파주시의 아트인 인쇄 공장에서 한강 작가 소설 ‘채식주의자’의 표지가 독자들이 알고, 원하는 모습 그대로 거대한 인쇄기에서 쉴새 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좋은 수상 소식이 생겨서 찍는 거니까 최상의 품질로 만들어야죠. 표지 색이 잘 나오고 있는지 더 꼼꼼하게 보고 있어요.” 공장 한쪽에서 이 인쇄소 기장 표아무개씨가 모니터 속 표지 색과 인쇄된 표지의 색을 비교해 거듭 잉크 비율을 조절하며 말했다. 20년 차 인쇄 베테랑, 표 기장의 눈이 빛났다.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 소식이 전해진 뒤, 7년 전부터 출판사 창비와 계약을 맺고 한강 작가의 대표 저서 ‘채식주의자’를 인쇄하는 인쇄업체 아트인도 바쁘게 인쇄기를 돌리기 시작했다. 이날 아침 8시 반 아트인 단체 대화방에 “오늘 ‘채식주의자’ 인쇄 작업 들어가야 합니다. 한강 작가님이 노벨 문학상 수상하셔서, 창비에서 연락이 왔어요”라는 대표의 메시지가 전해진 뒤, 인쇄 공장에도 전에 없던 흥분과 긴장이 뒤섞인 하루가 시작됐다고 한다.
같은 날 도심의 대형 서점부터, 동네 책방, 도서관, 온라인 서점에 이르기까지 물성을 지닌 한강 작가의 종이책을 원하는 독자들이 넘쳐났다. 책을 구하기 위해 서점 문 열기를 기다리는 ‘오픈런’ 경쟁이 벌어지는가 하면, 대형 서점 누리집들은 한동안 접속장애를 겪기도 했다. 책이 더 빨리, 더 많이 필요했다. 근래 보기 드문 일이었다.
이날 저녁 찾은 아트인 인쇄 공장에선 거대한 인쇄기 두 대가 쉴 틈 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검은색, 빨간색, 파란색, 노란색 잉크를 담은 10m 길이의 기계는 입력값에 맞춰 책 ‘채식주의자’의 표지를 빈틈 없이 찍어냈다. 또 다른 한 대는 1시간에 32만 쪽을 찍어내는 속도로, 1m 높이로 쌓인 흰 종이를 들고 내며, 책의 본문이 될 검은 글자를 양면으로 인쇄했다.
표 기장은 “2만부를 찍기로 했는데 우선 1만부 먼저 찍어서 보내기로 했다. 오늘 새벽 내내 인쇄기를 돌리면 내일 아침 정도에 인쇄가 끝날 것 같고 바로 제본소에 보낼 예정”이라고 말했다. 표 기장을 포함해 직원 6명이 분주하게 인쇄기의 움직임을 살폈다.
꼼짝없이 밤샘 작업을 하게 됐지만 직원들은 ‘겹경사’라며 흥겨워했다.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에 더해, ‘종이 책을 애타게 찾는 독자’까지 확인한 덕이다. 신용운 아트인 생산팀 부장은 “평소 인쇄하던 양의 2∼3배를 찍어내고 있다. 책이 부족해 급히 생산에 돌입하는 건 국내 책 중에서는 처음인 것 같다”며 “우리가 인쇄하고 있는 책을 써내신 작가님이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는 게 그저 신기하고 좋다. 직원들도 겹경사라고 함께 기뻐했다”고 말했다.
인쇄공장 직원들의 바람은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찾아든 종이책의 활력이 번지는 것이다. 신 부장은 “요즘은 종이책을 찾는 사람들이 많이 줄어 업계가 침체하고 있었는데, 이번 일을 계기로 출판업이 좀 더 활발해졌으면 한다”고 말했다.
표 기장도 다시, 종이책의 시대를 기대했다. “20년째 인쇄업에 종사하고 있는데 점점 일이 줄어든다는 것을 느꼈어요. 학생 수가 줄면서 교과서조차 인쇄 물량이 많이 줄어 걱정하던 차에 기쁜 수상 소식이 들려온 겁니다. 인쇄업계에게 좋은 탄력이 될 것 같습니다.”
한겨레 고나린 기자 / me@hani.co.kr
댓글0